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3화. 위아래가 한마음이라 (2)
조정 일을 알리는 문서는 순식간에 도성 거리와 골목에서 시작해 얼마 지나지 않아 각 주현까지 다 퍼져나갔다.
또 병부의 쾌마는 800리 급보로 막북, 북제에도 소식을 전했다.
일찍이 북제에서 아무런 말도 없이 음흉한 계략을 이용해 군사를 움직였던 것에 비해 남진이 전서를 내린 것은 공명정대했으며 그 이유도 충분했다.
조서에 나열된 북제의 악행은 남진 백성들의 공분도 일으켰으며 다들 격분해 용감히 군에 참여하겠다고까지 나섰고 남진 백성으로서 새 황제와 같은 뜻으로 북제에게 정당한 대가를 치를 것을 요구했다.
특히 백성들은 오래도록 나라에 충성을 다한 사씨 충용후부의 딸 사봉의 문제에 더 열을 올렸다.
그때 북제와의 혼인도 백성들은 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기며 안타까워했다. 충용후는 북제와의 전쟁에서 위대한 승리를 이끌었어도 결국 딸을 먼 곳으로 시집 보내야만 하는 운명에 처했다.
사봉은 충용후의 단 하나뿐인 딸로, 여태 북제 황제와 깊은 정을 나누며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는 있지만 정말 그 풍문이 사실인지는 알 수도 없는 일이었다.
머나먼 북제에서 사봉이 홀로 남몰래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지 남진의 사람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일순간 남진 백성 전체에도 북제에게서 사봉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언쟁이 들끓었다.
남진의 크고 작은 군현에서도 나라를 향한 충심으로 똘똘 뭉쳐 북제와 싸울 준비를 갖췄다. 또 백성들은 현재 조정에서 전쟁에 대비한 군량미를 마련하곤 있으나 작년에 여러 차례 겪었던 재해로 인해 군량미를 비축하지 못했으며 당장 병사들에게 지급하기도 바쁘단 소식을 전해 들었다.
연석이 군량미 마련을 위해 밤낮없이 몸을 혹사해가며 일을 하곤 있지만 진옥은 결코 백성들에게 세금을 더 걷으란 황명은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백성들은 몇 년간 이 남진의 세금이 북제보다도 적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는 남진이 건국된 이래로 사씨 가문이 내내 힘을 모아 백성들의 복지를 위해 힘쓰고 있는 반증이기도 했다.
300년 동안 세금을 올리려는 황제가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충용후부가 굳건하게 버티며 나라의 곳간을 충당했기에 세금은 단 한 번도 변동이 없었다. 그에 반해 북제는 암암리에 흥병을 일으키려 세금을 올렸고 그건 모두 국력 증대에 사용됐다. 남진의 백성은 철저하게 사씨의 보호를 받아온 것이었다.
백성들도 최근 북제가 암암리에 계략을 짜 남진 강산을 점령하려 하고 변경에선 이미 여러 차례 작은 싸움이 있었다는 걸 알음알음 듣게 되었다.
사묵함은 허약한 몸을 안고도 막북의 거친 모래바람을 맞으며 북제와 대항하고 있었고 백성들도 북제가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백성들의 마음에도 차츰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힘없이 북제에게 짓밟혀 나라를 잃을 순 없었다. 남진 강산과 스스로의 가족들을 위해, 백성들은 비축해둔 식량을 속속들이 꺼내 자발적으로 기부하기 시작했다.
기부할 만한 식량이 없는 이들은 집에 있던 병기와 철기, 말에게 먹일 초식을 기부했고, 남진 위아래가 북제를 공격하기 위해 한마음으로 뭉쳤다.
이는 남진 역사상 모두가 가장 격앙되고 한마음으로 통일된 순간이었다.
* * *
이러한 소식이 도성으로 전해지자 만조의 문무 대신들도 남진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북제를 공격하려 뜻을 모으는 것에 깜짝 놀랐다.
남진과 북제는 아직 정식적인 전쟁을 치르기 전이었지만, 남진에선 백성들 모두가 마른 장작에 불이 붙듯 일제히 이 전쟁에 대한 지지를 표출했다. 꼭 이 전투를 손꼽아 기다려왔던 사람들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진옥도 백성들이 북제를 공격하는 데에 이렇게까지 많은 지지를 보여주리라곤 생각지도 못해서 놀랍고 의아해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니 백성들이 이렇게 나오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씨, 충용후부, 사봉. 20년 전, 충용후는 명백히 북제를 물리쳤음에도 자신의 딸을 북제로 시집보냈다. 황실에선 이에 대해 아무 짐도 짊어지지 않았지만, 사씨를 비롯한 남진의 백성들은 충용후부에서 딸을 북제로 시집보낸 것을 치욕으로 치부하며 지금껏 마음의 짐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몇 년간 선황제가 사씨의 충심을 잊고 사씨와 충용후부 제거에 공을 들일 때도 백성들은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
아무리 사봉이 한 나라의 황후라는 높은 자리에 올랐어도, 북제 황제의 끝없는 사랑을 받는다 할지라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이상 무엇도 기뻐할 수 없었다. 백성들은 초지일관 충용후부의 딸을 북제로 보내선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고향을 타의에 의해 떠난 이가 어찌 고독하고 고되지 않을 수 있을까. 사봉이 그 높은 황후에 오른 것도 오로지 사봉의 고충과 노력 때문이었다.
본래 남진에서의 사씨 영향력은 막강했고, 충용후부는 황실에 비견할 만큼 거대한 가문이었다. 자연히 그 충용후부의 유일한 적녀 사봉은 황실 공주보다도 귀한 신분이었는데 사봉은 그 영화도 마다하고 북제로 떠난 것이었다.
존귀한 충용후부의 딸 사봉은 북제 황궁에서 외로이 살아야 할 사람이 아니었다. 북제에서도 남진의 사씨만큼이나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는 옥 귀비의 옥가(家)와 머리 터지는 싸움을 해댈 게 아니라, 그냥 남진의 존귀한 귀족과 혼인해 오래도록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어야 했다.
충용후부라는 빛나는 배경에, 이 편하고 영화로운 삶을 두고 사봉이 왜 그 먼 길을 떠나야만 했나. 본래 그 북제 황후의 자리는 남진 황실의 대장공주의 것이었기에, 오직 대장공주만이 이 일의 수혜를 다 누린 것이었다.
하지만 남진 황실에서 사봉의 덕을 봤다고 여기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선황제 또한 그러했지만 백성들은 이 평화가 모두 사봉과 충용후부, 사씨의 덕택임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더불어 몇 년간 이어진 황실의 핍박으로 충용후부와 사씨는 계속해서 뒤로만 물러났다. 그러나 줄곧 백성들의 평안을 지켜주던 사씨가 더 이상 물러날 자리도 없어 끝장날 거라 여겼던 순간, 뜻밖에도 충용후부에서 사방화라는 인물이 등장한 것이었다.
혜성처럼 등장한 사방화는 적통 황손인 진강과 혼인하고, 새 황제 진옥의 사랑까지 받으며 사씨와 충용후부를 다시 또 구해냈다. 그렇지만 선황제가 죽고 진옥이 즉위한 이래 남진은 여태 내우외환에 휩싸여 백성들조차 손에 땀을 쥐고 살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에 밝혀진 이야기가 다 북제가 배후에서 음모를 꾸민 것이었다는 진실이었으니 어찌 가만둘 수 있겠는가? 20년 전 옥조천은 거짓 죽음으로 남진에게 화를 뒤집어씌워 사봉으로 그 대가를 치르게 했으니 이 묵은 빚을 반드시 청산해야만 했다.
옥조천이 암암리에 이여벽을 사주해 사방화를 해치고 진연을 납치해 남진을 얕잡아 본 것은 또 다른 원한으로 함께 청산해야 할 문제였다.
또 사봉을 데려온다는 것은 단순히 북제의 황후를 데려오는 것이 아닌 남진 백성들이 그토록 존경하던 충용후부의 딸을 데려오는 것이었다. 피가 강이 되어 흐른다 한들 남진 백성은 절대 뒤로는 물러나지 않을 태세였다.
* * *
진옥은 그렇게 어서재에서 반나절의 시간을 보냈다.
곧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서 긴 한숨을 내쉬는 진옥을 보고, 소천자가 조심스레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폐하, 남진 백성들도 일심으로 뜻을 모으는데 어찌 한숨을 쉬십니까?”
진옥은 가만히 소천자를 돌아보았다.
“오늘에야 황조들께서 왜 북제가 아닌 사씨를 호시탐탐 노려오셨는지 깨달았다. 사씨가 이끄는 민심의 힘이 실로 무섭구나.”
소천자는 깜짝 놀라 몰래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문득 진옥도 사씨를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닌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왜, 짐이 사씨를 어떻게 하려는 건지 생각하고 있는 것이냐?”
소천자는 진옥이 단번에 자신의 생각을 읽었다는 것에 깜짝 놀라 안색이 창백해져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폐하! 죽여주시옵소서!”
진옥은 피식, 웃기만 했다.
“네가 그리 생각하는 것도 이상할 거 없지. 탓하는 게 아니니 일어나라.”
소천자는 남몰래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덜덜 떨리는 몸을 일으켰다. 비로소 오권의 가르침이 절실히 와닿는 순간이었다.
본래 제왕을 모신다는 건 호랑이를 모시는 것과 같아 황제의 심사를 알아맞히기도 하되 그 심사를 알아맞히려 해선 안 될 때가 있으니 이를 제대로 잘 알아야만 목숨을 지킬 수 있는 것이었다.
“적어도 짐이 살아있는 동안은 아바마마와 역대 황조들처럼 사씨를 적대적으로 대하진 않을 것이다.”
소천자는 몰래 힐끔 진옥의 늠름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남진 황실과 사씨는 건국 이래 천하를 함께 하고 있으니 어느 한쪽이 무너지면 남진 강산은 살아남을 수 없는 법이다. 북제는 몇 년간 이러한 남진의 정세를 꿰뚫어 보았기에 번번이 문제를 일으켜 왔던 것이지만, 당시 남진 황실에선 알아채지 못한 것이지.
지금 이 황위에 앉은 이가 짐이니 다행이다. 짐이 있는 이상 결코 북제의 뜻을 이뤄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씨의 민심이든, 황실의 민심이든 이는 곧 남진의 민심이니라. 민심이 대세를 향하고 있으니 북제도 각오해야지.”
소천자는 감히 끽소리도 내지 못하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현명하십니다, 폐하.”
진옥은 이내 소천자의 머리를 통, 건드렸다.
“오 태감을 따라 제대로 배워야 짐의 아래서 이 머리통을 잘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소천자는 흠칫하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
“소인 이 우둔한 머리로 반드시 오 태감님께 잘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곧 정오가 다가오는구나.”
소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편전으로 가자.”
진옥이 걸음을 옮기고, 소천자는 그의 뒤를 따르며 슬며시 땀을 훔쳤다.
* * *
황제의 침궁.
사방화는 나무 그늘 아래 홀로 바둑을 두고 있었다. 얼룩덜룩한 나무의 그림자가 그녀를 간지럽히고 있었지만, 사방화는 매우 평온한 안색이었다. 그간 몸조리를 잘해서 본래의 그 차분하고 아름다운 미모가 눈이 부셨다.
진옥은 잠시 입구에 서서 사방화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바둑에 한참 몰입한 듯 그가 온 지도 눈치채지 못했다.
곧 진옥이 맞은편에 앉자, 사방화가 흑돌과 백돌을 쥐고 눈살을 찌푸리다 고개를 들었다.
“어? 오늘 문무 고과 치르는 날 아닙니까? 어찌 여기로 오신 겁니까?”
“좌상과 목청이 있는데 가볼 필요도 없지. 근데 또 말 안 듣고 어찌 이리 용을 써가며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이오?”
그러자 사방화가 흑돌과 백돌을 그의 손에 쥐여 준 뒤 의자에 기댔다.
“안 그래도 머리가 아파오던 참이었는데 폐하께서 해보십시오.”
진옥은 바둑돌을 넘겨받고는 잠시 후 웃음을 터뜨렸다.
“둘 중 어느 돌이 이겼으면 좋겠소?”
“제가 두는 게 아니니 어느 쪽이 이기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다 사방화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곤 시화를 향해 인상을 찡그렸다.
“어째서 물도 이렇게 쓴 거야?”
시화가 조심스레 말했다.
“마마, 들국화로 우려낸 차입니다. 마음속 화를 가라앉히는 데에 좋다고 합니다. 여태 맹물만 드시느라 맛이 없다고 하셨잖습니까. 단 건 싫어하시고 시고 매운 건 약효를 떨어뜨리니 드릴 수 있는 게 이것뿐이었어요. 싫으시면 다른 걸로 바꿔 드리겠습니다.”
사방화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됐어. 물이 문제가 아니라 이곳 생활이 너무 재미없어서 그런 거겠지.”
시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인 사방화가 황궁에 갇히게 된 지도 벌써 열흘이 지났다. 진옥은 여태 책도 못 읽게 하고 병문안도 금지해서 답답해 미칠 노릇인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럼 문무 시험장에라도 가보겠소?”
진옥이 넌지시 물었다.
“됐습니다.”
“가고 싶다고 하면 데려 가주지.”
“안 갈 겁니다.”
“정말? 답답해 죽겠다며. 밖에 나가 좀 구경이라도 하고 싶지 않나?”
진옥은 바둑돌을 쥐고 한참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냥 폐하만 보면 답답해집니다. 폐하만 안 보이면 황궁 밖에 나가지 않아도 상관 없습니다.”
진옥이 실소하며 백돌을 바둑판에 올렸다.
“이 황제가 매일같이 신경 써서 살피는 게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거라 생각하나? 하여간 영광인 줄도 모르고.”
사방화는 뚱한 얼굴로 바둑판을 내려다보며 비꼬듯 말했다.
“네네, 소인 위대하신 황제폐하의 총애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시오.”
사방화도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