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5화. 가문에서 쫓아내다
우상부.
떠들썩하게 정비가 돼가는 영친왕부에 비해 우상부는 너무도 고요했다.
우상, 이목청, 이여벽은 돌아가는 길 내내 그 어떤 말도 나누지 않았다.
이목청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이여벽의 짐을 꾸려 1,000리나 떨어진 비구니 암자로 출가시킬 준비를 했고, 우상은 이여벽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아무 말 없이 서재로 향했다.
우상 부인은 집으로 실려 온 뒤로 여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천성 조정의 가장 높은 관리, 우승상의 적녀로 태어난 이여벽은 평생을 비단 옷에 귀한 음식만 먹으며 그야말로 화려한 부귀영화 속에 살았다. 하지만 그 영화로운 나날도 이젠 한낱 안개처럼 눈앞에서 하릴없이 사라져갔다.
이여벽은 지금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을까, 후련해하고 있을까.
그녀는 다만 모든 것이 다 끝난 자신의 결말 앞에 눈시울만 붉게 물들인 채 오라버니 이목청의 뜻을 따르고 있었다.
하인들은 서둘러 이여벽의 짐을 다 꾸려 마차에 실었고 이목청이 준비해 둔 호위들도 말끔히 준비를 마친 후 우상부 대문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목청은 그제야 이여벽에게 말을 꺼냈다.
“아버지, 어머니께 인사드리고 오거라.”
이여벽은 고개를 끄덕인 후 서재로 향했다.
이여벽은 서재 입구에 다다라 문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이내 멈칫하곤 치맛자락을 들어 머리를 3번 조아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아버지, 불효녀는 갑니다. 딸을 낳은 적이 없었다고 생각해 주세요.”
서재에서 눈을 감고 있던 우상은 그 찰나 사이에 부쩍 늙어버린 듯했다.
“어머니껜 인사 올릴 필요 없다. 오늘 네가 우상부 대문을 나가는 순간 난 족보에서 네 이름을 지울 것이니 넌 더 이상 우상부 딸이 아니다. 살려면 살고 죽으려면 죽거라. 네 인생은 앞으로 네가 다 알아서 살도록 해라.”
이여벽은 눈물을 펑펑 쏟으며 한참을 오열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우상도 끝내 파도처럼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가거라!”
이여벽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뜰을 잠시 바라보곤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입구에 다다른 그녀가 오라버니 이목청을 향해 나지막이 소리쳤다.
“오라버니.”
이목청은 무표정으로 동생을 돌아보며 말했다.
“네가 가면 떠돌고 있던 아우와 누이를 우상부로 데려올 거다.”
“떠돌고 있던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었다고요?”
이목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어머니께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너도 잘 알겠지. 어머니께선 서자를 받아들이지 못하셨기에 5년 전쯤 목자에게 손을 대셨고 내가 직접 구했다. 그때 녹의가 그 장면을 실수로 봐버렸고 분명 어머니께서 녹의도 가만히 두실 리 없다는 생각에 그 아이를 호수로 밀어 넣어 거짓 죽음을 가장한 뒤 함께 어디론가 숨겼다.”
이여벽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한참동안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과연 오라버니가 하실만한 일이시네요.”
“네가 평생 별것 아니라 생각했던 그 우상부 아가씨라는 신분, 여태 바깥에서 5년간이나 고생했던 그 아이는 분명 소중히 여길 거다. 네 자리는 앞으로 그 아이의 것이 될 거다. 나도 본래 우상부 서자를 바깥에서 떠돌게 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네가 기회를 주었으니 참 잘 됐구나.”
이여벽은 눈을 감은 채 다시 한 번 눈물을 쏟았다.
“오라버니, 날 보내기 전에 이런 말을 하다니 정말 너무하네요.”
“아버지께서도 널 가문에서 쫓아내셨을 테니 넌 더 이상 우상부 아가씨도 아니고 내 동생도 아니다. 알아서 잘 살거라. 자, 이제 출발하라!”
이목청이 집으로 들어가며 손짓을 하자, 하인들이 한 목소리로 답했다.
“예! 사직 대인!”
이여벽은 차갑게 돌아서버린 이목청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럽게 외쳤다.
“오라버니! 실은 날 미워하는 거죠? 평생 사방화를 지키고 보호해주고 싶었는데 친동생인 내가 방화를 그렇게까지 해쳤으니 아예 날 증오하게 된 거죠? 그래서 사방화가 날 용서한다고 해도 말없이 계시다가 밖에서 떠돌던 동생들까지 데려와 내 우상부 아가씨 신분까지 다 지워버리려는 거잖아요. 내가 혐오스러워 이렇게 날 벌하려는 거죠!”
이목청은 그 자리에 멈춰 섰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내가 널 미워한다고? 난 여태 널 내 동생이라는 이유로 평생 제멋대로 굴던 걸 참아준 내 자신에게 화가 나는 거다! 여벽, 넌 더 이상 내 동생이 아니다. 오늘부로 우상부엔 이녹의, 이목자만 있을 뿐 이여벽은 없다.”
이여벽은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고, 이목청은 그렇게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이여벽은 대문 앞에서 한참을 오열하다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천천히 우상부를 떠나 황궁을 거쳐 1,000리 밖 비구니 암자로 향했다.
거리 백성들에게도 사방화를 해친 자가 이여벽이었단 소문이 퍼졌다. 백성들에겐 며칠 또 신나게 떠들어댈 안주거리가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이여벽은 제 이야기로 시끌벅적한 거리에서 홀로 눈물을 쏟으며 도성을 떠났다. 도성을 완전히 빠져나온 뒤, 이여벽은 잠시 휘장을 걷어 뒤를 돌아봤지만 눈물로 얼룩진 시야엔 드높은 성벽과 삼엄한 병사들만 비칠 뿐이었다.
이곳은 그녀가 평생을 자라온 도성이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엔 무언가 번뜩 스쳤지만 다시 억눌러졌다. 이제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었다. 그녀의 후회를 받아줄 사람은 누구도 없었고 더 이상 돌아갈 길도 없었다.
그녀는 휘장을 내리고 눈물이 마를 때까지 엎드려 통곡했다. 그리고 그녀의 오라버니 이목청은 이여벽이 우상부 가문에서 쫓겨났고, 더 이상 우상부 딸이 아니란 소식을 세상에 널리 공표했다.
* * *
영강후부.
연람은 우상부에서 전해진 소식을 듣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제 무덤을 제가 판 거지, 잘됐네!”
하지만 영강후 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멀쩡한 딸애가 어찌 그리 생각이 고쳐지질 않는지, 안타깝구나.”
연람은 바로 콧방귀를 뀌었다.
“어머니, 동생을 회임하시고 더 인자해지셨네요. 안타까울 게 뭐 있어요? 방화가 그 지경이 됐는데 강 소왕야가 계셨다면 정말 죽은 목숨이었을지 몰라요. 살아 나간 것만으로도 방화가 얼마나 선량한지 보여주는 거라고요.”
후 부인은 즉각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소왕비 상처가 그리 심하더냐?”
연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스레 말했다.
“네! 정말 귀신처럼 안색이 창백해져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어요.”
“늘 미인이 화근이라 이야기를 만들지만 이렇게 미남도 화근이 되는구나.”
후 부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폐하께서 방화를 황궁으로 모셔갔대요. 거기서 요양을 하라고요. 내일 방화를 만나러 가고 싶었는데 황궁에 가버려서 힘들어졌네요.”
“태후마마께 의지를 청하면 너도 황궁에 들어갈 수 있잖니.”
“너무 귀찮아요! 그리고 황궁은 정말 싫은데 이틀 후에 다시 얘기해요.”
연람은 바로 인상을 찡그렸고, 후 부인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대장공주부.
대장공주는 영친왕부에서 돌아와 지친 듯 침상에 몸을 뉘였다.
금연은 바로 어머니 뒤를 따라 들어와 조용하게 이야기했다.
“어머니, 정효양은 지하 감옥에 갇혔으니 이제 화 좀 푸세요.”
하지만 대장공주가 눈을 감은 채 대답을 않자, 금연은 다시 뒤돌아섰다.
“방해 안 할 테니 쉬세요. 가보겠습니다.”
그때, 대장공주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됐다. 정효양에게 시집가고 싶으면 가거라. 더 이상 말리지 않을 테니.”
“동의해주시는 건가요?”
대장공주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이여벽 꼴이 나는 것보단 낫겠지.”
금연이 말이 없자 대장공주는 그저 말없이 손을 내저었다.
금연은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다 문을 닫고 밖으로 향했다.
이여벽 일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금연, 이여벽, 연람은 남진의 존귀한 귀족 아가씨들로 어릴 때부터 서로 다투기도 하고 아웅다웅 지내왔지만 서로의 목숨을 노릴 정도로 악의를 품은 적은 없었다.
이여벽은 실로 모든 이들의 마음을 오싹하게 만들었고, 또 한편으론 평생 배후에서 사람들을 해쳐왔던 어머니 우상 부인을 보고 악행에 익숙해진 건 아닌지 하는 생각에 소름이 다 끼쳤다.
금연의 모친, 대장공주는 이기적이긴 해도 누군가의 목숨을 앗으려 할 만큼 악한 사람은 아니었다. 금연은 이로써 제게 고운 성정의 어머니가 있다는 것과 사방화란 좋은 지기를 만나 충효대의를 깨닫게 된 것에 새삼 감사했다.
* * *
우상부.
이목청은 어머니 우상 부인의 뜰로 가 그녀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우상 부인은 날이 저물어서야 서서히 깨어났고 이목청을 보자마자 아들의 손을 덥석 붙잡고 물었다.
“청아! 벽이는?”
이목청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우상 부인은 손을 덜덜 떨었다.
“폐하와 사방화가 정말 벽이를 죽인 건 아니겠지?”
계속해서 말이 없는 이목청을 보고, 우상 부인은 차츰 눈물을 쏟았다.
“정말 벽이가 사방화를 해쳤단 말이냐? 난 믿을 수가 없구나. 그때 난 벽이 곁에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어찌 꽃에다가 수를 썼겠어?”
침묵하던 이목청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머니, 벽이 곁에 계속 계셨단 말을 책임지실 수 있으십니까?”
우상 부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벽이를 사주한 사람은 북제 국구였습니다. 소왕비마마는 벽이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고, 폐하께서도 너그러이 우상부에게 반역의 죄를 씌우지 않으셨습니다. 우상부와 벽이를 벌하지도 않으셨고요. 벽이는 이미 제가 1,000리 밖 비구니 암자에 보냈습니다. 아버지께서도 가문에서 내쫓아 족보에서 이름을 지워버리셨으니, 앞으로 더 이상 우상부 아가씨가 아닙니다.”
우상 부인은 순간 울음을 뚝 멈췄다.
“북제 국구라니? 가문에서 쫓겨나, 족보에서도 이름이 지워지고……. 1,000리나 떨어진 비구니 암자에…….”
“줄곧 출가하길 원했던 아이니 뜻대로 해주는 게 낫지요. 아버지께서 다년간 남진에 충성하시고, 아들인 저도 여전히 폐하의 중임을 받아 이 우상부 가문을 이어받은 걸 다행이라 여기셔야 합니다.
또 제가 소왕비마마와 좋은 친분을 유지하고, 폐하께서도 너그러이 살펴주신 까닭에 죽어 마땅한 죄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살 수 있었던 것만도 다행이지요, 살았다면 응당 엄청난 죄를 사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고요.”
이목청의 담담한 말에, 우상 부인은 그저 눈물만 하염없이 쏟았다.
“어머니, 자야를 기억하십니까? 어머니께서 해치려한 그 아기를 제가 몰래 구했습니다. 녹의도 호수에 빠져 죽은 게 아니라 아직 살아있습니다. 벽이를 암자로 모셔간 이들에게 돌아올 때 녹의와 자야를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이제 아버지께 그 두 아이를 어머니 자녀로 족보를 올릴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할 겁니다. 오늘부로 우상부엔 적통인 둘째 아가씨 이녹의, 둘째 공자 이목자만 있을 뿐 이여벽이란 이름은 영원히 사라지고 없을 겁니다.”
우상 부인은 너무 놀라 순간 숨을 쉬는 것도 잊고서 이목청을 바라봤다.
그러나 이목청은 결연한 눈빛으로 담담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을 달이라 분부했으니 제때 드시고, 돌아오지 않을 이를 그리워마세요.”
이목청은 이 말을 끝으로 천천히 방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