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8화 (848/978)

848화. 군령장(军令状)을 쓰다

“끌어내라!”

진옥은 더 이상 연석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황궁 호위들이 그를 끌고 입구까지 갔을 때에야 연석이 꼬리를 내렸다.

“하겠습니다!”

“진심이냐?”

“예!”

연석은 18대 위를 거슬러 가도 진옥처럼 행동하는 황제는 없을 거라며 속으로 무지막지한 욕을 내뱉었다. 

“군령장을 써라! 네가 못하면 태중 동생에게 의사가 넘어갈 테니, 어떤가?”

진옥의 말에, 연석은 실로 화가 나 숨이 꼴딱 넘어갈 지경이었다.

“그리하십시오!”

아무리 진강이 없다고는 하나, 진옥에게 이리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하는가! 하지만 연석은 아무리 화가 나도 이 망나니 같은 황제를 감당할 힘이 없었다.

입술이 터져라 꽉 깨무는 연석을 보고 진옥도 결국 웃음이 터졌다.

“어서 놓아드려라.”

호위들이 연석을 놓아주자, 연석은 발을 쿵쿵 구르며 어서재로 들어와 진옥의 옥안을 쾅쾅 내리쳤다.

“혼자선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구해주십시오! 사람!”

“줄 사람 없으니 알아서 찾아라.”

옥안이 천둥처럼 울려도 진옥의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아무나 잡아 와도 괜찮단 말입니까?” 

연석은 있는 힘껏 진옥을 노려보았다.

“그래, 연석 네 손에 잡히는 이는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권리를 주마. 좌상과 네 아버님을 끌어들인대도 반대하지 않겠다.”

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폐하께서 하신 말씀이니 반드시 책임지십시오. 그럼 친필 지시 하나만 내려주십시오.”

“싫어.”

“하…….”

연석은 사력을 다해 마음속 불길을 잠재우려 노력했다.

“연석아, 내 친필 지시는 황명이다, 황명. 그걸 보면 누가 감히 반항을 하겠느냐? 한 달 내로 흥병 하겠단 계획은 너희들 세 사람 말고 그 누구도 알아선 안 된다. 대대적으로 준비할 수는 있지만 그 목적은 기필코 아무에게도 들켜선 안 돼. 대신 누굴 잡아 쓰든 절대 아무 상관도 하지 않으마.”

연석은 콧김을 내뿜으며 진옥을 바라보았다.

“한 달 내로 성사시키면 무엇으로 보상해주실 겁니까?”

“혼사 하나 윤허해주면 될까? 계수 곁에 있는 품죽과 혼인하고 싶다며. 네가 일만 성사시켜오면 내 어떻게든 그 혼사를 이뤄주지.”

연석이 바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제가 지금 잘못 들은 거 아니겠지요? 지금 절 도와 무고한 여인을 빼앗아와 주시겠단 겁니까? 그런 무지막지한 방법이라면 됐습니다.”

“품죽이 널 받아들일 수 있게 방법을 생각해보겠단 것이다.”

“정말입니까?”

연석도 살짝 입술을 삐죽이며 물었다.

“군자는 두말하지 않지.”

“좋습니다! 곧장 군령장을 쓰겠습니다!”

진옥의 지시에 소천자가 서둘러 군량장을 가져와 연석에게 내밀었다.

연석이 서명하자 진옥은 고이 접어 소천자에게 잘 보관하도록 했고, 이내 파리를 쫓듯 연석에게 손을 흔들었다.

“더는 볼일 없으니 가서 준비나 해라. 군령장은 지금부터 효력이 생겼어.”

연석은 화가 나 눈이 다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꿋꿋이 또 눌러 참았다.

“소왕비마마를 만나고 싶습니다.”

진옥은 살짝 눈썹을 까딱이다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봐.”

진옥은 툴툴대며 가는 연석을 보고 픽, 웃다 이목청과 최의지를 바라봤다.

“목청, 의지. 너희들도 똑똑히 봤겠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과유불급이란 말이 있듯 급히 준비하는 데엔 반드시 허점이 있을 겁니다.”

이목청이 말했다.

“그래서 너희들에게 뒤에서 허점을 보완해달라고 부른 것이다. 목청 네게 문무 고과 감독은 아주 사소한 일이니 짬을 내 그 부분을 메꾸어주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이목청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 폐하께선 사람을 적재적소에 아주 잘 이용하시니, 소신 이 한 몸 남진 조당에 다 바치겠습니다.”

“잘 알면 됐다.”

그리고 진옥은 최의지를 바라보았다.

최의지는 이목청, 연석처럼 진옥과 어릴 때부터 함께 정답게 자라 온 지기가 아닌지라 감히 황제에게 함부로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소신 최선을 다해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만 잘 해결되면 병부상서는 네 것이다.”

“황송합니다, 폐하!”

곧 진옥의 손짓에, 이목청과 최의지도 어서재를 빠져나왔다. 

* * *

이목청은 어서재에서 나와 진옥의 침궁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대인, 사촌 형수님을 만나러 가시려는 겁니까?”

최의지가 물었다.

“볼 면목이 없어. 안 갈 것이다.”

최의지는 이목청의 어두운 안색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형수님께서도 대인을 탓하시진 않을 겁니다. 마음이 놓이지 않으시면 그래도 한번 가보시지요. 연석 소후야께서도 가셨지 않습니까. 물론 폐하께 따로 말씀을 올리진 않았지만, 폐하께서도 뭐라고 하시진 않을 겁니다.”

이목청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됐어, 가고 싶으면 의지 너는 한번 가보거라.”

최의지는 짧게 한숨을 내쉰 후 사방화가 있는 편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 * *

사방화는 금방 약을 먹고 시화와 시묵이 마련해준 의자에 앉아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때 마침 연석이 문턱을 넘으며 크게 소리쳤다.

“몸도 좋지 않으면서 어찌 밖에 나와 찬 바람을 쐬며 책을 읽고 있는 겁니까? 몸조리에 참으로 소홀하시군요!”

연석은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곱지 않은 안색에 눈가에 아직 어렴풋한 노기가 남아있었다. 사방화는 그런 그를 보며 눈썹을 들썩였다.

“한여름에 웬 찬바람입니까? 연석 소후야, 누가 또 소후야 심기를 건드리셨기에 이리도 노발대발하시는 겁니까?”

가까이 다가온 연석이 사방화를 이리저리 살핀 후에 답했다.

“누구겠습니까? 어서재에 있는 그 존귀한 망나니 때문이지.”

“진옥?”

“어허! 소왕비마마도 조심하세요, 황제폐하의 존함을 함부로 불렀다간 사지가 찢겨 나갈지도 모릅니다.”

화가 나 툴툴거리는 연석을 보니 사방화도 웃음이 터졌다.

“왜 그러십니까? 괴롭힘 당하신 거예요?”

곧 시화가 의자를 가져다주자 연석은 그곳에 앉아 콧방귀를 뀌었다.

“괴롭히기만 했겠습니까! 사람을 어찌나 부려 먹는지!”

연석은 이내 진옥이 자신을 어떻게 괴롭혔는지 아주 상세히 이야기했고, 사방화는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

“급해서 그런 거니 이해하세요.”

“아무리 급해도 사람을 그렇게 부려 먹으면 안 되잖아요! 아……, 그런 사람인 줄 진즉에 알아봤어야 했는데!”

“평생을 함께 자라 온 지기 아니십니까? 근데 이제껏 모르셨다고요?”

순간 말문이 막힌 연석을 보고 사방화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아무나 써도 된다고 하셨다면서요. 혼자선 불가능해도 10배, 더 나아가 100배나 많은 이들이 모이면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연석은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렇게 황급히 준비한다고 해서 출병시킬 수 있을까요?”

“뒤를 봐주시는 분이 있을 겁니다.”

“무슨 뜻입니까? 누가 내 뒤를 봐준다는 거지요?”

“오늘 조회를 마치고 어서재에 목청 공자님, 의지 도련님을 남겨두셨잖아요? 의지 도련님은 도성에 머문 시간이 짧으니 목청 공자님이겠네요. 소후야는 사람만 구하시면 돼요. 나머지는 목청 공자님이 다 알아서 하실 테니.”

그 말에 연석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폐하께서 열흘 후에 있을 고과 무예 감독을 맡겼어요. 시간이 있을까요?”

“연석 소후야, 목청 공자님입니다. 목청 공자님은 문무 두 가지 다 담당하셔도 충분하신 분이에요. 소후야를 돕는 것이야 일도 아닌 분이시지요. 내 추측이 맞는 거라면 폐하께서 열흘 후 시험을 여시는 건 인재를 선발하시려는 뜻도 있겠지만 제일 큰 목적은 다른 사람들 시선을 분산시켜 암암리에 일을 행하도록 만드시려는 것 같아요.”

사방화의 말을 듣고, 연석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화가 나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았는데 마마 말씀이 맞는 것 같군요.”

“또 내 생각엔 폐하께선 친히 어가를 타고 출정하실 것 같아요.”

연석은 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즉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으신 데다 나라도 안정되지 않았는데 직접 출정을 하신다고요? 그럴 리는 없을 텐데?”

“뭐가 그럴 리 없겠습니까? 폐하와 제언경이 제대로 맞서는 문제니 직접 어가를 타고 출정해 북제를 제대로 짓밟아야지요. 그리곤 제언경이 황태자 자리에 올라 흥병한 것이 실패사로 역사에 길이길이 남도록 해 미래의 북제 황제들도 남진에게 함부로 덤빌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럼 북제를 점령해 그 나라까지 통일을 이루려 한단 뜻입니까?”

사방화가 웃음을 지었다.

“북제가 몇 대를 걸쳐 준비해오는 동안 남진은 내란이 끊이질 않았으니 아무리 뛰어난 황제폐하라 하셔도 통일까지는 어렵지요. 하지만 전략을 잘 이용하면 완전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연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난 전쟁에 나가고 싶지, 뒤에서 이런 뒤치다꺼리를 하고 싶진 않아요.”

“군량미를 준비하는 것부터 하나하나 시작하지 않고서 어찌 대장군 자리에 올라 모든 일을 통달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소후야께 이 중대한 일을 맡기신 건 모두 미래를 보고 하신 겁니다. 그래도 계속 화내실 건가요?”

연석은 눈빛을 반짝이다 금세 헛기침을 했다.

그에 사방화가 웃음을 터뜨리자, 연석은 이제 노기가 싹 가신 듯 말했다.

“폐하께서 이리도 빙빙 돌려 말씀하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과연 제왕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군요. 근데 무슨 책을 보고 있는 겁니까?”

사방화는 책을 펴 연석에게 보여줬고 그는 다시 눈이 동그래졌다.

“병법? 지금 병법을 읽고 계신 겁니까?”

“왜요? 난 읽으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나요?”

연석은 이내 깊은 탄식을 했다.

“여인이 이리 총명하고 재주가 넘쳐 사내가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있으니 사내는 다 쓸모가 없어지잖아요. 정말 왕비마마께선 강 소왕야와 혼인 잘하셨습니다. 강 소왕야가 아니면 세상에 어울리는 짝도 없을 겁니다.”

* * *

곧 편전에 최의지도 도착했다.

연석은 진옥 앞에 길길이 날뛰던 때가 언제였냐는 듯 사방화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최의지는 그를 보며 사방화가 대체 무슨 묘약을 줘서 연석의 불길을 이리 짧은 시간 내로 잠재웠는지 몹시 놀라워했다.

이내 연석도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가, 의아한 최의지의 표정을 보고 먼저 말을 건넸다.

“어, 의지! 혼자 왔나? 목청은?”

최의지는 먼저 사방화에게 정중히 예를 갖추곤 말했다.

“폐하께서 열흘밖에 주지 않으셨으니 서둘러 고과를 준비하러 가셨지요.”

연석이 콧방귀를 뀌었다.

“나도 안 급한데 자기가 뭐 급하다고? 마마를 뵐 면목이 없어 안 왔겠지.”

최의지는 괜히 헛기침만 했고, 연석은 다시 사방화에게 말을 건넸다.

“어제 목청이 영친왕부에서 돌아가 무슨 일을 했는진 들었습니까?”

사방화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어머님도 모르게 동생 둘을 꽁꽁 숨겨뒀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연석의 말을 듣고, 사방화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평양성 연지루는 신분이 절대 외부로 새 나가지 않게 엄격히 관리하니 외부인은 누구도 뭘 알아낼 수가 없지요. 우상 부인의 수법은 안채에 한정돼있는 데다, 아들이 사람을 숨겨 놓았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을 테니 여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던 겁니다.”

“목청이 그놈 머릿속도 참 복잡하긴 하나 그래도 얼굴이 꽤 두꺼운 줄 알았는데, 이리 몸 둘 바 모르고 미안해하면서 약한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습니다.”

연석이 안타까운 듯 말했고 사방화도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목청 공자님을 만나게 되시면, 난 결코 누구도 탓하지 않으니 미안해하실 필요 없다고 전해 주세요.”

“하여간 마음이 이렇게 착해서야.”

“착하긴요, 그럼 지난날 내가 석 소후야 때문에 영강후 부인의 미움을 받았던 것도 탓하고 있었다면 태중에 있던 소후야의 동생을 구했을까요?”

연석은 순간 말문이 막혀 멍해졌다. 사방화는 그런 그를 보며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이제 난 괜찮으니 어서 가보세요.”

연석도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목청을 만나면 말씀 전해드리지요.”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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