소설리스트

855화 (855/978)

855화. 병부를 맡다

대장공주는 말을 하면 할수록 어째 다시 화가 치미는 듯했다.

“어찌 그 무서운 곳에 갇혀 있으면서도 정신을 못 차릴 수가 있느냐? 하필 연이는 그런 놈을 골라 정효양이 아니면 안 되겠다니 정말 미쳐버리겠어.”

“그럼 며칠 더 가두는 수밖에요.”

대장공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형양 정씨 가족들이 매일 날 찾아와 들볶아 대는 통에 나도 폐하께 그를 풀어주도록 청하겠다고 약속을 해버렸단다. 하지만 폐하께서 풀어주시질 않으시니 내가 괜히 실언을 해버린 게 되잖느냐.”

사방화는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풀어주실 거라 생각하신 거죠? 다시 돌아가 형양 정씨 가족들에게 어찌 말해야 할지 답이 나오질 않으시는 거잖아요.”

대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널 찾아온 거란다. 네가 폐하께 부탁을 좀 해주면 안 될까? 내가 집으로 데려가 반드시 혼쭐을 내 그놈을 단단히 고쳐놓을 생각이란다.”

“열흘이나 갇혀 있었는데도 미녀를 내놓으라 난리를 피워댄 사람을 고모님께서 무슨 수로 혼쭐을 내시려고요? 만일 정효양이 못 견뎌 형양 정씨로 도망가 버린다면 금연과의 정혼도 망쳐버리는 거잖습니까. 금연이 계속 정효양이 아니면 혼인하지 않겠다고 하면요? 형양까지 쫓아가실 생각이십니까?”

대장공주도 사방화의 말에 일리가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어찌하면 좋으냐?”

“제 생각엔 우선 폐하께서 조금 더 가둬놓게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열흘로는 그 나쁜 성질머리를 고쳐놓지 못했지만, 보름, 20일, 30일은 가능할지도 모르잖아요?”

“그건……, 너무 길지 않니? 형양 정씨 식구들이 그때까지 기다릴까?”

“못 기다리겠다면 직접 폐하를 찾아뵈라고 해야지요. 지금 도성에서 문무 고과가 열리고 있는데 재주 많은 큰 공자는 지원 안 하셨답니까?”

대장공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나도 모른다. 며칠째 정효양 그놈 생각으로 골치가 아픈데 정효순을 생각할 시간이 어딨겠니.”

“형양 정씨는 줄곧 도성에 발을 들이기 위한 계획이 있던 사람들입니다. 만약 문무 고과에 지원해 선발되면 도성에 오래 남게 되겠지요. 정효순과 우상부 아가씨 혼사가 무산됐으니 고금 이래 형님이 혼인하기 전까지 아우는 혼인할 수 없단 규율이 있었단 걸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러니 고모님께선 도성에 아직 출가하지 않은 귀족 아가씨들을 물색하셔서 형양 정씨 큰 공자에게 중매를 서 주시는 게 나을 거예요. 어쨌든 대장공주부와 형양 정씨는 사돈이 될 사이이니 말입니다.”

“제 아우를 대신해 벌을 받겠다며 우리 연이를 내치고 간 그놈 때문에 내가 얼마나 화가 났었는데 그놈 혼사까지 신경 써주란 말이냐?”

대장공주는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폐하께서 정효양 성질머리를 고쳐놓으려면 열흘은 가당치도 않다고 고칠 때까지 가둬두겠다고 하셨다고 말씀해 주세요. 정효순에게 중매를 서 주셔야 앞으로 그들도 매일같이 고모님을 괴롭히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정효양의 형에게 좋은 아내를 골라주시면 나중에 금연의 동서가 될 텐데 금연도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이와 지내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이구나.”

대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방화도 웃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대장공주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정효양이 그 성질머리를 고칠 때까지 어디 한 번 두고 보자꾸나. 폐하께 계속 가둬놓으시라고 해야지.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구나.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 폐하께서 병문안 금지령을 푸시면 연이에게 한번 들리라고 하마.”

“예, 고모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사방화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시화에게 대장공주를 배웅하도록 했고, 대장공주도 기뻐하며 황궁을 빠져나갔다. 

* * *

저녁 무렵, 진옥은 궁으로 돌아와 사방화의 식사 동무가 되어주었다.

식사 중 사방화가 대장공주에게 건넸던 이야기를 전해 주자, 진옥은 웃음을 터뜨렸다.

“항상 총명하다고 자부하시던 고모님이야말로 가장 우둔하신 분이군.”

사방화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 밑에서 자란 금연이 깨어있는 것도 참 대단해.”

이어진 진옥의 말에 사방화가 문득 입을 열었다.

“금연이 혼인하기 전에 마음만 먹으시면 충분히 되돌릴 수 있습니다.”

진옥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마음 없어.”

사방화는 진옥을 힐끗 보며 소리 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뭐라고 욕하는 것이오?”

“욕하는 걸 들려주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형양 정씨 가족들은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세요?”

“우선 도성에 머물도록 할 거요. 오늘 오후에 소천자를 보내 정효순에게 조정에 들 생각이 있냐고 물었소. 정효양이 돌아올 때까지 세 식구가 정세를 파악한다면 죽이지 않을 거고 그렇지 않다면 빨리 죽여버리는 게 낫소.”

사방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정효양이 돌아올 때까지 세 가족을 남겨두는 것보다 차라리 정효양에게 넘겨 처리하도록 하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진옥이 순간 눈썹을 들썩였다.

“정효양이 사관을 하려는 건 형양 정씨를 충용후부처럼 고귀한 가문으로 만들어 공명정대하게 입세해 형양 정씨의 역사를 새로 쓰려는 겁니다. 그 위대한 염원을 가지고 벌써 낭군님을 따라 북제에 묻힌 형양 정씨 정탐꾼들을 제거하러 떠났는데 정효양이 돌아오면 이젠 어떻게 해도 그 세 가족들에게는 정탐꾼을 어떻게 할 방도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진옥은 조금 더 사방화의 이야기에 눈빛을 빛냈다.

“정효양이 그런 실력도 없는 자라면 애초에 홀로 낭군님을 따라 형양 정씨에게 맞서지도 않았을 겁니다. 군자를 위해, 또 나라의 이익을 위해 굳이 형양 정씨가 여태 해왔던 것들을 따질 필요가 있을까요?

정효양은 이렇게 성심성의껏 나서고 있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 나서실 필요 없이 그냥 정효양이 직접 처리하도록 두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물론 정일, 정성 그 어르신들을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남진과 북제가 언제 전쟁을 일으킬지, 얼마나 전쟁을 이어갈진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손실을 최소화하더라도 전쟁은 결국 국력에 해로운 일이에요. 앞으로 몇 년 안에 남진 강산엔 크게 사람을 써야 할 때가 있을 테니 정효양과 형양 정씨를 쓸 수 있다면 유용하게 써야 합니다.”

진옥이 웃으며 사방화를 쳐다보았다.

“그대가 강산을 다스리는 이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듯하군. 방화,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대와 진강은 반드시 오래오래 살아서 짐의 든든한 힘이 돼줘야 하오. 역사를 거울로 삼는 것 보다 두 사람의 간언이 더 절실해.”

사방화도 진옥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픽, 웃으며 답했다.

“네, 최대한 살아 보겠습니다.”

* * *

며칠 뒤 진옥은 정효순을 병부 직에 봉했다. 이는 문무 고과도 면한 파격적인 등용이었다.

마침 정일, 정성 모두 고민에 잠겨있던 시점이었다. 대장공주에게 정효양 구명을 청했지만 결국 정효양은 풀려나지 못해서 그냥 그를 두고 형양으로 돌아가야 할지 한창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미 도성에 온 지도 보름 가까이 된 데다 일이 꼬여버려 더 이상 실수는 없게 만전을 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보름간 도성 밖으로 소식을 전하지도 못했으니 오래도록 형양과 소식이 통하지 않은 것도 불안에 한몫했다.

그러다 정효양의 관직 소식을 듣게 된 것이었다. 그것도 보통 사람은 쉽게 들어갈 수도 없는 병부라는 좋은 관직을 얻게 되었다. 비록 최의지 밑에서 일하는 작은 관직이긴 하나 도성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문무 고과도 치르지 않은 채 병부에 들어간 것은 엄청난 행운이라 할 수 있었다. 

정일과 정성은 기뻐하며 곧장 형양으로 돌아가려던 계획을 물렀다. 그리곤 정효순을 떠밀며 어서 진옥에게 가 감사 인사를 전하도록 했다. 

정효순도 진옥의 결정을 예상치도 못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만약 문무 고과를 치르면 이목청이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을까 고민하던 차였다.

아무리 중간에 이여벽 일이 껴있더라도 이목청이 경고했던 말이 있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이젠 황제의 뜻이 있으니 이목청도 진옥이 형양 정씨를 중용하는 것을 더 이상 막을 명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효순은 그렇게 서둘러 세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황궁으로 향했다.

* * *

진옥은 마침 어서재에서 이목청과 의사를 나누고 있었다.

이목청은 이틀간 무 고과에 지원했던 학자 중 인재들을 선발해 그 명단을 추렸고, 진옥은 명단을 이리저리 넘겨보다 그에게 대답했다.

“목청, 네가 결정해라.”

그러자 이목청이 웃음을 지었다.

“폐하께선 소신을 진정 신임하시는군요.”

“널 믿지 않았다면 중용하지도 않았지. 근데 잠을 제대로 못 잔 거냐?”

진옥은 말을 하다 몹시 피곤해 보이는 이목청의 안색을 궁금해했다.

이목청은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주신 임무가 많아 좀 지칩니다. 연석은 신보다 더하고요.”

“연석은 그간 아무 경험도 쌓질 않았으니 더욱 버티기 힘들지만, 너는 다르지. 네 능력으론 지금보다 2배가 늘어도 감당할 수 있어. 그 마음속 응어리는 열흘이 지났는데도 아직 풀지 못한 건가?”

이목청이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리 바쁘신데도 신의 마음까지 생각해 주시니 황송할 따름입니다.”

진옥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네 마음속 응어리의 뿌리를 잘 알고 있다. 어서 그 여인을 만나봐라. 난 불가능해도 그 여인은 네 응어리를 풀어줄 수 있을 거다. 짐은 중용한 인재들이 하나하나 쓰러지는 걸 원치 않는다! 너희들을 따라 짐도 이 조정에 힘을 쓰고 있으니 어서 가봐라.”

이목청은 고개를 끄덕이곤 진옥에게 깍듯이 공수를 올렸다.

“황송합니다, 폐하.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 * *

이목청은 어서재를 나와 마침 소천자를 따라 들어온 정효순과 마주쳤다. 

소천자는 서둘러 예를 갖추었다.

“이 대인.”

정효순은 그렇지 않아도 긴장했는데 갑작스레 이목청을 만나 더 멍해졌다.

그에 이목청이 먼저 말을 건네왔다.

“축하드립니다, 정 대인. 병부도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지요.”

정효순도 서둘러 공수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이 대인. 앞으로 이 대인께서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문제없지.”

이목청은 담담히 웃음을 짓고는 내궁으로 향했다. 

정효순은 이목청의 뒷모습을 보며 관원이 마음대로 내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인가 하며 어리둥절해했다.

이내 소천자가 정효순을 힐끗 보며 말했다.

“소인 어서 폐하께 아뢰고 오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주시오. 태감.”

정효순은 곧장 잡생각을 멈췄다. 

소천자는 진옥에게 정효순이 왔단 걸 아뢰고 나왔다가 여전히 이목청이 떠난 방향을 보고 있는 정효순을 보고 웃으며 물었다.

“정 대인, 뭘 보고 계시는 겁니까?”

정효순은 서둘러 시선을 돌리곤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천자는 황궁에선 말을 함부로 해선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어떤 말들은 황제의 분부 없이도 그가 해야만 하는 말이 있음을 알았다. 그는 목소리를 작게 낮추고 정효순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이 대인께선 폐하의 윤허를 받으시고 소왕비마마를 뵈러 가신 겁니다.”

정효순이 깜짝 놀라 물었다.

“듣자니 이 대인과 소왕비마마께서 정혼하신 적이 있다던데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이 대인께선 소왕비마마를 흠모하시지만……. 그 어느 누가 소왕비마마께 마음이 있든 소왕야를 뵌다면 곧장 마음을 접게 되지요. 폐하께서도 예외는 아니셨습니다.”

정효순은 소천자가 어서재 밖에서 이런 얘기를 해준단 것에 깜짝 놀랐다.

“태감, 근데 폐하께서 들어오라고 하셨소?”

“그렇습니다. 지금 바로 드시지요.”

소천자는 정효순을 데리고 어서재로 들어서며, 확실히 형양 정씨 큰 공자의 배짱은 둘째 정효양보다 못하다는 걸 느꼈다. 더불어 금연의 안목이 대장공주보다 훨씬 낫다는 것 또한 말이다.

정효순은 옥안에 앉아 상소를 읽고 있는 진옥 앞에 서둘러 꿇어앉았다.

진옥은 이내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편히 하라.”

정효순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진옥이 소천자에게 분부했다.

“앉게 해드려라.”

소천자는 서둘러 정효순에게 의자를 내어주며 말했다.

“정 대인께선 실로 폐하의 중임을 받으신 듯합니다. 폐하께선 평소 대인들께서 어서재에 드셔도 자리를 내어주시지 않으십니다.”

정효순은 서둘러 진옥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고, 진옥은 손을 내저었다.

“정 대인, 병부를 맡은 건 어찌 생각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자리로 내어줄 수도 있고.”

정효순은 거의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폐하께 아룁니다. 소신이 여부가 있겠습니까? 폐하의 중임을 받아 황송할 따름입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짐은 실로 형양 정씨와 그대를 좋게 보고 있다. 그러니 짐을 실망 시키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이여벽이 가문에서 쫓겨났으니 친애하는 경의 혼사를 어서 마련해야겠지. 대장공주마마께서도 짐에게 청하고 가셨다.”

“소신의 혼사는 급하지 않습니다.”

정효순의 답에, 진옥이 웃으며 말했다.

“형의 혼사가 정해져야만 아우도 혼인할 수 있지.”

정효순은 문득 금연과 정효양을 위한 것임을 깨닫곤 급히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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