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4화. 훌륭한 제왕
진옥은 홀로 계속 백돌과 흑돌을 번갈아 놓았다. 바둑판에선 흑과 백이 교차하며 아주 빠른 속도로 하늘을 찌를 듯한 살기를 뿜었다.
마지막으로 백돌이 놓이고 전국은 막을 내렸다.
“아주 살벌하네요.”
사방화가 진옥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 진옥은 바둑판을 흩트리며 답했다.
“이 정도 살기 가지고 뭘. 밖에 나가면 온 세상이 살기로 가득할 텐데.”
엄청난 높이의 황궁 벽이 가로막고 있음에도 들끓는 민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사방화는 문득 황궁 바깥쪽을 바라보다 눈썹을 치켜올렸다.
“좋은 거 아닙니까? 아니면 전쟁을 치르겠단 소리에 백성들이 모두 침울해야만 좋으신 건가요?”
“당연히 아니지. 그저 저 민심이 황실이 아닌 황권의 슬픔에서 나오는 것인데 황제인 내가 어찌 마냥 기뻐할 수 있겠소?”
사방화는 그 묘한 뜻을 이해하고 바로 눈을 치켜 떴다.
“남진의 황조들께서 민심을 사로잡지 못한 걸 누굴 원망하시는 겁니까?”
“그렇지, 내가 누굴 원망할까.”
한숨을 쉬는 진옥을 보니, 사방화도 그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폐하, 이제 이 강산의 주인은 폐하십니다. 역대 황조들께서 쓰신 역사를 없던 일로 할 순 없겠지만 이제부터 남진의 역사를 새로 쓰실 수 있지요.”
“남진의 역사를 새로 쓴다? 어떻게?”
“남진 백성들을 감싸는 위대한 제왕의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이지요. 새 황제폐하께서 쓰시는 눈부신 행적에 자연히 사씨의 광채도 다 가려질 겁니다.
훌륭한 제왕이란 신하를 제거하는데 신경을 쏟는 것이 아니라 드높은 위치에서 신하를 잘 다스리셔야지요. 남진 전체가 폐하의 것이니 당연히 사씨도 폐하의 백성입니다. 폐하의 그 드넓은 식견과 마음으로 나라를 다 포용하신다면 사씨가 아무리 힘을 키워도 그저 티끌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진옥의 눈빛이 굳어졌다.
“지금 날 위로하는 건가?”
사방화가 바둑판을 한쪽으로 치우며 말했다.
“제가 지금 누굴 위로할 만한 처지로 보이십니까?”
진옥은 그녀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 온화한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사방화, 나 당신에게 할 말이 있소.”
“네?”
방화 아가씨, 방화, 계수 등등 늘 내키는 대로 사방화를 부르던 진옥이 사방화의 이름 석 자를 제대로 부르며 말한 건 처음이었다.
진옥은 파도가 치는 눈빛으로 입술을 깨물다 이야기를 꺼냈다.
“사방화, 꼭 살아내시오. 반드시 살아서 내가 어찌 북제를 정복하고 이 남진 강산을 어찌 잘 다스려갈는지 꼭 지켜보시오.”
사방화도 진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시원하게 대답했다.
“당연하지요!”
“절대 죽지 마시오. 그대가 죽으면 진강은 물론 나도 제대로 살 수 없을 것이오. 역대 황조들께서 바라던 민심의 거대한 지지를 받고, 내 지략으로 강산을 굳건히 지키고 영화가 도래해도 그대가 없다면 다 무의미한 것이오.”
사방화도 잠시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다.
“예, 하늘에서도 천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기회를 주실 겁니다.”
진옥은 기가 찬 듯 살짝 실소를 했다.
“하여간 이 여인은 정말. 소천자! 가서 식사를 내오너라!”
소천자는 서둘러 어선방으로 향하면서 다시 한번 사방화의 진가를 실감했다. 진옥의 기분이 아무리 바닥을 헤매도 사방화가 있다면 언제든 환해질 수 있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그녀가 황후가 아닌 강 소왕의 소왕비라는 사실이었다.
소천자는 저도 모르게 무심코 튀어나온 생각에 곧장 자신의 뺨을 호되게 후려친 뒤 서둘러 어선방으로 급히 달려갔다.
* * *
식사 후, 진옥은 또다시 사방화에게 문무 시험장에 구경을 가겠냐 물었지만, 사방화가 다시 거절하자 진옥은 홀로 어서재로 향했다.
사방화는 이젠 습관처럼 탁자에 앉아 물방울로 진강의 이름을 끄적였다.
시화는 그런 사방화의 모습을 지켜보며 안쓰러운 눈빛을 했다.
세상은 누구나 진강만이 사방화를 미친 듯 사랑한다고 이야기했지만, 진짜 사방화의 곁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녀 역시 진강을 너무도 사랑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세상은 진강을 향한 사방화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무거운가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사방화는 오래도록 진강의 이름을 끄적이다 문득 시화를 쳐다보았다.
“낭군님은 막북에 들렀다가 지금쯤 다시 정효양과 합류했겠지?”
“강 소왕야께선 막북에 들러 연 군주님을 구하시곤 곧장 흔적도 없이 사라지셨다고 합니다. 아마 암암리에 다른 일을 하러 가셨을 겁니다. 연 군주님이 막북 군영에 머물게 되신 탓에 후야께서 골머리를 앓고 계신답니다.”
사방화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옥조천에게 잡힌 것도 진연 탓은 아니지. 태어나자마자 태후마마 손에서 평생을 살아왔으니……. 아무리 눈부신 황궁에서 부귀영화를 누려도 가족을 만나지도 못했던 삶이었어. 아무도 진연의 고통을 알 순 없겠지.
진연이 도성을 떠나버린 건 스스로를 속박하던 그물을 찢고 떠난 거나 마찬가지야. 지금쯤 막북은 파란 하늘에 시원한 바람까지 불 테니 아마 자유로운 새가 돼서 다신 돌아오려 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후야께서 고생하시잖습니까. 분명 지금쯤 더 야위셨을 거예요.”
시화도 웃으며 말을 보탰다.
“시화야, 혹시 너 우리 오라버니를 좋아하는 거니?”
시화는 깜짝 놀라 서둘러 대답했다.
“소인은 후야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런 쪽으로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사방화는 시화가 귀엽다는 듯 그녀의 볼을 콕 찔렀다.
“그냥 물어본 건데 뭘 그렇게 놀래? 좋아하는 사람이 없으면 내가 골라줄 수도 있어.”
시화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마마! 소인 평생 마마만을 모시겠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응. 네가 한평생 내 곁에 있어 줬으면 좋겠으니까 내가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골라주겠다는 거야. 낭군님의 암위 청암은 어때?”
사방화가 웃으며 물었지만, 시화는 멍하니 사방화만 바라보다 붉게 물든 얼굴을 도리도리 흔들었다.
“소인은 청암 공자님께 한없이 부족합니다. 마마, 장난치지 마세요.”
사방화는 소리 내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시화가 대체 어디가 부족하다는 거야?”
시화는 아예 발까지 동동, 굴렀다.
“마마! 계속 그러시면 정말 화낼 겁니다. 말도 안 할 거예요.”
“알겠어. 그만할게. 어쨌든 나랑 진강의 목숨이 아직 해결도 되지 않았으니 너희 일은 나중에 다시 얘기해도 늦지 않지.”
시화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방화는 다시 책상에 엎드려 지루한 듯 물었다.
“그 형양 정씨 가족들은 도성에서 다 뭘 하고 있대?”
“이여벽 아가씨 일 뒤로는 목청 공자님도 정효순 공자님 구혼을 거절하셨고 폐하께서도 자연스레 그 혼사는 없던 일이 된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정효양 공자님이 갇혀 계시니 형양 정씨 가족들도 우선 도성에 자리를 잡고 며칠째 대장공주부에 가서 사정하느라 바쁘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사정?”
“대장공주마마께 정효양 공자님을 꺼내달라고 폐하께 한번 청해달라고요. 둘째 공자님을 두고 돌아가지 않는 걸 보니 정말 중요시 여기나 봐요.”
사방화가 웃으며 말했다.
“여태 형양을 그리 오래도록 감춰왔으니 결코 멍청한 사람들은 아니지. 지금쯤 뭔가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잘못된 게 정확히 뭔지는 모를 거야. 일이 이 지경으로 되긴 했어도 어쨌거나 관건은 정효양에게 달려 있으니 말이야. 정효양을 지켜보자는 거겠지. 폐하께서도 며칠째 형양 정씨에 대해서 아무것도 안 묻지?”
사방화의 물음에 시화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무시하는 게 맞아. 폐하께서 그들을 안심시키고 편하게 머물도록 하면 오히려 더 빨리 떠나려 할 테니. 이럴 때일수록 저들을 도성에 머물게 해야 폐하께서도 도성의 밝고 어두운 곳을 속속들이 장악하실 수 있을 거야.
형양 정씨 정탐꾼들이 제거되기 전까지 그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거다. 낭군님과 정효양이 돌아오는 그 순간엔 형양 정씨가 아무리 반란을 일으키려 해도 그 깊던 뿌리가 한순간에 무너졌으니 아무런 힘도 못 쓸 테지.”
* * *
사방화가 낮잠을 자고 일어나 물을 마시던 그때, 대장공주가 찾아왔다.
사방화는 밖을 힐끗 보고 시화에게 물었다.
“지금 막 여기로 오시는 거야, 아니면 다른 데 들렀다 오시는 거야?”
시화가 조심스레 말했다.
“폐하를 먼저 뵙고 오셨습니다.”
“얼마나 계셨어?”
“반 시진쯤 됐습니다.”
사방화는 이내 대장공주를 맞이하러 갔다.
대장공주는 홀로 궁으로 들어왔다가 사방화를 보고 서둘러 달려왔다.
“방화야! 몸은 좀 괜찮니? 같은 가족끼리 무슨 이렇게 나와 예의를 차리는 것이냐. 네 몸이 더 중요하지!”
사방화가 웃으며 말했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계속 방에 누워있을 수만은 없으니 걷고 움직여야지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대장공주가 웃으며 사방화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날보다 안색이 많이 좋아졌구나. 폐하께서 널 귀찮게 하지 말라시기에 아무도 널 보러 올 수가 없었지. 오늘은 어쩔 수 없는 일로 왔는데 네게 폐를 끼치는 건 아니겠지?”
사방화가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선 항상 작은 일을 큰일로 만드시잖습니까. 폐하께서 사람들이 드나들어 시끌벅적한 걸 싫어하시는 것이면서 괜히 저로 핑계를 대시는 겁니다. 고모님께선 무슨 급한 일이 있으셔서 절 찾아오신 겁니까?”
“응.”
대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방화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곁에선 시화가 대장공주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방화야, 내 널 귀찮게 해선 안 되니 짧게 얘기할게.”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대장공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내가 정효양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잘 알겠지? 정효양이 기방에 갔던 그 날, 난 화가 나 어사대에서까지 사람들을 데려왔고 폐하께서도 그놈을 지하 감옥에다 가두셨지. 오늘로 열흘 넘게 갇혀 있는 중이다.
하지만 여벽이 일을 보고 나도 좀 생각이 바뀌더구나. 연이가 정효양을 선택해 앞으로 살아가야 할 길을 한평생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순 없는 노릇이겠지. 어쨌든 이여벽보단 나은 상황이니까.
연이가 연정에 미쳐 그런 짓을 했다면 차라리 내가 죽어버렸을 게다. 큰일이 있고 나니 나도 연이 뜻을 따라줘야겠단 생각이 들더구나. 하지만 정효양 그놈이 기방에 드나든 건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폐하께 며칠 더 가두시라고 해서 그놈을 단단히 고쳐놓아야지.”
사방화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며칠 전 형양 정씨 식구들이 날 찾아왔다. 정효양이 몸도 약한데 며칠째 갇혀 있으니 걱정이 됐나 보더구나. 감히 폐하께는 청할 수가 없어 대장공주부로 와 날 찾더란다. 며칠 내내 그들에게 시달리니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열흘 넘게 그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해 오늘 폐하께 그 아이를 풀어달라 청하러 온 거였단다.”
“폐하께서 안 풀어주셨습니까?”
대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입이 마르도록 청했는데도 풀어주질 않으시더구나. 이틀 전 지하 감옥에서 미녀를 내놓으라 난리를 쳐댄 걸 보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게지. 지금 풀어준다고 해도 그놈이 고쳐지겠니? 내가 어사대에 가서 그를 끌어내 다시 가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참.”
진상을 알고 있는 사방화는 괜한 헛기침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