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6화. 차마 화를 낼 수 없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요.”
금연이 대장공주를 부축해주려 하자, 대장공주는 창백한 얼굴로 딸의 손을 뿌리치며 거세게 노려보았다.
“과연 내 훌륭한 딸이로구나! 그래, 역시 내 훌륭한 딸이야!”
금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좋다, 네 뜻에 따라주마. 만약 정효양이 지하 감옥에서 죽는다면 평생 홀로 살고, 살아나오면 혼인하든 말든 이제 다 네 마음대로 하거라!”
대장공주는 그대로 옷자락을 펄럭이며 뒤돌아섰다.
금연은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비틀거리며 떠나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도 매우 괴로웠다. 딸이라면 어머니가 밖에서 어떤 비난에 시달린다한들 따뜻하게 감싸주는 것이 옳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만큼 강한 방법이 아니면 도저히 어머니의 뜻을 꺾을 방법이 없었다.
그 시절, 대장공주는 북제에 시집가지 않겠다며 한사코 거부를 하였으나 다행히 충용후부 아가씨 사봉이 그녀의 짐을 모두 다 덜어주었었다.
어머니의 옛 이야기가 떠오르자 금연은 갑작스레 사방화가 보고 싶었다.
“금연아, 집에 돌아갈 생각이 없다면 이 외숙모와 담소나 나누다 가거라.”
태후는 그간 겉으로 티내진 않았지만, 평생 아들 진옥을 좋아했던 금연은 아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짝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근래 들어 금연의 갑작스런 변화들을 보고 있자니 평생의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금연은 어머니 대장공주보다도 훨씬 더 강하고 대의도 깊은 여인이었다. 그러나 하필 이 멋지고 아름다운 인재가 정효양이란 불구덩이에 뛰어들려하고 있으니……. 지켜보는 사람으로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물론 태후는 정효양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지만 그가 황성에 온지 단 이틀 만에 만든 역사들을 보자니 분명 보통 인물은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금연이 원하고 진옥이 성지를 내려준 데다 대장공주도 딸에게 백기를 들었으니, 이또한 어쩌면 인연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영친왕부로 가서 새언니를 만나야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이내 금연이 부드럽게 거절하자, 태후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금연이 떠나고, 태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태후마마, 어찌 한숨을 쉬십니까?”
여의가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황상은 대체 언제쯤 황후를 책립하실는지…….”
여의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사씨 육방 은희 아가씨께서 외롭게 늙을지라도 한평생 폐하를 기다린다고 하신 데에 폐하께서도 싫은 눈치를 보이신 건 아니지 않습니까? 나중에라도 은희 아가씨께 감동해 혼인하실지도 모르는 일 아닐까요?”
태후는 문득 사씨 육방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그러길 바란다. 근데 태황태비마마와 경이는 어떻게 됐느냐?”
여의가 다시 조심히 답했다.
“8황자마마께선 그날 이후로 서재에 틀어박히셔서 오늘 조회도 나오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폐하께서도 탓하지 않으셨고요. 태황태비마마께선 병으로 앓아누우시어 태의를 모셨다고 합니다.”
“태의는 뭐라고 하든? 심각하다니?”
“그동안 태황태비마마께선 8황자마마의 혼사로 무리를 하신 데다 영친왕부 연회에서 있었던 일까지 더해져 병이 나신 거라고 합니다. 심각하진 않아 궁에서 요양 중이라고 하셨습니다.”
태후는 또 긴 한숨을 내쉬었다.
“태황태비마마도 참 총명하셨다가 둔해지셨다가 하시는구나. 평생 경이를 키우셨으면서 은희를 좋아한단 걸 몰라보시곤 은향과 이어주려 하셨으니 앓아누우실 만도. 이젠 태황태비마마께서도 많이 노쇠해지셨으니……. 태의원으로 가 8황자궁에 몸보신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약재를 보내드리라 해라.”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여의는 한창 호응을 하다 서둘러 이동했고, 태후도 안으로 들어갔다.
* * *
오시(*午時: 아침 11시 ~ 오후 1시), 영친왕부 낙매거.
사방화는 태양도 늘어지게 기지개를 켤 때쯤에야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니 침상 머리맡에 기대 검은 친필 서신을 읽고 있는 진강이 보였다. 그의 곁엔 더 많은 흑색 책자 더미들이 아무렇게나 던져져있었다.
오후 햇살 아래 진강의 미모는 더욱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짙고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무언가를 읽고 있는 진강은, 그 자체로 화공이 평생을 다해 아주 정성껏 그려낸 어여쁜 걸작 같았다.
그러다 사방화는 자신이 이제껏 이리도 고단한 이유가 떠올랐다. 어젯밤의 여파로 그녀는 한낮에야 겨우 이렇게 눈을 떴지만 진강은 조금도 피곤한 기색 하나 보이질 않았다.
어젯밤 일이 떠오르자 사방화는 다시금 스물스물 분노가 차올랐다.
깊은 밤거리엔 누구도 없었고, 오직 두 사람만 아는 비밀이 되었지만 사방화는 하루가 지나도 부끄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결국 사방화는 조용히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가렸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진강은 곧바로 반응을 보였다. 시선을 돌리니, 이불속에 쏙 파묻힌 동그란 형체만 보였다. 진강은 살짝 눈을 깜빡이다가 금세 이유를 눈치 채곤 미소를 지으며 이불을 살포시 잡았다.
“방화, 이렇게 더운 날씨에 숨 막혀 죽으려는 것이오?”
이불 안에선 퉁명한 대답이 들렸다.
“네, 숨 막혀 죽을 거예요.”
진강은 픽, 웃으며 이불을 내렸다.
“아니, 내가 절대 그렇게 둘 순 없지.”
사방화는 재빨리 이불을 팩, 끌어올렸다.
“저리 가요!”
진강은 조금 더 엷은 웃음을 터뜨렸다.
“왜? 마음껏 자고 일어났는데도 아직 화가 안 풀렸소? 지금쯤이면 당연히 풀려있을 줄 알았는데.”
사방화는 오늘 결코 진강을 아는 척하지 않겠다던 다짐만 되새겼다.
그녀가 아무런 반응도 없자, 진강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안 나올 것이오?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다 됐소. 정말 한번 보지도 못하고 떠나야하오? 이번에 떠나면 한두 달은 지나야 될 것 같은데.”
사방화는 순간 깜짝 놀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한두 달? 형양 정씨 북제 정탐꾼들을 없애러 가는 것 아닌가? 정효양 때문에 다시 돌아왔으면서 벌써 정효양을 만나 다 해결했다고?’
“농담 아니고 진짜요. 정말 떠나야 하오.”
‘흥! 갈 테면 가라지! 누가 붙잡는다고!’
사방화는 이불 안에서 계속 거센 투쟁을 하고 있었다.
진강도 한참 기다려도 사방화가 아무 말이 없자, 목소리가 더 처연해졌다.
“그래, 어제는 내가 다 잘못했소. 당신이 화난 것도 충분히 다 이해하오. 하지만 어제는 정말 당신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소…….”
“아직도 말씀하실 게 남았다 이거죠?”
“알겠소, 알겠소. 아무 말도 안하겠습니다, 소왕비마마. 그냥 난 당신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하려던 건데 내가 보기 싫어 당신만 그리 힘들게 이불을 덮어쓰고 있으니 걱정돼 그랬지. 이제 곧 갈 테니 편히 있으시오, 응?”
동그란 이불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진강은 할 수 없이 물건을 다 챙겨 침상을 내려와 창밖으로 소리쳤다.
“청암!”
“예! 소왕야.”
청암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지하 감옥 열쇠를 들고 황궁에 가 정효양을 데려오너라. 이제 도성을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이내 진강은 동그란 이불에 대고 다정히 이야기했다.
“방화, 내가 없더라도 부디 몸조심하고 건강해야하오.”
곧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사방화는 그제야 이불을 걷고 분통을 터뜨리듯 소리쳤다.
“진강! 잠깐만요!”
진강도 이제야 안심한 듯 미소 지으며 뒤를 돌았다.
“당신도 날 그냥 보내긴 아쉬운 거지요?”
사방화는 말없이 진강을 노려보기만 했다.
곧 진강은 침상으로 돌아와 사방화를 안고 입을 맞췄다.
정말 제대로 화를 낼 수도 없게 하는 사람이었다. 거기다 이번에 떠나면 무려 한두 달을 못 본다는데 이 아까운 시간에 화만 낼 수 있겠는가. 사방화는 진강이 너무나도 얄미워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콩콩, 쳤다.
진강도 사방화를 천천히 놓고 뜨거운 눈빛을 일렁이며 이야기했다.
“벌써부터 당신이 그리운데 어떡하면 좋지?”
사방화는 말없이 진강의 가슴을 콩, 때렸다. 하지만 너무도 연약해져버린 그녀의 힘을 느끼자 진강의 눈빛도 금세 안타까움으로 물들어버렸다.
“그래, 그래. 미안하오. 내가 다 미안하오.”
사방화도 섭섭한 눈망울로 진강을 바라보다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떠나시는 건가요? 형양 정씨와 북제 정탐꾼 때문이지요?”
“응, 내가 아니면 이 일을 해결할 사람도 없으니.”
“정효양과 만나셨어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한번 만난 적 있었소. 이번에 도성으로 온 건 형양 정씨가 더 이상 나라를 팔아 추악한 일을 저지르지 않길 바란다더군. 그리고 형양 정씨도 이제 나라에 공명정대하게 우뚝 솟은 훌륭한 가문이 되고 싶다고 했소. 그래서 효양과 협상을 맺었고, 이제 나를 도와 여태 형양 정씨가 북제에 심어둔 정탐꾼들을 제거하고 가문의 역사를 새로 쓰겠다고 했소.”
사방화는 잠시 경탄하며 말했다.
“몇 대째 우둔하고 미련하기만 했던 형양 정씨에서 정효양 같은 사람이 나올 줄은 몰랐네요.”
“나도 뜻밖이었어.”
“근데 어제 한바탕 그 난리를 치고 대장공주부 예비 사위까지 됐는데 모든 시선이 그 사람에게 쏠려 있잖아요. 당신이 데리고 나가신다면 형양 정씨 사람들에게 곧장 들키지 않을까요?”
진강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정효양이 사관에 봉해졌다는 소식과 갑작스레 기방에 들어 대장공주를 화나게 만들고 진옥이 결국 그를 지하 감옥에 가뒀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사방화는 금세 크게 깨닫고 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예사롭지 않네요. 사람들 시선을 벗어나기엔 그 방법보다 더 좋은 건 없죠. 형양 정씨 사람들도 결코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소.”
사방화는 이내 진강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저도 같이 갈래요.”
진강이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
“왜요?”
“아직 당신 몸도 덜 나았잖소. 절대 이리저리 뛰어다녀선 안 돼. 왕부에 남아 제때 꼭 약 챙겨먹고 몸조리 잘하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에게 흐르는 그 매족의 피가 언제든 우리 둘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단 걸 기억해요. 내가 방법을 찾기 전까지 당신은 조금도, 털끝 하나도 다쳐선 안 돼.”
사방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한두 달은 너무 긴걸요…….”
진강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피었다. 사방화는 자신에게 진심으로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전생에 그 피바다 속에 한을 품고 죽어갔던 그녀는 이번 생에도 여전히 자신을 사랑해주고 있었다.
이렇게나 깊고 짙은 그녀의 사랑을 받고 있다니……. 자신은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복을 다 가지다못해 터지고 넘쳐흐를 정도로 받은 놈이었다.
진강은 애틋한 눈망울을 일렁이며 사방화를 꼭 끌어안았다.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 최대한 빨리 해결하고 돌아올지도 모르오.”
사방화도 진강의 허리를 더 꼭 끌어안고 말했다.
“네, 대신 조심해야 해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진강은 다시 사방화에게 입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