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3화. 배후에 숨은 자 (1)
총명한 우상과 이목청을 속여 가며 이여벽의 연정을 이용해 사방화를 해하려 하다니, 대체 이여벽을 사주한 자는 누구일까?
사방화는 너무도 차분한 이여벽을 보고 할 말이 없어졌다. 그녀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모든 걸 감당하겠단 마음의 준비가 없었다면 이 많은 사람들 앞에 저리도 침착하게 조건을 내걸 수 있는 걸까?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는 정다운 친구처럼 함께 웃고 떠들고 놀았던 사람이었다.
이여벽의 담대함에 눈물을 흘려야 할까, 탄복을 해야 할까.
곧 진옥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여벽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술을 뗐다.
“수일 전, 강 소왕야께서 소왕비마마를 모시고 돌아오신 날, 검은 옷을 입은 자가 소리 소문 없이 절 찾아와선 거래를 하자고 했습니다. 제게 협조만 잘해준다면 소왕비마마를 죽여 강 소왕야를 갖게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사방화가 바로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자가 누구죠?”
이여벽은 사방화의 물음엔 답하지 않고, 다른 말을 대신했다.
“방화, 내 평생 강 소왕야를 연모해온 만큼 그분의 성격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경성을 떠났다고 제게 마음을 줄 거란 기대는 품지도 않았어요. 절 보면 죽이겠단 말까지 했던 사람인데요, 뭐. 그 자가 강 소왕야를 얻게 해준대도 그 마음까진 뺏어오지 못할 테니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잠자코 있던 연람이 코웃음을 쳤다.
“하! 머리가 돌 정도로 강 소왕야를 연모해도 그런 좋은 일에 기개를 꺾을 정도는 아니었나 보지?”
“머리가 돌아버리긴 했어도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니까.”
“그래, 어디 한 번 계속 말해봐.”
연람에게 잠시 말이 끊겼지만, 이여벽은 다시 진옥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 사람은 제 말을 듣더니 벌레 한 마리를 꺼냈고 곧장 그 벌레는 제 몸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방금처럼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줄 거니 자신에게 협조해주지 않으면 그대로 절 죽여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게도 우상부의 피가 흐릅니다. 강 소왕야께서 아무리 절 싫어하신다고 악한 자의 꼭두각시가 되는 그런 천한 짓은 할 수 없어서 그냥 죽이라고 말했습니다.”
연람이 다시 또 코웃음을 치며 끼어들었다.
“그래, 참 박수갈채를 받을 만한 기개를 펼치긴 했다만, 네 말이 진짠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지금 이 상황에서까지 내가 거짓말을 할 것 같아?”
이여벽의 반응에 연람이 다시 또 반박하려하자 금연이 재빨리 제지했다.
“람아, 끊지 말고 제대로 좀 들어보자.”
연람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고, 이여벽은 재차 진옥을 보며 이야기했다.
“그 자도 제가 죽어도 복종하지 않겠다니 더는 그 벌레를 조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은 늘 가질 수 없는 건 없애버린다며 강 소왕야의 마음을 얻지 못했으니 없애버리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방화랑 함께 죽여 버리자고요. 소왕비마마를 죽게 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더군요.
소왕비마마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 방화 어머님은 박릉 최씨가 아닌 매족의 성녀라, 방화도 매족 성녀의 피가 흐른다고 했습니다. 때문에 운란 공자님과 혼인했어야 했지만 강 소왕야를 연모해 매족의 규율을 깨버렸다고 하더군요.
이것으로 방화의 심혈을 재촉하면 죽진 않아도 수명이 반으로 깎일 거라 했습니다. 그런 뒤 자신이 나중에 손만 까딱하면 아주 손쉽게 죽일 수 있을 거라고요. 그렇게 방화가 죽으면 방화와 혈맥으로 이어진 운란 공자님도, 동심주로 이어진 강 소왕야도 한 번에 다 죽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이여벽이 토로한 진실에 사람들은 모두 등골이 오싹해졌다.
배후의 협박도 공포였지만, 오늘로써 사방화의 진짜 이야기가 세상에 다 드러났다. 사방화의 모친 최옥완이 사실은 매족 성녀고, 사방화 또한 모친의 피를 이어받아 매족 성녀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아는 이는 몇 되지 않았다.
하지만 비밀이 드러나도 담담한 사방화의 얼굴을 보고, 사람들도 사방화가 이 진실을 딱히 숨기려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렇게 모두는 약속이라도 한 듯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이여벽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이번 생은 더 이상 가망이 없을 거란 생각과 두 분이 화목하게 잘 지내는 모습을 보니 출가할 용기조차 없는 제 모습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결국 그 자에게 설득 당했지요. 거래를 하고 며칠 뒤 꽃놀이 연회에서 그 자에게 이미 포섭된 취하와 만나 왕비마마께서 금옥란을 살뜰히 돌보신다는 말을 듣고 그 꽃에다 그 자에게 받은 약 가루를 뿌렸습니다.”
이내 영친왕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대체 어떤 가루기에 단번에 꽃봉오리를 터뜨릴 수 있단 말이냐?”
“소왕비마마 심혈을 밖으로 빼내는 약일 겁니다. 저도 잘 모릅니다.”
이여벽이 말했다.
“그래, 그렇게 방화와 강이를 죽이면 네 마음은 편할 줄 알았더냐?”
진강의 마음은 얻지 못했어도 이여벽 역시 찬란한 미래가 보장된 인물이었다. 문무백관 최고 우두머리인 우승상의 적녀에 온화한 성정을 가진 그녀는 늘 최고의 신붓감으로 칭송되었다. 영친왕비는 그토록 탄탄한 부귀영화가 보장된 아이가 왜 이런 일을 벌인 건지 당최 이해가 가질 않았다.
“두 분이 돌아가시면 저도 더 이상 살 생각은 없었습니다. 더 이상 즐겁게 산다는 것도 제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니까요. 만약 제 몸속에 있던 벌레가 흡충에게 먹히지 않았다면, 저도 이 취하처럼 처참히 죽었을 겁니다.”
이여벽은 바닥에 피를 흘리며 처참히 죽은 취하를 보며 말했다. 그에 영친왕비도 다시 취하를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계속 침묵을 지키던 진옥이 말했다.
“이는 그저 겪었던 이야기일 뿐이니 짐에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폐하, 아직 제 얘기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절 사랑에 눈이 멀어 이성의 끈도 다 상실한, 미친 여인으로 보듯 그 자 역시 절 그렇게 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실 제가 이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몰랐겠지요.
다들 제가 문예에 남다르단 건 알고 계셔도 이건 모르셨을 겁니다. 누군가 얼굴을 가리고 제 앞에 나타나도 전 이목구비로 그 사람 얼굴을 최대한 가깝게 그려낼 수 있습니다. 이건 제가 그린 그 자의 모습입니다.”
이여벽은 그대로 품에서 고이 접은 종이 하나를 꺼냈고,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한 이여벽의 재주에 깜짝 놀랐다.
진옥이 눈썹을 까딱이며 소천자에게 말했다.
“가서 받아오너라.”
소천자가 이여벽에게서 종이를 건네받아 진옥에게 넘겨주자, 그는 홀로 한참을 바라보다 사방화에게 넘겨주었다.
“한번 보시오.”
종이를 받은 사방화도 점점 미간을 찌푸리자, 사람들은 궁금증만 더 커져갔다. 영친왕비는 아예 사방화 곁으로 갔고, 그림을 본 순간 깜짝 놀랐다.
“이건 언……! 아니지, 닮아 보이는 걸 거다. 조금 더 늙어 보이는구나.”
그때, 연석도 다가왔다.
“저도 좀 봅시다.”
사방화가 연석에게 그림을 넘겨주자 그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설마……, 어찌 이 사람일 수가 있습니까?”
영친왕도 서둘러 다가왔다.
“나도 좀 보여 다오.”
연석이 영친왕에게 그림을 넘겨주었다.
영친왕의 눈가가 어두워졌다.
“아……, 이 자였구나!”
“왕야께서도 아십니까?”
연석이 물었다.
“전체적인 모습은 완벽히 닮진 않았지만, 눈과 윤곽의 기풍을 아주 잘 살려낸 걸로 보아 확신할 수 있다.”
“누굽니까?”
영친왕비가 영친왕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영친왕은 진옥을 보며 천천히 답변했다.
“20년 전, 이 자가 남진으로 출사를 왔을 때 내 직접 맞이했었소. 하지만 다음날 갑작스레 병으로 숨졌고 사인도 알 수가 없었다오. 이로 인해 북제가 변경에서 전투를 일으켰고 충용후부 노후야께서 직접 전쟁을 이끄셨지.
그렇게 양국은 3년간 전쟁을 벌였었지요. 양쪽 모두가 지쳐서야 전쟁은 멈췄고 북제는 화해의 의미로 남진의 공주를 시집보내라 제안했소. 남진도 양국의 평화를 위해 승낙해주었지만…….”
영친왕은 말끝을 흐렸지만 생략된 이야기는 그 제안을 거부한 대장공주를 위해 사봉이 대신 북제로 시집을 갔다는 이야기였다. 대장공주는 딸 금연이 제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굳어진 빛으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이내 영친왕비는 깜짝 놀란 듯 말했다.
“당신 지금 그 남진에 출사를 나왔던 북제 국구 옥조천(玉兆天)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 사람은 그때 죽지 않았어요?”
“옥조연(玉兆宴)이라는 쌍생아 형제가 또 있소. 북제 옥 태후의 동생이기도 한. 그 옥조연의 딸이 바로 옥 귀비고, 아들은 옥언신이오.”
영친왕비는 짧게 탄식을 했다.
“그 사람이었군요. 하마터면 언신이라 착각할 뻔했는데 부친이었다니.”
영친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자지간이니 닮은 것도 이상하지 않지. 그때 변경의 전쟁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자의 모습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진 못했을 거요.”
영친왕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북제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군요…….”
영친왕은 이여벽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다 짙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삼겼다.
이내 이여벽이 진옥을 보며 말했다.
“폐하, 그건 좀 쓸 만하겠습니까?”
진옥은 대답 대신 질문을 했다.
“이 자는 지금 어디 있느냐?”
이여벽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그걸 알도록 둘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저도 모릅니다.”
“그 자를 몇 번이나 만났지?”
“2번 만났습니다.”
“마지막으로 본 건?”
“어제입니다.”
진옥은 눈을 가늘게 뜨며 사방화를 돌아보았다.
사방화도 심각한 빛으로 생각에 잠겼다. 어제까지도 남진 도성에 머무른 그는 오늘 일이 다 탄로 날 것을 알았을까? 그럼 현재 이곳을 떠났을까, 남아있을까. 떠났다면 지금쯤 얼마나 갔을까? 언신은 과연……. 자신의 아버지가 사방화를 죽이려한다는 걸 알고 있을까?
사방화는 다시 진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폐하, 얼른 남진 모든 관문을 봉쇄하고 그 자를 찾는 게 좋겠습니다.”
진옥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천자에게 말했다.
“남진의 모든 관문을 봉쇄하고 당장 그 자를 잡아들여라!”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소천자가 서둘러 떠나고, 진옥이 이여벽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데 순간 우상이 부리나케 달려와 털썩, 무릎을 꿇었다.
“폐하! 노신이 자식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입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진옥은 우상을 보며 조용하게 말했다.
“짐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가 우상부 딸이 이런 일을 꾸몄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네. 소왕비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고 있겠지? 적통 황손 강 소왕야의 비(妃)로 황실의 황족일세. 이는 우상부 온 가문을 참수해도 다 갚지 못할 죄목이나 짐은 우상부가 반역의 마음이 없단 걸 잘 알고 있다.”
우상은 참담한 빛으로 고개를 떨궜다.
“노신도 참으로 면목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벽이 유용한 증거를 주었으니 우상부엔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다. 어서 일어나시게.”
진옥이 우상과 계속 꿇어앉아있던 이목청에게 손을 흔들었지만 우상은 계속해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노신 감히 일어날 낯이 없습니다. 폐하, 벌을 내려주시옵소서!”
“아무리 청렴한 관리라 해도 가정내의 일을 좌지우지하긴 힘들지 않은가. 한평생 청렴했던 우상은 문생들을 만천하에 널리 퍼뜨렸고, 문무백관의 으뜸으로 마땅한 품격을 보이며 문예와 인격으로도 온 나라의 존경을 받았지. 짐은 우상부에서 다신 이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기만 바랄 뿐이네. 다음은 없으니 일어나시게.”
우상도 감히 황제의 호의를 두 번이나 저버릴 수는 없기에 몸을 일으켰다.
“황송합니다, 폐하.”
아버지를 이어, 이목청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