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7화. 심혈을 폭발시키다 (1)
진강은 사방화를 안고 한참을 누워있다 겨우 무거운 걸음으로 떠났다.
사방화도 얼른 옷을 차려입고 창가로 가 마지막까지 진강의 뒷모습을 찾아 헤맸다. 그는 영친왕비에게 인사를 하러 본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 애틋한 연인이 제대로 평온하게 행복했던 나날은 얼마나 될까. 혼례를 올린 뒤의 단 며칠, 그리고 깊은 산에서의 열흘……. 제대로 기억하자면 선명히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짧았다.
남진에 곧 폭풍우가 들이닥칠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 나라에 이를 모르는 사람도 없었기에 다들 모두가 남진의 평화를 위해 조심스레 행동했다.
사방화와 진강은 엄청난 부귀영화를 거머쥐고 태어난 만큼 이 나라 명운에 대한 책임도 거대하게 지고 있었다. 또 두 연인은 자신들에게 얽힌 복잡한 운명까지 해결해야할 숙제가 무겁게 남아있었다.
사방화는 진강이 줄곧 암암리에 이 매족에 얽힌 운명을 깨트릴 방법을 찾으려 사력을 다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그가 그렇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사방화도 이젠 절대 포기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방화는 진강의 빈자리까지 아쉽게 쫓던 시선을 거두고, 잠시 생각을 하다 이내 바깥으로 크게 소리쳤다.
“시화!”
시화가 곧장 들어왔다.
“마마, 배고프시지요? 소왕야께서 아침 일찍 임칠에게 마마의 몸보신을 할 탕을 끓여두라 분부하셨습니다. 지금 데우고 있으니 금방 가져다드릴게요.”
사방화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으니 나중에 가져다줘. 다른 거 물어볼 게 있어서 불렀어.”
“예, 말씀하십시오.”
“운란 오라버니와 운계 오라버니의 행방은 좀 알았어?”
“아직요. 효양 공자님을 따라 도성 100리 까지 오신 분이 운계 공자님이란 건 알았지만, 여태 도성에 오시지도 않고 또 어디론가 사라지셨습니다.”
“정인화를 위해 정효양을 뒤쫓았다는 사람이 정말 운계 오라버니라고?”
“네.”
사방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100리 밖까지 오셨으면서 왜 돌아오시지 않는 거지?”
“잘 모르겠습니다. 조금 더 알아볼까요?”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화는 다시 밖으로 향했다.
그 후, 사방화가 세수를 하고나니 시화가 화당에 식사를 차렸다.
“마마! 소왕야께서 일어나시면 바로 식사하시게 준비하라 하셨습니다.”
사방화는 바로 방에서 화당으로 나왔다.
그녀가 막 젓가락을 집던 찰나, 누군가 달려와 말했다.
“소왕비마마, 금연 군주께서 마마를 뵈러 오셨습니다.”
사방화는 멈칫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낙매거로 모셔.”
* * *
얼마 뒤, 금연이 썩 좋지 못한 안색으로 나타났다.
“왜 그래요, 금연? 무슨 곤란한 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사방화가 바로 걱정스럽게 묻자, 금연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새언니랑 얘기하고 싶어온 거예요. 강이 오라버니는요? 내가 여기 오는 걸 싫어하진 않으시겠죠?”
“그럴 리가요. 지금은 또 본원에서 어머님을 뵙고 계시니 어서 들어와요.”
사방화가 웃으며 반겨주었다.
금연도 곧 화당에 차려진 상을 보곤, 문득 동그란 눈을 하고 물었다.
“응? 아직 식사 못 했어요?”
사방화는 미간을 문지르며 좀 멋쩍게 말했다.
“방금 일어났어요.”
금연은 눈을 깜빡이다 이내 깨달았다는 듯 히히, 웃었다.
“그래, 어제 강이 오라버니가 돌아오셨으니 피곤하실 만도 하지.”
“아직 혼인도 안한 낭자가 무슨 말이에요? 연람에게 물들었네, 아휴…….”
금연이 시원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맛있겠다! 나도 아직 안 먹었는데 같이 먹어도 돼요?”
사방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시화에게 다시 분부를 내렸다.
“시화! 그릇이랑 수저 좀 가져다줘.”
잠시 후, 금연이 요리를 한번 맛보고 감탄을 했다.
“와! 솜씨가 굉장한데요?”
“금연, 정효양이 지하 감옥에 갇혔다면서요?”
“네.”
사방화는 이제 진강이 정효양을 몰래 빼내 함께 떠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효양에 대한 금연의 마음을 살피려 일부러 그녀를 떠보았다.
“폐하께선 얼마나 가두시겠대요?”
“말씀 안 하셨어요.”
“지하 감옥은 보통 감옥 중에서도 가장 견디기 힘든 곳이라던데.”
한참 음식을 먹던 금연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새언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사방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고모님께서 기를 쓰고 아가씨와 효양 공자를 반대하셨는데도 끝끝내 혼인하겠다고 고집을 부리시더니 이젠 생각이 다 정리되신 거예요? 어제 정효순이 아가씨를 버리고 이여벽을 택해서 아가씨도 할 수 없이 정효양을 택하신 거잖아요. 근데 이제 지하 감옥에 갇혀버렸네요. 하지만 이제 그를 죽이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게 됐어요. 내가 아가씨 대신 처리해줄 수도 있어요.”
금연이 바로 눈을 부릅떴다.
“그 사람이 죽으면 난 과부로 수절할 거예요.”
“혼인 성지를 받았을 뿐이지 혼인하진 않았으니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렇게 하겠다고 약조했어요.”
사방화는 금연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금연, 꼭 혼인을 해야만 하는 건 아니에요. 정효순이 이여벽에게 구혼한다는 건 폐하의 중임을 받는 우상부를 이용하겠단 거예요. 형양 정씨 사람들의 뜻은 우선 조정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우상부와 혼인해 모든 걸 이루려는 거예요. 그러니 아가씨는 굳이 정효양과 혼인할 필요가 없어요.”
“우상 대인이 오늘 아침 조회에서 사직을 고하셨대요. 폐하께서도 윤허해주셨다고 했고요. 알고 있어요?”
사방화는 지난밤 진강과 우상부에 다녀온 것을 떠올리며 의아해했다.
“우상 대인께서 사직을 고하셨다고요? 벌써요?”
“네, 우상 대인은 사직하시고 목청 공자가 승상사직에 봉해져 우상부 주인도 바뀌게 됐어요. 목청 공자는 우상 대인보다 다루기 쉬운 분도 아니니 형양 정씨는 여벽을 만날 수 없을 거예요. 여벽도 여태 허락해주지 않았대요.”
사방화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상 대인이 사직하셨으니 형양 정씨는 더욱더 우상부를 놓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아가씨와는 정말 아무 상관이 없으니 다른 인연을 찾아도 돼요.”
금연도 고개를 저었다.
“오늘 아침, 옥이 오라버니가 아니라 정효양이라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생각보다 그렇게 싫지도 않았고요. 게다가 무능력해 보이는 것과는 달리 그야말로 형양 정씨와 황실 사이의 돌파구란 생각이 들었어요.
이미 결정된 혼사니 이대로 가야죠. 어제는 의지가 넘쳐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정말 생각을 바로잡았어요. 그가 목이 꺾인 나무라고 한다면 거기다 목매달고 죽으면 그만이에요.”
금연의 진지한 눈빛을 보니 그녀의 마음도 선명히 보였다. 그에 사방화는 금연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 선택이 맞을지도 몰라요. 정효양이 형양 정씨와 황실의 돌파구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요.”
“응? 이 뒤에 숨겨진 일을 더 알고 있는 거죠? 새언니가 나보다 혜안도 깊고 총명하시니 이렇게 새언니를 찾아온 거예요.”
금연이 말했다.
사방화는 진강과 정효양 일은 말해주지 않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었다. 큰일을 벌이기 전이니 어느 부분에서도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금연을 못 믿어서는 아니지만 정효양과의 혼약이 잡혀 있으니 형양 정씨 사람들이 언제 이 틈을 타 금연의 마음을 돌릴지 알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그렇게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될 일이거나 굳이 알아야만 하는 일이 아닌 것도 있어요. 정효양이 지하 감옥에 갇혔고 형양 정씨 사람들은 여벽의 마음을 얻으려 애쓰고 있으니 결과가 어떻게 되든 해결은 해야죠.
이 일이 해결되면 어쨌든 아가씨는 형양 정씨의 예비 며느리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조심에 또 조심을 기해야죠. 어느 날, 또 우연히 몰랐던 일을 한 번에 알게 되는 날이 있을 거니까요.”
금연은 처음엔 사방화의 말이 이해가지 않아 진지하게 눈만 깜빡이다가 나중에는 어느 정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형양 정씨가 날 이용할 수도 있단 말이죠?”
“계획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아가씨를 조종하려 들 수도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해둬야 해요.”
금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콧방귀를 뀌었다.
“응, 난 결코 그리 쉽게 끌려 다니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 후로 사방화와 금연은 말없이 식사를 이어갔다.
식사가 끝나고, 금연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때문에 어머니가 화가 많이 나셔서 이만 돌아가 봐야겠어요. 그래도 새언니랑 이야기를 나누니 마음이 좀 나아지네요. 이만 가볼게요.”
사방화는 금연을 배웅해준 후에 본원으로 향했다.
* * *
본원에선 영친왕비가 한창 화초를 가꾸고 있었다.
이내 영친왕비가 사방화를 발견하고 웃으며 손짓을 했다.
“방화야! 어서 이리 와보렴! 이 금옥란 좀 보거라. 어제 햇볕을 쬐게 해두었더니 금세 꽃봉오리가 맺혔구나.”
사방화도 웃으며 다가왔다.
“이 정도 꽃봉오리면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자란 건 아닌 것 같은데 어머님께서 그동안 관심 있게 안 보신 거 아니시고요?”
“아니야. 어제 화분을 옮길 때 똑똑히 봐뒀단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큰 꽃봉오리를 맺다니 좀 이상하구나.”
사방화 역시 화분을 한 번 더 살펴보며 말했다.
“어머님, 확실하신 거예요?”
“응, 그렇대도? 어제 춘란과도 이 꽃은 햇볕 쬐는 걸 가장 싫어하니 조금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고 말했었단다. 그렇지?”
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소왕비마마. 왕비마마와 소인이 특히나 따로 이 화분에 대해 말씀을 나눠서 소인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도 처음엔 내가 잘못 본 줄 알았잖니. 이리 오래도록 꽃을 키워오면서 이유를 모르겠는 건 처음이다.”
영친왕비의 말에 사방화도 의아해졌다.
“이 금옥란이 예전에도 이렇게 빨리 자란 적 있었나요?”
“아니, 항상 늦게 자랐지? 얼마나 연약한지 춥거나 더울까봐 내가 특별히 더 신경을 쓴단다.”
사방화는 꽃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더 이상 말이 없어졌다.
“됐다.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꾸나. 강이 그놈이 또 나가봐야 한다고 내게 널 잘 챙겨주라며 어찌나 신신당부를 하던지, 귀에 딱지가 다 앉겠더구나.”
영친왕비가 분위기를 환기시켜도, 사방화는 돌연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어머님, 이 화분 내실로 들여가 봐요. 제 생각이 맞는지 확인해보려고요.”
영친왕비는 어리둥절해하다, 직접 화분을 들고 춘란에게 분부했다.
“춘란, 아무도 못 들어오게 잘 지키고 있거라.”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사방화와 영친왕비는 내실로 들어오자마자 문을 꼭 닫고, 영친왕비는 화분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사방화는 곧장 화분으로 다가가 손톱으로 손가락을 힘껏 그었다. 그리곤 영친왕비가 말릴 새도 없이 뚝뚝 흐르는 피를 꽃봉오리 위에다 떨어뜨렸다. 그러자 꽃봉오리는 그녀의 피를 먹고 몸집을 배로 불렸다.
점점 커져가는 크기에 영친왕비는 입을 틀어막고 소리도 내지 못했다.
잠시 후, 사방화가 계속 피를 떨어뜨리자 꽃봉오리는 순식간에 만개를 하고 천천히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났다.
영친왕비의 표정은 이미 충격이란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녀는 피가 흐르는 사방화의 손을 붙잡고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방화야,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사방화는 피를 멈춘 뒤 화려하게 핀 꽃송이를 보며 이야기했다.
“어머님, 어머님도 매족의 세 가지 보물에 대해서 알고 계시지요? 만물을 살려낼 수 있는 피, 사람과 짐승의 마음을 조종하는 저주, 마지막으로 매족의 혼을 전승하는 성녀에 대해서요.”
“응, 알고 있지. 그럼……. 매족 사람이 너처럼 이 꽃에 피를 먹여 꽃봉오리를 피워내게 했단 말이니?”
“매족인의 혈맥은 만물을 살릴 수 있는 힘이 있어요. 아무나 가능한 게 아니라 왕실 일맥과 성녀 일맥의 후계자만이 가능한 겁니다. 한 대에 한두 명밖에 나오지 않아요.”
영친왕비가 순간 더 깜짝 놀랐다.
“그럼 너 말고 운란이 왕부에 왔다 갔다는 거니?”
“그렇게 따지면 운란 오라버니가 왕부에 다녀가셨다고 할 수도 있지만 매술을 익힌 자가 꽃을 피워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도 않아 확신할 순 없어요.”
“그럼 대체 운란이 맞단 거니, 아니란 거니? 정말 왔다간 게 사실이라면 왜 얼굴도 비추지 않고 그냥 가버린 걸까?”
사방화는 답하려던 순간 갑작스레 심장에 통증을 느껴 이내 가슴을 움켜잡았다. 그러나 심장에선 마치 망망대해를 건너는 것처럼 매우 울렁거리는 느낌이 일더니 일순 기혈이 솟구쳤고 사방화는 결국 한바탕 피를 쏟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