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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9화 (839/978)

839화. 백주대낮 

춘란은 밖을 힐끗 보고는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말했다.

“마마와 제가 금옥란을 살펴본 뒤로 취하에게 가져나가라 명하셨어요.”

영친왕비는 이내 밖을 한번 바라보았다.

내실 문은 굳게 닫혀있고 영친왕비와 춘란은 한껏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하고 있었다. 또 바깥에는 여러 방과 화당을 사이에 두고 있었으니 얌전히 문을 지키고 있다면 내실의 이야기를 들을 순 없었다.

“확실해?”

영친왕비가 물었다.

“확실합니다. 설마 진정 취하가……. 취하는 왕비마마께서 소인 다음으로 가장 믿으시는 아이가 아닙니까? 왕비마마께서 직접 재주 넘치는 거인(*举人: 천거 받은 사람, 향시에 합격한 자를 뜻함) 공자님과의 혼처도 마련해주셨고요. 첩실도 아닌 정실부인 자리라 분명 취하도 좋아할 게 분명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소왕비마마를 해칠 리가 없는데……. 하지만 취하 외에는 정말 누가 또 그 자리에 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영친왕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사방화를 바라보았다. 

사방화도 춘란이 취하를 지목할 줄은 몰랐다. 취하는 영친왕비가 여러 일을 맡기는 것만 봐도 춘란처럼 깊은 신뢰를 주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머님, 취하를 한번 불러 여쭤보세요.”

영친왕비가 고개를 끄덕이곤 춘란에게 말했다.

“춘란, 나가서 취하를 데려오너라.”

춘란은 고개 숙여 대답한 뒤, 밖으로 나섰다.

“꺅!”

그런데 별안간 비명 소리가 들려와 영친왕비가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왜, 무슨 일이냐?”

춘란은 말도 잇지 못한 채 영친왕비를 보며 문 앞을 가리켰다.

“왕비마마, 저……, 저기…….”

춘란의 손이 가리키는 곳에 취하가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눈과 귀와 코와 입에서 시뻘건 피를 흘리며 죽어있는 취하의 시신이 있었다.

춘란도, 영친왕비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 영친왕비가 밖으로 소리쳤다.

“여봐라!”

시위들이 서둘러 모습을 드러냈다.

“누가 취하를 죽였는지 봤느냐?”

사방화, 영친왕비, 춘란이 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그 짧은 사이에 아무 인기척도 없이 취하를 이리도 잔인하게 죽일 거라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시위들도 깜짝 놀라 일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왕비마마, 줄곧 뜰 밖을 지키고 있었으나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럼 무공 고수가 벌인 짓이란 말이냐?”

“아무리 고수라도 백주대낮에 사람을 죽이려면 인기척이나 바람 소리라도 들릴 게 분명하나 아무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이 대낮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왕비마마의 뜰에서 사람을 죽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강 소왕야보다도 무공 실력이 더 뛰어난 고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남진에 강이보다 무공 실력이 뛰어난 고수가 몇이나 되지?”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 누군가 바깥에서 들어와 벌인 짓은 아니란 말이군…….”

영친왕비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깥을 둘러보았다.

곧 춘란의 비명을 듣고 뜰 밖에 있던 하인들도 깜짝 놀라 여기저기서 모여들었다. 그러다 깜짝 놀라 문어귀에 주저앉아있는 춘란과 온몸에서 피를 흘리고 처참하게 죽은 취하를 보곤 모두들 사색이 되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영친왕비는 시위들을 훑어보며 노기 띤 얼굴로 말했다.

“취하가 어떻게 죽었는지 본 자가 있느냐?”

시위들은 일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사방화가 내실에서 나와 영친왕비에게 말했다.

“어머니, 제가 볼게요.”

“어찌 내려왔어! 어서 방에 가서 누워 있거라.”

“괜찮습니다.”

“춘란! 어서 소왕비마마를 부축해 드리거라.”

춘란이 서둘러 일어나 사방화를 부축해주었다.

“춘란, 취하의 사인을 살펴볼 테니 앞으로 데려가줘.”

춘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방화를 취하 근처까지 부축해주었다.

사람들은 처참하게 죽은 취하도 마음이 아팠지만, 꼭 큰 병에 걸리기라도 한 듯 너무도 창백해진 사방화의 안색을 보고 더 놀랐다. 반 시진 전, 분명 그녀는 멀쩡히 본원으로 들어갔었지만 짧은 시간 극심히 허약해진 모습이었다. 다들 어리둥절해했지만 그 누구도 나서서 물어볼 순 없었다.

사방화는 취하를 이리저리 살펴보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독충술입니다.”

영친왕비가 깜짝 놀랐다.

“독충술이라고?”

“네, 서산 군영에서 죽은 범양 노씨 아들 사인과 같아요. 하지만 그때보다 정도가 더 심해 눈, 귀, 코, 입 모두에서 피를 토하며 처참히 죽은 겁니다.”

“대체 누가 독충술을 썼단 말이냐?”

영친왕비는 간담이 서늘해져 사방화의 손을 잡았지만, 그녀는 말이 없었다.

“서산 군영도 그렇지만 이 영친왕부에 누가 감히 독충술을 써 사람을 이리 처참이 죽인단 말이냐! 어서 왕야께 서둘러 왕부로 돌아오시라 전해라.”

희순도 끔찍한 광경에 안색이 창백해져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진호, 설영, 유 측비를 비롯해 모든 왕부 사람들 다 불러오도록 해라. 내 직접 호명할 테니 춘란 너는 왕부 모든 이들의 명부를 가져오너라.”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영친왕비의 분부에, 춘란도 천천히 사방화의 손을 놓고 밖으로 향했다.

이내 영친왕비가 사방화의 손을 잡아주었지만, 사방화는 영친왕비가 덜덜 떨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어머님, 걱정 마세요. 전 괜찮아요. 무섭지 않으니 마음 가라앉히셔요.”

영친왕비는 사방화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의자에 앉혀줬다.

“이 백주대낮에 그것도 영친왕부의 내 뜰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어찌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있겠니. 무서운 게 아니라 우리 왕부가 갑자기 안전하지 않다는 기분이 들어서 그런 것이다.”

사방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악행은 하루도 빠짐없이 일어납니다. 영친왕부뿐만 아니라 어디도 안전한 곳은 없지요.”

영친왕비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다른 생각에 젖어 말이 없어졌다.

* * *

잠시 후, 유 측비, 노설영, 시첩, 시녀, 하인들이 모두 본원에 모였다. 

유 측비와 노설영은 입구에서 마주쳤지만 무슨 일인지 몰라 동시에 고개를 젓다가 이내 문 앞에 싸늘히 죽은 취하의 시신을 보곤 깜짝 놀랐다.

유 측비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지만, 기마 실력이 있던 노설영은 어느 정도 담력이 있어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이내 유 측비는 노설영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왕비마마, 대체 무슨 일입니까?”

“왔는가? 들어와서 얘기하지.”

영친왕비가 두 사람을 불러들이자 그녀들은 취하를 건너 화당에 들어섰다. 

노설영은 유 측비를 앉혀준 뒤, 사방화를 보고 몹시 걱정스레 물었다.

“동서? 왜 그래요? 어찌 안색이…….”

영친왕비가 독을 탄 꽃에 사방화가 중독이 됐고, 춘란과 어찌된 일인지 얘기를 하던 중 취하가 밖에서 잔인하게 죽었다고 간단히 에둘러 얘기했다.

“심각한 겁니까? 태의는 부르셨나요?”

노설영이 물었다.

“방화 의술이 더 뛰어나니 부를 필요는 없단다. 하지만 원래도 몸이 좋지 않아서 더 심하게 독이 퍼지고 다친 것 같구나. 어느 악랄한 놈이 방화를 해치려 했던 건지 알 수가 없어!”

“관아 사람들은 부르셨나요? 대체 누가 감히 우리 왕부에서 사람을 해쳤는지 조사하게 만들어야지요.”

“왕야와 진호가 오면 다시 말해보자. 관아 사람들이 독충술에 대해 잘 알 거란 보장도 없으니 말이다.”

노설영도 영친왕비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사방화에게 말했다.

“동서, 상태가 정말 말이 아니에요. 어서 침상에 눕고 약이라도 드세요.”

“그래, 아가. 네 몸보다 중한 건 없으니 어서 처방전을 내다오.”

노설영과 영친왕비가 연이어 걱정을 표하자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설영은 급히 일어나 사방화가 불러주는 대로 처방전을 받아 적었다.

“시묵!”

사방화가 힘없이 시묵을 불렀다.

“네, 소왕비마마.”

시묵이 깜짝 놀라 서둘러 들어왔다.

“이 처방대로 약을 달여줘.”

영친왕비는 사방화가 시묵에게 처방전을 넘겨주는 걸 보곤 시묵이 충분히 믿을 만한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잠시 후, 희순이 다급히 들어왔다.

“왕비마마, 왕야와 진호 공자님께서 오고 계시다고 합니다.”

영친왕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명부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명부에 있는 이들을 호명해 빠짐없이 모두 왔는지 확인해봐라.”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희순이 서둘러 명부를 건네받았다.

* * *

영친왕부는 이 나라 최대의 황족 가문인지라 크기도, 일하는 사람의 숫자 또한 황실에 버금갈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방대했다. 그렇게 사람들을 다 확인하는 데는 무려 반 시진(*半時辰: 1시간)이 소요됐다.

희순은 다시 영친왕비에게 명부를 돌려주며 말했다.

“왕비마마께 아룁니다. 죽은 취하와 지금 왕부로 오고 계시는 왕야, 큰 공자님을 제외하곤 모두 모였습니다.”

영친왕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영친왕과 진호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그러다 본원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몰려있는 데다, 피를 흘리며 문어귀에 처참히 죽어있는 취하를 보고 안색이 돌변해 서둘러 방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오!”

영친왕이 들어오자마자 영친왕비를 찾았다.

영친왕비는 사방화가 다치고 취하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영친왕은 안색도 창백하고 입가엔 미처 닦지 못한 붉은 핏자국이 선연한 사방화를 보고 몹시 걱정스런 빛이 되었다.

“방화야, 심각한 일이냐?”

“아버님, 걱정 마세요. 괜찮습니다.”

사방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체 어떤 놈이 감히 백주대낮에 왕부에서 소왕비를 해치려 하고 사람을 죽였단 말이냐! 희순, 어서…….”

“황제폐하 납시오!”

영친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밖에서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영친왕은 멈칫하며 영친왕비를 바라보았다.

“황상께서 오셨다고?”

영친왕비는 사방화를 힐끗 보며 말했다.

“황상도 궁에 계시다 소식을 들었나봅니다. 어서 안으로 모시세요.”

영친왕은 진호, 유 측비, 노설영과 사람들을 데리고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하지만 사방화가 걱정됐던 영친왕비는 그녀와 함께 방에 남아있었다.

진옥은 직접 말을 타고 금위군 한 부대를 이끌고서 영친왕부로 왔다. 그리고 말에서 내릴 정신도 없이 그대로 부문을 들어서 안으로 달려갔다.

소천자가 헐레벌떡 그의 뒤를 따라 간신히 진옥이 왔음을 알렸지만, 진옥은 이미 내원으로 들어선 뒤라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영친왕과 사람들은 본원 대문에서 진옥을 맞이하려 나가다가, 말을 타고 질주해 달려오는 진옥의 모습에 일제히 다 넋을 잃었다.

그중, 진호가 가장 먼저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폐하…….”

유 측비, 노설영과 다른 사람들도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진옥은 정신없이 말에서 내려 서둘러 편히 하란 말을 전한 뒤 바로 영친왕에게 다가갔다.

“백부님! 계수는 좀 어떻습니까?”

영친왕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진옥은 평생 그 어떤 일에도 지금처럼 긴장한 기색을 보인 적은 없었다. 말을 타고 영친왕부로 들어온다는 것도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진옥은 지금 보통 사람도 아닌 이 나라 황제가 아니던가. 영친왕도 매우 놀랐지만,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괜찮다고는 했다만…….”

“지금 어디 있습니까?”

진옥은 금세 본원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 있소.”

영친왕이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갔다. 

진옥은 거의 달리듯 본원을 지나 화당으로 들어섰다. 

진호, 노설영, 유 측비는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서로 눈을 맞췄다.

수많은 사람들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방화가 진옥의 마음에 얼마나 거대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다들 확연히 느낀 순간이었다.

진옥은 사촌 형제 진강과 떠들썩하게 화해를 했지만, 사랑은 조금도 삭이질 못했다. 사방화가 아프다는 소식에 황제라는 자신의 신분도 잊고 거의 폭풍처럼 달려온 그였다.

사람들도 그제야 하나둘 정신을 차리곤 서둘러 안으로 뒤따라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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