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5화. 그가 아니면 혼인하지 않겠어요 (2)
곧 금연, 정효양, 소천자 모두 어서재에 다다랐다.
“폐하! 금연 군주와 효양 공자님께서 오셨습니다.”
소천자가 조심스레 아뢰었다.
“들라 하라.”
진옥의 목소리는 역시나 어두웠다.
금연은 정효양을 힐끗 올려다봤지만, 그는 어제 우상부에 그 파문을 일으켰을 때와 별다를 것도 없어보였다. 얼굴에 두려운 기색하나 보이지 않는 정효양을 보고, 금연도 그와 손을 맞잡고 어서재로 들어섰다.
진옥은 상소가 무더기로 쌓인 옥안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대장공주는 진옥의 옥안과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다가, 금연과 정효양이 손을 잡고 들어오는 것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벌떡 일어났다.
“연아! 저놈과 네가 어찌……, 어찌 감히……!”
금연은 어머니를 외면한 채 우선 진옥에게 공손히 인사했지만, 진옥은 두 사람을 쳐다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이내 금연이 화가 나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대장공주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어쨌든 공자님과 전 혼인 성지를 받았습니다. 아무리 사람 같지 않다고 해도 천천히 가르치면 괜찮아질 테니 그만 화내세요. 몸 상하세요.”
“성지 하나로 저놈의 보호자가 됐다 이 말이냐? 아주 무법천지가 따로 없구나. 폐하께 혼사를 취소해 달라 청할 것이다.”
금연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더 굳건한 태도로 말했다.
“전 동의할 수 없습니다.”
“연아! 너 정말 미쳤니? 홍수루에서 저놈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봐놓고도 아직 혼인하겠다 말이 나와? 정말 날 죽일 셈이지?”
대장공주가 격노해 소리쳤다.
“어머니, 이렇게 화내실 필요 있으십니까?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듯 공자님을 택한 건 제 선택이니 앞으로 어떻게 되든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네가 후회하지 않으면 그걸로 된다는 거냐? 어미 마음이 어떤지 조금이라도 생각해보긴 했니? 평생을 애지중지 키워온 내 딸을 어찌 저런 놈에게! 어느 어미가 자식 인생이 망가지는 꼴을 봐! 이 파렴치한 놈 같으니! 어서 그 손 놓지 못해! 감히 누구 손을!”
대장공주가 가까이 다가와 정효양을 때리려 손을 들었다. 그러자 금연이 얼른 그의 앞을 가로막고 보호했다.
“어머니,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전 분명히 결심했습니다. 어머니께서 동의하지 않으신다고 자식을 계속 이리 괴롭게 하실 건가요?”
대장공주는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는 단호한 딸의 눈빛과 진지함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이 껄렁껄렁하게 서 있는 정효양을 노려보다 진옥을 돌아보았다.
“폐하! 그래요, 혼사를 취소해주시진 않으셔도 된다만 저 몹쓸 자식을 결코 용서해주시면 아니 됩니다!”
진옥이 고개를 끄덕인 후, 붓을 들고 정효양에게 말했다.
“효양, 짐이 그대를 사관으로 봉하자마자 대장공주마마와 어사대 사람들을 불러오게 만들었구나. 짐이 그대를 어찌 벌해야 짐의 고모님 화를 풀어드릴 수 있을지 직접 한번 말해 보거라. 어사대 관리들도 짐을 명군이라 생각할만한 그런 방법이었으면 한다.”
정효양은 눈썹을 치켜세우다 갑작스레 금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저와 군주를 작고 어두운 방에 한 반년 간 가둬주십시오. 그곳에서 오래도록 반성하고 있겠습니다.”
“저 썩을 놈!”
대장공주가 다시 격노했다.
진옥은 대장공주를 눈빛으로 다독인 뒤, 다시 금연을 바라보았다.
“금연, 넌 어찌 생각하느냐?”
“가정사보단 당연히 나라가 우선입니다. 사관이 홍수루에 간 것은 덕행에 먹칠한 것이나 마찬가지니 폐하께서 어찌 처벌하셔도 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나는 지금 네 생각을 묻고 있는 것이다.”
금연은 진지한 진옥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세상 사내들은 본래 당연하게끔 풍류를 즐기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라 저도 딱히 별 생각은 없습니다.”
“너 지금 그게 무슨 말이냐!”
대장공주는 정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했다.
“제 생각은 이러하니 폐하께서 결정하여 주시옵소서. 아직 혼인하진 않았지만, 정혼한 사이니 공자님과 함께 벌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불구덩이를 자처하는 것을 어찌 보고만 있겠는가. 결국 새카맣게 타들어가는 가슴을 주체 못한 대장공주는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어머니!”
금연이 서둘러 대장공주를 일으켜 세우며 애타게 소리쳤다.
진옥도 시급히 일어나 대장공주의 맥을 짚어보곤 금연에게 말했다.
“화가 치밀어 잠시 정신을 잃은 것이니 큰일은 아니다. 여봐라! 어서 고모님을 태후궁으로 모시고 태의를 부르도록 하라!”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소천자와 사람들이 달려와 서둘러 대장공주를 안아들었다.
금연은 진옥과 대장공주를 번갈아보며 어쩔 줄 몰라했다.
“금연, 어머님이 걱정되면 같이 가 봐도 된다.”
진옥의 말에, 금연은 정효양을 힐끗 돌아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폐하께서 괜찮다고 하시니 어머니께서도 괜찮으실 것입니다. 깨어나셔도 절 보는 걸 원치 않으실 거예요.”
정효양은 피식, 엷은 웃음을 지었다.
“내가 폐하께 엄벌을 받을까 걱정돼 그러는 것이지요? 군주가 있어 참으로 든든하군요.”
금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정효양은 진옥을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 무른 칼이 더 괴로운 법이니 단칼에 끝내는 벌을 내려주십시오.”
진옥이 서서히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 네가 그토록 검은 방에 갇히길 원한다니 그 소원을 들어줘야지. 여봐라! 정효양을 하옥시키고 반성할 수 있도록 해라!”
“응? 군주은요?”
정효양의 물음에 진옥은 아무 답이 없었다.
밖에선 금위군이 들어와 정효양을 즉시 호송해갔고, 금연은 다급한 눈빛으로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폐하, 저…….”
“목숨을 앗진 않을 것이니 염려마라.”
밖에선 정효양이 끌려가는 그 순간까지도 당당히 소리치고 있었다.
“폐하! 군주를 보내주시지 않으실 거면 미인 둘은 함께 보내주셔야지요! 좋은 술과 안주도…….”
정효양의 목소리가 점점 옅어지고, 어사대 사람들은 연달아 탄식을 했다.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은 보통 감옥보다 훨씬 무서웠다. 해가 들지 않는 건 고사하고, 습하고 음산해 정신도 멍해지기 일쑤였다. 정효양이 과연 그 좁은 공간을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보통은 사흘도 버틸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진옥이 정효양의 관직도 폐지하지 않고 감옥에다 가두기만 한 것을 보니 그냥 금연을 위해 그의 성질머리를 다스리도록 할 요량인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역시도 무거운 형벌이었다.
정효양이 감옥으로 끌려갔으니 어사대 관원들도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일제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진옥은 관원들을 보내고, 금연을 보며 다시 진지하게 말했다.
“금연, 성지는 지금이라도 거둬줄 수 있다. 정말 후회하지 않느냐?”
금연은 다시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선황폐하께서 강이 오라버니와 새언니에게 여러 번 혼사를 반복하셨던 게 역사에 다 기록되지 않았습니까? 전 폐하께서 그렇게 두 번 다시 가벼운 제왕의 길을 걸으시지 않길 바랍니다. 폐하, 전 절대 후회하지 않습니다. 효양 공자님이 아니면 혼인도 하지 않을 겁니다. 효양 공자님이 죽는다고 해도 전 평생 누구와도 혼인하지 않을 거예요.”
금연은 인사를 올린 뒤 당당히 돌아섰다.
그녀가 떠난 후 문이 닫히자, 진옥은 담담히 미소를 짓다 다시 계속해서 상소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서재를 나온 금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효양이 끌려가니 바깥도 잠잠했다. 금연은 그렇게 잠시 제자리에 서 있다가 태후궁으로 발길을 옮겼다.
* * *
태후궁.
태후는 이 태후궁으로 실려 온 대장공주를 보고 깜짝 놀라 이유를 묻곤 어서 태의를 데려오라 분부했다.
잠시 후 태의가 대장공주의 맥을 짚어보곤 태후에게 공손히 아뢰었다.
“대장공주마마께선 화가 치밀어 잠시 쓰러지신 것뿐 큰 문제는 없습니다.”
“약이 필요한가?”
태후의 물음에 태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신의 소견으론 약 처방은 필요 없을 듯합니다. 침을 하나 놓아드리면 금방 깨어나실 겁니다.”
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서 놓아다오.”
태의가 금침을 놓자, 대장공주가 정말로 천천히 깨어났다.
“정말 깨어났군!”
태후가 기뻐하며 다가왔다.
대장공주는 눈을 뜨고 천천히 시선을 돌리다 이곳이 태후궁인 것을 깨닫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이는요? 정효양은 어떻게 됐습니까? 얼마나 잔거예요?”
태후도 어머니였기에 대장공주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얼마 안 됐으니 편히 계시오. 금연과 효양은 아직 황상과 있을 것이오.”
“폐하께선 대체 그 썩을 놈을 어떻게 하셨답니까?”
태후가 천천히 고개를 젓자, 대장공주는 곧장 바깥으로 향하려했다.
“안 됩니다! 제가 없으면 연이가 계속 정효양을 감싸고 돌 테니 지금 바로 어서재로 가야합니다. 폐하께서 그놈을 용서해 주실 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태후는 곧바로 대장공주의 팔을 붙잡았다.
“쓰러졌다가 이제 깨어났소! 좀 쉬어야지, 진정하세요.”
“제가 어찌 진정할 수 있겠습니까!”
대장공주는 결국 태후에게 잡힌 팔을 빼내고 밖으로 나갔다.
태후도 할 수 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나서는데, 마침 금연이 나타났다.
대장공주는 바로 자리에 서서 다급하게 물었다.
“폐하께선 정효양을 어떻게 처벌하셨느냐?”
대장공주는 꼭 진옥이 정효양을 죽이란 명을 내리길 간절히 바라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 어머니를 보자 금연도 짙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지하 감옥에다 가두셨습니다.”
지하 감옥은 감옥 중에서도 가장 무섭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그에 대장공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금 확인했다.
“정말?”
“네, 조정 사관이 돼서 벌건 대낮에 기방을 드나들며 사관 품행에 먹칠을 한데다 어머니께서 어사대 대인들까지 모셔왔는데 어찌 그냥 두시겠어요?”
금연이 담담히 말했다.
대장공주는 무표정한 딸의 안색을 살피며 보다 따뜻한 어투로 말했다.
“연아, 그놈이 어떤 놈인데 감히 네 짝이 될 수 있겠니? 폐하께서 그놈을 지하 감옥에다 가두신 건 참 현명하시지만, 그놈도 그 낯짝으로 그런 행동을 하면서 어찌될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을 리는 없을 거다. 마땅한 벌을 받은 것이니 그놈 때문에 마음 아파할 필요는 없어.”
금연은 또 담담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자님 때문에 마음 아파할 일은 없습니다.”
대장공주가 순간 기뻐하며 말했다.
“이제 제대로 깨달은 거니? 폐하께 혼사를 취소해달라고 청한 거야?”
“아니요, 공자님이 감옥에서 죽게 된다면 전 평생 과부로 살아갈 겁니다.”
금연의 차분한 목소리를 끝으로, 대장공주의 안색이 다시금 돌변했다.
“정말 너 미쳤구나? 대체 그놈이 뭐가 좋다는 거냐!”
“온 세상이 공자님을 비난한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냥 가장 적당한 때에 제가 선택한 사람일 뿐입니다.”
대장공주는 극심한 분노에 이젠 말도 이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금연은 그런 대장공주를 바라보며 고요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어머니, 당시 어머니께선 북제로 시집가셔야 할 책임을 지고 있으셨지만, 충용후부 사봉 아가씨께서 어머니의 책임을 대신하셨지요. 그리고 어머니께선 아버지를 택하셨지만, 안타깝게도 일찍이 어머니 곁을 떠나셨습니다. 남진 황실엔 공주마마들은 2번 혼인할 수 없다는 규율이 있지요. 그래서 어머니께선 여태 행복하셨습니까?”
돌연 대장공주의 안색이 굳어졌다.
“창창한 나이에 홀로 되셨지만 그 삶을 후회하신 적 있으십니까? 물론 어머니께 감히 대놓고 말하는 이들은 없었겠지만 뒤에선 역시 사봉 아가씨는 총명하시고 패기도 넘치셔서 나라와 대의를 위한다는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어머니께는 이 나라 황실의 공주마마이심에도 이기적으로 황실의 부귀영화만을 누리고 정작 나라를 위해선 아무것도 한 게 없으시다는 소리만 따라다녔었지요. 저도 아는 걸 어머니께서도 모르실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께선 어머니 삶을 후회하신 적 없으시겠지만 저라면 후회할 것 같습니다.”
“너……, 지금 그게 딸이 어미에게 할 소리니?”
대장공주는 충격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머니 마음을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당시 어머니께서도 북제로 가시는 것보다 고향에서 편하게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시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 택하신 길이셨겠지요.
하지만 불행히도 아버지와 세상과의 인연이 짧아 평생 어머니 홀로 지내게 되실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를 보면 세상일은 그때그때 딱 단정할 수도 없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어머니, 이건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가 한 선택입니다. 효양 공자님이 지독히도 나쁜 사람이라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간다고 해도 제가 한 선택이니 저 스스로 다 감당할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그러셨던 것처럼요.”
대장공주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지만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