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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4화 (844/978)

844화. 배후에 숨은 자 (2) 

두 부자가 일어나자 진옥은 굳어진 얼굴로 이여벽을 쳐다보았다.

“우상부는 벌을 면할 수 있으나, 이여벽은…….”

“폐하!”

사방화가 갑작스레 진옥의 말을 끊었고, 진옥은 사방화를 돌아보았다.

“놓아주자는 것인가?”

하지만 사방화가 말을 잇기도 전, 이여벽이 먼저 소리쳤다. 

“죽길 바라고 있으니 절대로 절 용서해주시지 마십시오!”

사방화는 한껏 지친 안색을 하곤 진옥에게 말했다. 

“다 됐으니 우상 대인과 목청 공자님께 이만 여벽 아가씨를 데려가라고 해주십시오. 그 어여쁜 얼굴을 다쳤으니 나름 벌을 받은 셈 아니겠습니까. 저도 복을 쌓고 싶으니 부디 그렇게 해주십시오. 어머님, 이것이 옳지요?”

영친왕비는 매우 화가 났지만 곧 이여벽은 앞으로 이 나라가 의지해야할 인재, 이목청의 친동생이란 생각이 찾아들었다.

실제로 이여벽에게 죽음의 형벌을 내려도 우상부는 아무런 원망도 않겠지만 그 형벌은 훗날 무거운 멍에로 남아있을 수도 있었다. 더불어 이목청도 동생을 잃고 어찌 마냥 편하게 정사에 집중할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니, 영친왕비도 더 이상 파고들지 않으려는 사방화의 마음을 십분 공감했다.

“네, 황상. 방화가 됐다니 저도 달리 할 말은 없습니다. 우상과 목청에게 얼른 여벽을 데려가라고 해주세요.”

그에 이여벽이 화를 내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방화! 전 당신의 용서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일찌감치 다 체념했으니 당신이 날 용서해준대도 내가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이여벽의 발악에, 우상은 다시 한 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그냥 이것에게 사약을 내려주시옵소서! 노신은 처음부터 이런 자식을 낳은 적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겠습니다! 소왕야, 소왕비마마의 목숨을 해하려했습니다! 감히 황손을 해하려한 죄를 용서해주신다면 백성 모두가 함부로 사람을 해치려하지 않겠습니까? 나라 기강을 위해서라도 부디 우상부를 용서치 마십시오! 노신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습니다!”

그리고 이목청은 계속 자리에 가만히 서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직접 소리 내 대화하지 않았지만, 진옥도 이미 사방화가 이여벽을 놓아주려는 마음을 눈치 채고 있었기에 그저 굳은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당사자인 소왕비가 그만하겠다니 더 이상 죄를 묻지 않겠네. 우상, 짐은 더 이상 이여벽을 보고 싶지 않으니 돌아가 잘 가르치도록 하게.”

우상이 고개를 들어 이목청을 바라보자 이목청은 진옥에게 절을 올렸다.

“폐하, 소신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여봐라! 벽이를 집으로 데려가라!”

이어진 이목청의 분부에, 하인은 이여벽을 부축해 우상부로 돌아갔다.

결국 우상도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노신,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정효순도 정일의 눈치를 살피다 서둘러 그들의 뒤를 따랐는데, 이를 느낀 이목청이 돌연 멈춰서 정효순에게 말했다.

“효순 공자도 그만하세요. 오늘 내로 동생을 먼 곳으로 출가시킬 겁니다. 아우의 죄를 대신하려는 공자의 마음만은 충분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이목청은 재빨리 정효순의 혈도를 누르고 영친왕부를 떠나갔다.

정효순은 물리적으로 뒤따라갈 수 없이 가만히 서 있어야했고, 정일이 서둘러 다가와 정효순을 깨우려했지만, 몇 번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폐하, 목청 공자가 쓴 수법이 참으로…….”

정일의 말에, 진옥이 손을 휘둘러 가볍게 혈도를 풀어주며 말했다.

“우상부에선 더는 효양의 죄를 따지지 않겠다니 여기서 다 끝난 것이다.”

정일은 서둘러 공수를 올렸다.

“황송합니다, 폐하.”

진옥은 곧 모두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진범을 찾아냈으니 모두 물러가라!”

진옥이 다시 들어가자 사람들은 일제히 탄식을 내뱉으며 뿔뿔이 흩어졌다.

사방화가 참 인자하다는 칭찬, 이 짧은 시간 내에 진범을 찾아낸 진옥, 이여벽이 안타깝다는 이야기 등등이 한꺼번에 뒤섞여 묵직한 소음을 만들었다.

태후는 진옥이 아직 이곳에 남아 할 얘기가 있다는 걸 눈치 채고 곧장 황궁으로 향했고 대장공주, 좌상 부인을 비롯한 다른 이들도 속속들이 떠났다.

연람, 금연은 사방화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진옥을 위해 내일을 기약하며 떠났고 명 부인과 사은희는 가족의 부상에 걱정이 앞서 그냥 자리에 남았다. 하지만 연석, 정명, 송방, 공자들은 모두 영친왕부를 떠났다.

희순은 취하의 시신을 수습하라 명한 뒤, 취하의 예비 시댁 사람들을 불렀다. 그들은 처참히 죽어버린 취하를 보며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다.

영친왕비는 직접 그 예비 시댁을 하문했다. 그렇게 배후는 이 집안을 두고 취하를 협박했다는 마지막 진실까지 알게 되었다.

영친왕비는 다소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그토록 오래 주종 간 의리와 정을 쌓아도 새롭게 둥지를 틀 가족 앞엔 다 무용지물이 되는 것일까. 그녀는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이제 시녀들에게 혼처가 정해지는 즉시 서둘러 보낼 준비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 *

다시 화당으로 들어온 진옥은 영친왕, 영친왕비에게 진지한 제안을 했다.

“백모님, 백부님. 진강은 적어도 한 달에서 두 달은 지나야 돌아올 겁니다. 옥조연 외에도 또 누군가 계수를 해하려한다면 그때는 실로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진강이 없는 영친왕부는 계수에게도 더 이상 안전하지 못하니 황궁으로 데려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두 분의 허락을 얻고 싶습니다.”

영친왕, 영친왕비가 깜짝 놀라 얼어있는데, 사방화가 곧장 반대를 했다.

“안 됩니다!”

그러자 진옥도 더 완강하게 나왔다.

“계수는 반대할 권리 없소! 다시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진강에게도 무슨 일이 생긴다는 것이오! 그럼 난 앞으로 누구에게 기대 살아야 하오? 이젠 스스로를 지킬 힘도 없잖소!”

“누군가 왕부에서까지 절 노렸을 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을 뿐입니다. 잠깐 방심한 것뿐이에요. 다신 이런 일 없을 겁니다.”

“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생명도 보장받지 못하오. 나도 더는 살아갈 의미가 없는 것이오. 황궁이 계수를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뭘 겁내는 것이오?”

“누가 겁나서 그런답니까? 전 그저…….”

사방화는 지난날 진강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황후가 되려 황궁을 자처해 들어갔었다. 그 일이 있고 수년이 지난 것도 아닌데 또 다시 황궁에 들어간다는 것이 달가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때, 영친왕비가 사방화의 손을 토닥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화야, 황상 말씀이 옳아. 편하게 황궁에서 지내거라. 강이가 없는 동안 황상께서 널 돌봐주시면 나와 왕야도 좀 마음 편히 있을 수 있지 않겠니? 또다시 네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난 정말 살 의미가 없을 것 같구나.”

영친왕비가 동의하자 영친왕도 반대하지 않았다.

오래전 진강이 황실 은위에 휘말리고 누군가에게 남몰래 박해받아 시신 더미에 빠졌던 때 외엔 영친왕부는 내내 아주 평화로웠다.

오늘 일은 실로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고, 사방화는 진강과 목숨이 연결돼있었다. 사방화에게 문제가 생기면 진강도 생명을 잃는다는 뜻이었고, 영친왕비는 사랑하는 두 자녀를 다 잃고 더 이상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물론 사방화가 황궁에 들어가 요양한다는 건 딱히 적절하진 않아 보이지만, 비상시이니 안전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것도 고려치 않을 수 있었다. 

만약 진옥이 흡충을 가져오는 그 엄청난 수단을 쓰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이여벽과 배후에 있는 옥조연을 찾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사방화를 죽이지 못했으니 다음번에 또다시 문제가 생기지 않으리란 법이 없었다. 

사방화는 영친왕, 영친왕비 모두 진옥의 결정에 동의하자 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문지르며 진옥에게 말했다.

“꼭 절 데려 가셔야겠으면 은희를 같이 데려가게 해주세요. 은희라도 없으면 정말 답답해 죽을 것 같습니다.”

“안 돼, 그대 하나 돌보는 것도 골치 아프오. 소천자, 마차를 대령해라!”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단칼에 거절한 진옥을 보고, 사은희는 한편에서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지금 바로 갑시다.”

진옥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방화가 당황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네? 뭐라도 챙겨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챙길 게 뭐 있소? 궁엔 없는 게 없는데. 빨리 갑시다.”

말문이 막힌 사방화를 보고, 영친왕비가 일어나 그녀의 손을 토닥였다.

“그래, 아가야. 내가 다 챙겨서 보내줄 테니 어미에게 말만해라. 황상께서도 내내 영친왕부에 머무르시느라 조정 일이 밀리셨을 게야.”

사방화는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사실 마땅히 챙길 만한 것도 없었다.

“옷 말곤 없네요.”

“그럼 가지! 연가마를 준비해 소왕비마마를 입구까지 모셔다 드려라.”

“알겠습니다.”

시화가 답했고, 진옥은 먼저 방을 나섰다.

사방화는 이 틈을 타 명 부인에게 재빨리 조용히 속삭였다.

“명 숙모님, 북제 옥조연과 더불어 언신이 왜 무명산으로 보내졌는지 좀 알아봐주세요.”

명 부인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소식이 있으면 곧장 황궁으로 보내줄게.”

사방화는 오래도록 언신을 믿어 왔기에 단 한 번도 그에 대해 달리 알아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북제에 있는 언신의 옥 씨 가문, 언신의 친부모님을 비롯한 가문의 식구들이 어떤 사람인지조차 전혀 알지 못했다.

그때, 곁에서 사은희가 입술을 삐쭉이며 사방화의 팔짱을 껴왔다.

“방화 언니, 제가 보기엔 가망이 없어요. 폐하께선 절 조금도 받아주려 하시지 않는다고요.”

사방화는 사은희의 머리를 살짝 토닥여줬다.

“어찌 벌써 포기하는 거야?”

“그건 아니에요. 그저 폐하께선 어제와 오늘 모두 제가 한평생을 기다린대도 가망이 없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들게 하시네요.”

힘없이 고개를 젓는 사은희를 보고, 사방화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새파랗게 어린 애가 뭘 한평생 일까지 생각하는 거니? 방화야, 또다시 이런 일이 있어선 안 되니 마음 놓고 몸조리하고 있어. 네가 부탁한 건 반드시 찾아낼 테니 걱정 말고.”

명 부인이 사은희를 나무란 뒤, 사방화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사방화도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사방화를 위해 방 바로 앞에 연가마가 준비되었다.

춘란은 사방화를 부축해 가마에 태워주었지만, 사방화는 마차에 오르자마자 곧장 또 휘장을 걷어 올리곤 영친왕비에게 말했다.

“어머님도 조심하세요. 절 해하려다가도 기회가 없다고 여기면 왕부를 노릴지도 모르니까요.”

“그래, 왕야와 왕부를 정비할 테니 걱정마라. 이 어미는 그리 너그럽지 못해 누군가 내 왕부를 쑥대밭을 만드는 건 절대 눈감아줄 수 없으니.”

사방화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곤 휘장을 내렸다.

가마가 대문을 향해 천천히 이동하자, 영친왕과 영친왕비도 배웅을 하러 대문까지 걸어갔다.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진옥은 사방화를 배려해 더 안전히 가마를 들도록 명한 뒤, 영친왕비에게 물었다.

“백모님, 그 금옥란은 어디 있습니까?”

“암실에 있습니다. 좀 이따 없애버리려고요.”

“차라리 제게 주십시오. 월낙에게 가지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네, 사람을 해친 꽃이니 황상께 드리는 게 낫겠네요.”

진옥도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에 올랐고, 황궁으로 향하는 인원은 진옥이 처음 영친왕부로 왔을 때보다 3배는 더 많은 호위가 따라붙었다.

그 웅장한 황제의 대열이 떠나고, 명 부인과 사은희는 영친왕 부부에게 인사를 올린 뒤 집으로 돌아갔다.

모두를 떠나보낸 후, 영친왕비는 문득 황궁이 있는 쪽을 보며 말했다.

“왕야, 황상이 방화를 생각하시는 마음이 결코 강이에게 뒤지지 않네요.”

영친왕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형제끼리 화목하게 남진 강산을 위하니 참 좋군요. 우리 방화는 어찌나 마음이 맑고 대의가 깊은지 이여벽도 그냥 저렇게 용서해주네요. 따지고 들려면 얼마든 따지고 들 수 있었지만 결국은 이 강산을 위해 목청 앞에서 동생을 놓아준 게지요. 선황폐하께선 늘 우리 방화더러 홍안화수라 말씀하셨지만 제가 보기엔 우리 방화는 이 남진의 커다란 복이라 생각합니다.”

이어진 영친왕비의 말에, 영친왕도 인정한다는 듯 짧게 말을 덧붙였다.

“시국은 어지럽지만 천당에 계실 선황폐하께서도 한마음 한뜻으로 뭉친 자식들을 보고 분명 흐뭇해하실 것이오.”

부부도 이내 영친왕부로 들어갔다. 

영친왕비는 본원으로 들어가자마자 왕부 하인들을 모두 다 불러 모아 영친왕부를 보다 철저하게 재정비했다.

취하의 일은 왕부에 커다란 교훈이 되었고, 수많은 아랫사람들 하나하나를 한 가족처럼 자애롭게 대했던 영친왕비에게도 깊은 교훈을 남겼다. 더 이상 인자하고 너그러이 대한다는 것이 오히려 사람을 망치게 되는 길이라면, 그녀도 얼마든 관대한 마음을 버릴 각오가 돼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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