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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7화 (847/978)

847화. 진강의 서신 (2) 

약속이나 한 듯 바깥에서 월낙의 외침이 들렸다.

“누구냐!”

“나다.”

사방화의 생각에 응답하듯, 진강의 은위 청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월낙은 바로 검을 거뒀고 청암은 날렵하게 드높은 황궁 성벽을 뛰어넘어 소리도 없이 황제의 편전 밖에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냐?”

진옥이 바로 청암을 보며 묻자, 그가 즉각 정중히 공수를 올리며 말했다.

“예, 폐하. 저희 주인님께서 소왕비마마가 다치셨단 소식을 들으시곤 제게 돌아가 얼른 마마를 살펴보라 하셨습니다. 마마께서 황궁에 계시다기에 바로 달려온 것인데 무례하게 황궁을 쳐들어온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폐하.”

진옥은 픽, 미소만 보였다.

“네가 이리 드나드는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진강은 지금 어디까지 갔느냐?”

“지금쯤 아마 5백 리 밖에 계실 겁니다.”

“정말 빠르구나.”

진옥이 다시 엷게 웃는데, 청암이 재차 공손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소왕비마마!”

사방화는 우선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확실히 낮보단 안색이 괜찮아져서 곧장 문턱을 넘어가 청암 앞에 섰다.

“난 괜찮으니 낭군님께 내 걱정은 말고 일하시라고 전해줘.”

청암은 사방화를 더 자세히 이리저리 살펴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주인님께서도 소왕비마마를 황궁에서 지내실 수 있게 하라 하셨는데 폐하께서 마침 모셔오셨군요. 주인님 생각하신 대로 잘 됐습니다.”

사방화는 순간 깜짝 놀랐고, 진옥은 코웃음을 쳤다. 

“하여간 날 귀찮게 하는 것에 도가 텄어.”

사방화는 바로 눈을 흘겼다. 순식간에 이곳저곳 실려 다니는 귀찮은 짐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지금 상황에선 자신은 확실히 귀찮은 존재이긴 했다.

사방화는 다시 미간을 문지르며 청암에게 말했다.

“그래, 내 걱정은 말고 꼭 몸조심하라고 전해드려. 난 황궁에서 열심히 몸조리하고 있겠다고도 전해드리고.”

“예, 그리고 소왕비마마께 어찌하면 곧장 언신 공자님께 연락이 닿을 수 있는지 여쭤보라고도 하셨습니다.”

진강도 옥조연이 암암리에 이여벽을 이용했다는 소식을 접해서 그의 아들 옥언신을 찾고 있는 듯했다. 사방화는 한숨을 쉬며 시화에게 말했다.

“시화, 나와 언신이 연락을 주고받을 때 쓰던 매를 청암에게 줘.”

“알겠습니다.”

잠시 후, 시화가 매 한 마리를 데려와 청암에게 넘겨주었다.

“이 매는 언신과 내가 특별히 길들인 거라 무조건 종적을 찾을 수 있어. 그리고 서방님께 언신은 절대 날 해칠 사람이 아니라고 전해줘.”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사방화가 손짓하자 청암은 매를 들고 순식간에 바람처럼 황궁을 떠났다.

청암의 방문으로 사방화는 더할 수 없는 뭉클한 온기에 젖어 들었다.

진강은 사방화가 다쳤단 소식에 당장이라도 달려오고픈 마음을 꾹 참고 끝내 청암만을 보냈다. 사방화가 어찌 진강의 마음을 모르겠는가. 그도 분명 북제 옥가와 옥조연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있을 터였다.

곧 뒤에서 진옥의 불만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서서 뭐 하는 건가? 찬 바람이라도 쐬는 거요? 어서 식사나 하게. 소천자! 탕이 다 식었으니 다시 새로 내오너라.”

사방화는 어이가 없었다. 고 잠깐 새 어찌 탕이 다 식는다는 것인가? 또 이렇게 더운 날이면 국을 좀 식혀서 먹어야 하지 않던가? 하지만 소천자는 사방화가 손도 대지 않은 탕을 곧바로 바꿔왔다.

* * *

식사 후, 진옥이 차를 마시며 사방화에게 말했다.

“오늘 목청이 이여벽을 1,000리 밖 비구니 암자로 보냈다더군.”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이야말로 이여벽에게 가장 알맞은 형벌이라 생각했다. 친동생을 내치기까지 이목청의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목청이 암암리에 바깥에서 여동생, 남동생을 살폈던 거 알고 있소?”

“네, 평양성 연지루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여벽을 내보내고 그 동생들을 들일 거라 했소. 앞으로 우상부의 아가씨는 이녹의, 둘째 공자는 이목자가 될 거요.”

사방화도 평양성에서 두 동생을 만난 적이 있었다. 이녹의는 아주 뛰어난 미모를 가졌다곤 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아름다웠고, 연지루에서 기예를 선보여도 몸은 절대 팔지 않았다. 한때 언신을 좋아했었는데 지금쯤 포기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사방화를 보고 몹시 수줍어하던 동그란 눈망울도 기억이 났다. 이녹의 뒤에 숨어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이던 이목자는 이목청과 눈매가 꽤 닮았었다.

사방화도 이 기회로 이목청이 그 동생들을 우상부로 데려올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우상 부인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이여벽도 떠나기 전 이를 알았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후회했을까?

“목청 공자님 상황도 참 쉽지가 않네요.”

사방화의 말에, 진옥은 바로 코웃음을 쳤다.

“그대 처지는 어디 뭐 쉬운 줄 아나? 몸조리 잘하시오. 한 달 내로 북제에 출병시킬 생각이니 그전까지 황소처럼 굳건히 회복해 날 좀 도와주시오.”

사방화가 깜짝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네? 한 달 내로 출병하시겠다고요? 충분하겠습니까?”

“형양 정씨와 북제 정탐꾼이 반수를 둘 수 없게 제거만 하면 북제에 출병시킬 수 있어. 충분을 논하자면 10년도 부족할 것이오. 어서 북제를 처참히 짓밟아 남진은 북제가 함부로 날뛸 곳이 아님을 똑똑히 보여줘야지.”

“맞습니다. 남진은 충분히 북제를 맞설 수 있습니다.”

오늘은 진옥의 즉위 이래 처음으로 일찍이 쉴 수 있게 된 날이었다. 

소천자는 하늘을 향해 연신 아미타불, 감사기도를 올리고 쉬러 갔다. 

사방화는 진옥이 떠나고도 창가에 잠시 앉아 있다 침상에 누웠다. 한 달 내로 북제에 출병하려면 진옥이 준비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였을 터였다. 사방화도 얼른 회복해야 진옥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었다. 

* * *

이튿날 아침, 진옥은 일찍이 조회에 올랐다. 

대신들은 양옆으로 길게 서서 드넓은 자리를 메웠다. 

진옥은 가장 먼저 북제 국구 옥조연이 암암리에 이여벽을 사주해 사방화를 해친 일을 언급했다. 한 나라 국구란 자가 이토록 추악한 짓을 벌였으니 북제에서 이를 해결하지 않으면 남진은 절대 물러나지 않으리란 서신을 보내겠다 선포했다.

결단력이 느껴지는 진옥의 음성에 대신들도 일제히 뜻을 같이했다.

이는 남진이 공개적으로 북제에 선전포고를 하겠다는 뜻이었지만, 전쟁에 나가 맞서 싸우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남진 역사상 주동적으로 대외에 선전포고를 한 제왕이 있었나? 진옥의 강인한 의지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노신들마저도 마음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선황제가 승하하고, 신 황제가 즉위하기 전 북제가 흥병을 일으켜 남진이 막대한 손실을 겪었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1년 내내 남진은 내우외환으로 국세가 휘청거렸지만, 저 찬란한 황좌에 앉은 젊은 제왕은 흔들림 없이 의연한 눈빛을 빛냈다. 노신들도 진옥의 의지를 보고 남진의 역사도 엄청난 변화를 겪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누구나 나라의 국력이 강성해지길 꿈꾼다. 더는 어떤 나라의 견제도 받지 않길 꿈처럼 원한다. 300년 전, 서슬 퍼런 대립각을 세웠던 그때로 돌아가게 된다 한들 북제에게 이대로 이 강산을 빼앗길 수는 없었다.

곧 대신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황제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모든 민심이 향하는 곳, 남진이 나아가고자 하는 대세, 모두가 일심으로 하나 된 순간이었다. 북제가 기세를 꺾지 않으면, 다년간 억눌러왔던 남진도 끝날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문무백관들도 다들 찬성하자, 진옥은 만족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대신들이 일어나고, 진옥은 연석, 최의지에게 군량미 마련에 관한 상황을 물어보았다. 두 사람은 막힘없이 진옥의 질문에 상세히 대답했지만 진옥은 영 성에 차지 않는 얼굴이었다.

“짐이 자네들에게 석 달이란 시간을 주었는데 준비는 다 됐는가?”

연석과 최의지는 서로를 힐끗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진옥은 다시 좌상과 영강후에게 말했다.

“소위 옛것을 밀어내고 새것을 받아들이란 말이 있듯 조정에 사람을 써야 할 시기인데다 비상시기인 만큼 올해 추시(秋试) 과거를 앞당기려 하네.”

좌상이 서둘러 물었다.

“폐하, 얼마나 말씀하시는 겁니까?”

“열흘 뒤. 가능하겠나?”

“저……, 문무 학자들은 3년에 한 번 가을에 열리는 입시가 정해져 있습니다. 시험까진 앞으로 한 달 반이란 시간이 남아 아직 각지에서 도성으로 올 준비도 하지 않았을 테고 멀리 있는 자들은 이제 막 출발했을 겁니다.

도성 1,000리 밖에 있는 학자들은 열흘 내로 쾌마를 타고 온다면 간신히 도착할 수 있을 듯하나 더 멀리 있는 자들은 불가능할 겁니다. 게다가 남진은 동서남북으로 수천 리나 이어져 있으니……, 많은 이들이 기회를 놓치게 될 겁니다. 열흘은 너무 짧습니다, 폐하.”

“딱 열흘이네. 올 수 있는 자들은 그만한 재주가 있다는 것이니 짐이 반드시 중용할 것이네.”

“그럼……, 기회를 놓친 자들은 어떡합니까? 10년이란 세월을 버텨가며 가을 시험만을 기다려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조정에 보답하기만을 기다려왔을 텐데 이리 기회를 놓친다면 학자들에게도 분분히 원성이 따를 겁니다.”

진옥도 곰곰이 생각하니 좌상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느껴졌다.

“그럼 시험을 한 번 더 보도록 하지. 그땐 다른 이를 책임자로 쓰겠네.”

좌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예, 조정이 급한 시기니 시험을 2차례 시행해 기회를 놓치는 학자들이 없도록 한다면 결코 원성도 없을 겁니다. 현명하신 결정이십니다, 폐하!”

식은땀을 닦는 좌상을 보고 진옥이 웃으며 손짓했다.

“열흘 뒤 문무 고과를 열도록 해 좌상께선 문(文)을 담당하시고, 무(武)는 이 사직이 담당하도록 하게. 짐이 마지막 관문을 맡지.”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좌상과 이목청이 동시에 답했다.

이목청은 며칠 풍랑 속에 산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의연했다. 동생 이여벽이 얼굴을 다친데다 정효순의 끈질긴 구혼을 받고, 사방화를 해친 자가 바로 그 동생 이여벽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결국 이여벽은 가문에서 쫓겨나 바깥에서 떠돌던 서출 동생들을 데려오고…….

정말 일들이 숨 쉴 틈 없이 범람하듯 쏟아졌지만, 이목청은 아무런 일도 겪지 않은 사람처럼 굳건했다. 과연 황제 진옥이 신용하고 중임하는 이유를 완벽히 증명할 만큼 대단하고 큰 인물이었다.

대신들도 남몰래 이목청을 힐끗거리며, 우상부의 많은 일을 뒤로한 채 그를 승상 사직에 봉한 진옥의 결정을 십분 이해했다. 이목청이 부친처럼 미래 승상 자리에 오른다면, 단연코 문무를 겸비한 최고의 승상이 될 것이었다.

* * *

모든 상의를 마친 후 진옥은 조회를 무르고 이목청, 연석, 최의지를 따로 어서재에 불러들였다. 

“한 달 내로 북제로 흥병할 계획이니 그 안에 모든 준비를 마쳐야 한다.”

이목청은 깜짝 놀랐고, 연석은 아예 자리에서 튕기듯 뛰어올랐다.

“폐하! 저희를 죽이실 셈입니까?”

진옥은 연석을 향해 눈썹만 살짝 까딱였다.

“할 수 없단 말은 하지 마라.”

연석은 있는 힘껏 눈에 힘을 주었다.

“어찌 한 달 내로 준비합니까! 못 합니다!”

“그럼 후 부인을 모셔 태중 아이의 뜻을 한번 물어볼까? 할 수 없는지?”

담담한 진옥의 모습에 연석은 크게 노했다.

“폐하! 지금 절 협박하시는 겁니까?”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해야 불시에 허를 찔러 공격할 수 있는 법이다.”

“석 달도 가능할까 말깐데 한 달은 말도 안 됩니다! 어머니를 부르실 거면 차라리 지금 절 죽이십시오!”

진옥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진정 할 수 없단 말이지?”

“예! 못 합니다!”

“여봐라! 당장 연석을 참수하도록 하라!”

진옥의 호령을 듣고 밖을 지키던 호위들이 즉시 몰려와 연석을 붙들었따.

“진옥! 어찌 이럴 수 있소! 자네가 한번 해보시오!”

화가 난 연석은 급기야 이성을 잃고 핏대를 세웠다.

진옥은 서서히 눈을 가늘게 떴다.

“뭐라? 지금 감히 황제의 이름을 부른 것이냐? 당장 사지를 찢어버려라!”

“정말 미쳤소? 세상에 이런 황제가 어디 있단 말이오!”

연석이 길길이 날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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