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1화. 해를 끼친 자의 마음 (1)
진옥은 월낙에게 명부와 함께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넘겨주었다.
“월낙, 왕부의 모든 이들 중 독충술에 걸려 죽은 이 시녀처럼 독에 걸려있는 자가 또 있는지 찾아내거라.”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진옥은 월낙이 사람들을 하나하나 호명하고 진옥에게 건네받은 물건을 모든 이들의 심장에 가져다 대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영친왕은 진호의 손에도 비슷한 그릇이 들려있는 것을 보곤 진옥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황상, 저게 다 무엇이오?”
“초지가 짐에게 주고 간 독충을 빨아들이는 흡충입니다. 독충에 걸린 사람이 있으면 그 독충을 빼낼 수 있지요.”
영친왕은 사묵함을 따라 막북으로 간 초지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이곤 더 이상 무엇도 묻지 않았다.
반 시진 후, 월낙이 진옥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폐하께 아룁니다. 독충술에 걸린 이는 없습니다.”
“평소에 이 취하라는 시녀와 가깝게 지내던 사람은 누구냐?”
한 시녀가 나와 무릎을 꿇었다.
“소인 취연이라 하옵니다. 취하와 평소에 가까이 지내왔습니다.”
“독충술에 걸렸단 걸 알고 있었느냐?”
취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몰랐사옵니다.”
“너 말고 또 누구와 가깝게 지냈지?”
“취하와 소인은 모두 왕비마마를 따르는 시녀입니다. 취하는 성격이 좋아 모든 이와 잘 지냈고 누구에게도 미움을 산 적이 없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왕부 사람 그 누구와도 이야기를 잘 나눴고 주인님, 하인 할 것 없이 모두가 취하를 좋아했습니다.
란 아주머님이 늘 왕비마마 곁에 계시니, 손님이 오시면 물건을 전해 받고 찻물을 올리며 배웅을 하는 등 왕비마마께선 항상 취하와 소인에게 분부를 내리곤 하셨습니다.”
“그럼 이 시녀는 왕부 안팎으로 모두 환영을 받는 사람이었단 말이지?”
진옥의 말에, 취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왕부 바깥에선 저 아이가 가깝게 지내고 편히 생각하던 자는 없었느냐?”
“작년에 왕비마마께서 취하에게 혼사를 마련해주셨습니다. 왕비마마께선 하찮은 저희 하인들도 살뜰히 챙겨주셔서 혼사도 취하의 동의를 얻어 마련된 것이었습니다. 하여 혼담을 나눈 뒤 그 집안도 성 내에서 살게 되었던지라 당직이 없을 땐 그 집으로 놀러 가곤 했습니다.”
진옥이 바로 분부를 내렸다.
“소천자! 어서 그 집안사람들을 짐에게 데려오너라.”
“알겠습니다!”
소천자가 서둘러 떠나고, 진옥은 다시 취연에게 말했다.
“이틀간 취하에게서 이상한 점은 못 느꼈느냐?”
취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제는 모두가 꽃놀이 연회를 여느라 정신없이 바빴던 터라 취하의 이상한 점은 느끼지 못했사옵니다……. 아! 취하는 쉬는 날이면 예비 시댁에 가곤 했는데 오늘은 어제 너무 힘들었다며 안 가겠다고 했었습니다.”
“어제 연회에서 누구와 만났고 누구와 이야기를 했었는지는 아느냐?”
취연은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인 둘은 왕비마마와 유 측비마마를 도와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오신 분들 모두와 이야기를 나누긴 했습니다만, 너무 바빴던 터라 정확히 기억나진 않습니다.”
“알겠다. 물러가 보거라.”
취하가 물러나자, 진옥은 다시 월낙에게 분부했다.
“다른 이들과 함께 영친왕부를 한 군데도 빠짐없이 샅샅이 살펴보거라.”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 * *
진옥은 다시 방으로 돌아와 사방화의 곁을 지키던 영친왕비에게 말했다.
“백모님, 어제 연회에 참석한 자들의 명단을 좀 주실 수 있으십니까?”
영친왕비는 고개를 끄덕이곤 춘란에게 말했다.
“춘란, 희순과 함께 가서 어제 왔었던 이들의 명부를 작성해 오거라. 두 사람이 가장 잘 알 테니 말이다.”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왕비마마.”
춘란이 서둘러 밖으로 나가고, 진옥은 의자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영친왕부는 황궁보다도 경비가 삼엄합니다. 눈에 보이는 호위와 숨어있는 암위들까지 있지요. 아무리 고수가 날아 들어왔다고 해도 분명 흔적을 남겨야만 할 겁니다. 흔적이 없다면 어제 연회에 왔던 사람 중 하나겠지요. 범인을 찾아내지 못할 거라 생각진 않습니다.”
사람들도 진옥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내 진옥은 사방화를 보며 묵직하게 말했다.
“만약 정말 어제 연회에 왔던 사람 중에 범인이 있다면 짐의 손으로 직접 그 자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놓을 것이오.”
사방화는 진옥을 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영친왕비가 사방화의 손을 토닥이며 대신 대답했다.
“저도 황상 말씀에 찬성합니다. 어제 왕부에 왔던 사람들은 형양 정씨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저와 방화와도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근데 이리 뒤에서 칼을 갈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저도 절대 용서가 안 돼요.”
잠시 후, 희순과 춘란이 여자, 남자 손님, 또 그들을 따르는 시종들을 제외한 왕부에 온 모든 이들의 명부를 작성해왔다.
진옥은 명부를 받아 꼼꼼히 훑어보곤 무슨 말도 없이 무표정하게 있었다.
그때, 월낙이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폐하께 아룁니다. 영친왕부에 외부인이 남긴 흔적은 없습니다.”
진옥이 눈을 가늘게 뜨며 소천자에게 분부했다.
“이 명부에 있는 모든 이들을 빠짐없이 불러오거라.”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소천자가 서둘러 밖으로 바삐 나갔다.
진옥은 다시 영친왕비를 돌아보았다.
“백모님, 어제 혹시 좀 이상하단 느낌을 받은 사람은 없었습니까?”
영친왕비는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사람이 워낙 많았던 터라 아무리 떠올려 봐도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 사방화가 힘없이 입을 열었다.
“이것저것 따지고 들고 억측하려 들면 분명 정확하지 않을 데가 있을 테니 자세히 조사해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진옥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사방화를 바라보았다.
“혹시 누가 저지른 짓인지 벌써 알고 있는 것 아니오?”
“그래, 방화야. 누구냐?”
영친왕비도 금세 말을 보탰다.
“아닙니다, 저도 잘 모릅니다.”
진옥과 영친왕비는 다시 말이 없어졌다.
곧이어 시묵이 약을 달여 왔다. 그리고 곁에서 사방화에게 한 숟가락씩 떠먹여주는데 사방화는 그냥 그릇을 통째로 가져와 단숨에 마셔버렸다.
그 모습을 본 노설영이 감탄을 했다.
“동서는 약을 물처럼 들이키시네요. 저였으면 반 시진은 걸렸을 텐데.”
사방화는 빈 그릇을 시묵에게 주곤 노설영을 향해 힘없이 웃어 보였다.
“방화야, 이제 각 가문 사람들을 불러 모았으니 잠시 좀 쉬고 있거라.”
영친왕비가 사방화를 살뜰히 챙기고,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베개에 기대 눈을 감았다.
* * *
사방화가 눈을 막 감았을 때, 누군가의 발소리들이 들려왔다.
희순의 안내에 따라 본원으로 온 그들은 이목청, 연석, 정명, 송방이었다.
연석은 문턱을 넘으려다 진옥을 보곤 서둘러 예를 갖추었다. 그리곤 근처 침상에 누워있는 사방화를 보곤 다급히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일이 생겼다기에 듣자마자 달려왔습니다. 어떻습니까? 좀 괜찮아요?”
이목청도 다가와 사방화의 모습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여태 조심하며 지냈는데 어찌 이렇게 됐지? 심혈이 다친 듯 보이는데.”
정명, 송방도 서둘러 다가와 물었다.
“강 소왕야는요? 어디로 가셨습니까?”
네 사람의 과분한 관심에 사방화는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영친왕비가 네 사람을 반기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 다들 마침 잘 왔다. 황상께서 어제 연회에 왔던 이들 중 내 금옥란에 손을 댄 이가 누군지 조사하려던 참이었거든.”
영친왕비가 자초지종을 간단히 설명하자, 연석은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북제가 출병을 준비하는 통에 막북 변경에도 모두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이제야 남진 경성이 조금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이렇게 또 악랄한 이가 사람을 해치다니, 참으로 가증스럽군!”
이목청도 심각하게 말했다.
“보통 일이 아니니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 내란이 가라앉지 않으면 강산은 더 위태로워집니다. 범인은 소왕비마마가 강인하다는 걸 알고 이처럼 치밀한 계획을 세워 무방비 상태에서 당하게 만든 겁니다.”
“대체 누가 이리 똑똑하단 말이냐…….”
머리를 긁적이며 조용히 중얼거리던 정명이 진옥에게 물었다.
“폐하, 외부의 고수를 제외하고 반드시 어제 왕부에 왔던 사람들일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월낙이 외부인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고 했어. 분명 버젓이 왕부로 들어온 사람 중에 있을 거다. 영친왕부는 황궁보다도 더 삼엄한 곳이니.”
“그래도 빠져나가는 구멍이 있지 않겠습니까.”
송방도 말을 거들자, 잠자코 있던 사방화가 입을 열었다.
“그럴 리는 없어요. 나랑 진강이 집으로 돌아온 뒤로 난 몸조리에 충실했고 서방님은 또 나가셔야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이시질 않았는지 영친왕부에 보이지 않는 곳에다 호위를 더 배치해두셨습니다. 영친왕부 안팎으로 어마어마한 수의 호위가 있는데 어찌 소리 소문도 없이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이 뛰어난 무공고수이신 폐하의 무공실력으로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응, 나도 불가능하다.”
진옥이 곁에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어제 분명 연회에 당당히 왕부로 들어왔던 사람일 거예요.”
다들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어제 연회에 왔던 사람들은 모두 이 남진 도성 내의 존귀하고 지체 높은 가문의 부인, 아가씨, 공자들 그리고 형양 정씨 가족들뿐이었다.
형양 정씨 가족들……. 다들 동시에 형양 정씨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가족들은 도성으로 오자마자 큰 파문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둘째 공자 정효양이 큰 사고를 쳤고, 형양 정씨는 도성 사람들과도 일면식이 없던 데다 계속해서 도성에 풍랑을 실어왔으니 여기서 사방화를 해치려 한 목적이 더해졌다고 해도 딱히 이상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또 도성의 고귀한 귀족 가문들은 다들 영친왕부와도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 아니던가. 그중에 누군가 사방화를 해칠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이야말로 더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태후마마 납시오!”
순간 정적을 깨트린 외침에 영친왕비는 깜짝 놀라 춘란에게 물었다.
“춘란! 태후마마도 명부에 넣은 것이냐?”
춘란도 놀라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그러자 진옥이 차분한 목소리로 진정시켰다.
“어마마마께서도 소식을 들으시고 오셨나봅니다. 진호 형님, 형님이 나가주시오. 나머지는 모두 자리에 계시고.”
“알겠습니다.”
진호가 태후를 맞으러 나갔다.
* * *
잠시 후, 태후가 본원에 다다랐다.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 태후에게 정중히 예를 갖췄다.
태후는 고개를 끄덕인 뒤, 급히 영친왕비 앞으로 다가왔다.
“형님, 방화가 다친 데에 어제 연회랑 관련이 있다기에 어제 나를 따라 함께 왔떤 사람들도 다 데려왔소.”
영친왕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태후는 사방화를 보고 깜짝 놀랐다.
“방화야! 어찌 이렇게까지 다친 것이냐!”
사방화는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일은 더 걷잡을 수없이 커지고, 가뜩이나 그 꽃놀이 연회에는 대단하고 지체 높은 귀족들만 불렀던 터라 자신을 향한 더 무거운 관심이 쏟아지고 있었다.
사방화는 범인을 잡는 것보다 이 관심이 더 힘겹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훈련된 사람처럼 계속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괜찮습니다. 큰일도 아닙니다.”
사방화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진옥이 곁에서 콧방귀를 뀌었다.
태후는 그런 진옥을 향해 안색을 굳히며 말했다.
“큰일이 아니라니 다행이지만, 왕부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야한다. 왕부도 안전하지 못한데 이 천하가 어찌 안전할까.”
영친왕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태후를 자리에 앉혔다.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태후도 영친왕비의 손을 잡고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강이는요?”
“외출했습니다.”
태후도 진강이 무슨 일을 하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어 더는 묻지 않았다.
* * *
반 시진 후, 어제 꽃놀이 연회에 참석했던 이들이 차례로 영친왕부에 들어섰다. 그중엔 물론 형양 정씨 가주 정일과 그의 조카 정성도 있었다.
영친왕비는 뜰 밖에다 의자를 마련해 모두가 앉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사씨 육방 명 부인도 사은희와 함께 왔다가 사방화를 보고 깜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