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2화. 작별을 고하는 노신 (2)
곧 남진 도성 전역에 우상의 사직과 정효양이 사관에 봉해졌다는 소식이 퍼졌다. 엄청난 소식에 거리 곳곳이 떠들썩했다.
우상의 갑작스러운 사직도 아주 큰 풍랑을 일으켰지만, 정효양의 소식도 큰 충격을 안겼다. 정효양은 도성에 오자마자 우상부 마차를 들이받고, 결국 이여벽까지 다치게 했다.
형 정효순이 나서서 아우의 죄를 대신하려했지만, 정효양은 외려 더 얻은 것이 많았다. 무려 대장공주부의 군주 금연과 혼인하게 된 데다 오늘은 또 진옥이 직접 사관에 봉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사관은 물론 작은 관직이었지만, 남진 건국 이래 사관의 위치는 아주 높았다. 일반적으로 당시 유교 가문의 덕과 재능을 겸비한 자가 역사와 전기 편찬을 맡았기에 단 한 번도 정효양처럼 무능하고 배우지 못한 자가 사관의 자리에 오른 적은 없었다.
도성에 발을 들인 첫날부터 큰 사고를 쳤던 그가 다음날 관직에 봉해졌다는 것은 참으로 보기 드문 신선한 일이었다. 한날한시에 벌어진 이 엄청난 일들은 모두의 도마 위에 올라 사람들의 여러 추측을 샀다.
* * *
우상부.
우상 부인은 우상의 사직 소식을 전혀 몰랐던 터라 시녀에게서 소식을 듣자마자 거의 침상을 뛰어내려왔다.
“뭐라고? 그게 정말이냐? 나리께서 정말 사직하셨다고?”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인이 알아본 바로는 사실이라 합니다. 조회에서 사직을 청하셨고 폐하께서도 윤허하셨답니다. 벌써 바깥에 소문도 파다하니 사실일 것입니다.”
우상 부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넋을 잃었다.
“나리께서 어찌……. 조정에 아직 몇 년은 더 계실 수 있는 분께서 설마 어제 나 때문에……, 폐하께서 나리를 탓하신 것인가…….”
시녀도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었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서 옷을 가져오너라.”
시녀는 곧장 우상 부인에게 옷을 입혀줬다.
우상 부인은 그렇게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로 서둘러 본원을 나갔다. 그런데 대문에 다다르니 마침 우상이 마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나리…….”
“누워 쉬고 있지 몸도 안 좋으면서 왜 나온 것이오?”
우상은 어제의 화가 전부 다 풀린 듯 목소리가 무척 따뜻했다.
우상 부인은 눈시울을 붉히며 물었다.
“어찌 갑작스레 사직하신 겁니까? 설마 저 때문에…….”
“당신 때문이 아니요. 선황폐하께서 승하하신 뒤로 나날이 무력해지는 걸 느껴 더 이상 조정 일로 시름할 수 없어 사직한 것이오.”
우상 부인은 사직을 인정하는 우상의 말에 큰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말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자리를 잡고 물러나지 않으면 청이가 어찌 내 직위를 대신하겠소?”
하지만 뜻밖의 말이 이어지고, 우상 부인은 돌연 눈을 반짝였다.
“그 뜻은…….”
우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폐하께서 청이를 승상사직으로 봉해 수중에 있던 일을 모두 연석에게 넘기고 좌상을 도와 참정할 수 있게 해주셨소.”
우상 부인이 크게 기뻐했다.
“그러면 폐하께서 청이를……, 우리 우상부는 계속 재상 가업을 이어갈 수 있다는 뜻이군요!”
우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청이 실력에서 비롯된 것이지. 남진 어디를 둘러봐도 우리 청이보다 더 적절한 이를 찾을 순 없을 것이오.”
창백했던 우상 부인의 안색도 안정을 찾았다.
“나리, 그럼 우린…….”
“벽이 일이 해결되면 충용후부 노후야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밖으로 나가 세상 구경 좀 합시다. 당신도 나 때문에 이 도성에만 갇혀있었으니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이여벽 이야기가 나오자, 우상 부인의 안색이 다시 또 어두워졌다.
“벽이가 어떻게 해야 잘되는 걸까요…….”
“청이에게 맡깁시다. 당신과 나도 늙었으니 이제 벽이가 기댈 곳은 오라버니뿐이오. 그러니 당신도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게.”
이목청은 사방화를 연모했지만 단 한 번도 그 일로 속을 썩인 적이 없었다. 사랑의 고통마저 홀로 다 삭여낸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은 또 훌륭한 성장을 거듭해 어머니 우상 부인도 듬직하게 위로해줬었다.
우상 부인도 어제 그 아들의 위로를 떠올리며 차분하게 말했다.
“어젠 너무 흥분해서 나리께 걱정을 끼쳐드린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나리와 청이의 말을 잘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모든 건 다 하늘의 뜻인 것이오. 복이 있는 것도, 복이 없는 것도 다 각자의 팔자고 운명인 것을.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일이오.”
우상도 부인이 드디어 생각을 바꿨다는 것에 기뻐하며 들어가 얘기하자는 손짓을 했다. 우상 부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우상과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 * *
한편, 우상부의 한 공간에서도 오늘 일에 매우 놀란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우상부 내에 머물고 있는 형양 정씨 가족, 정일과 정성이었다.
이들 모두 진옥이 우상의 갑작스러운 사직을 받아줄 것이라곤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이제 우상부의 가장은 이목청이 됐지만, 그는 결코 이 형양 정씨 가족에게 별다른 호감을 보이지 않았다.
정효순이 내내 이여벽에게 구혼을 청해도 냉소만 지을 뿐, 형양 정씨를 탐탁지 않아하며 이들에게 결코 빚을 지려 하지도 않았다.
정일과 정성은 순간적으로 말이 없어졌다.
더 불안한 건 따로 있었다. 정효양은 도성으로 들어오자마자 엄청난 사고를 치고서도 금연과의 혼인을 허락받았다. 하지만 진옥은 정효양을 벌하기는커녕 사관으로 봉해주기까지 했다. 진옥과 정효양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
정일, 정성은 당장이라도 이여벽 방 앞을 지키고 있는 정효순을 내버려두고 정효양을 찾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어 답답함에 울상만 지었다. 이들은 만전의 계획을 갖고 도성을 찾았지만 흘러가는 상황이 당혹스러웠다.
어제 정효양이 사고를 친 것으로만 봐선 일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지진 않았지만, 우상의 사직과 정효양이 사관으로 봉해짐으로써 엄청난 변화에 봉착한 것이었다. 이미 생각한 계획과는 크게 빗나가고 있었다.
두 사건이 일으킨 큰 변화들로 계획은 다시 처음부터 짜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화가 난 정일은 조카 정성에게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네 잘난 아들놈이 줄곧 형양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엔 내 아무 말도 않았다만 어찌 경성에 와서 이 지경으로까지 일을 그르칠 수 있단 말이냐!”
정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숙부님께서도 효양 성격을 잘 아시잖습니까. 어릴 적부터 버릇없이 자라 멋대로 하게 둬서 이제 저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어찌 저렇게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행동하는 건지……. 숙부님, 이제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정일은 콧방귀를 뀌었다.
“더 방법이 있겠느냐! 효순이 이틀 내로 이 아가씨와 혼인하지 못한다면 죽상을 하고 형양으로 돌아갈 수밖에.”
“하지만 우리 일은……. 우상 대인께서 관직에서 내려오셨으니 이 아가씨 신분은 이제…….”
정성의 말이 끊어지고, 정일이 그를 노려보며 호통 쳤다.
“폐하께서 내리셨던 뜻을 잊은 것이냐? 우상 대인께서 물러난 자리를 아들 이 공자가 맡게 됐잖느냐. 이 아가씨는 이 공자의 친동생이고. 어떻게든 상관할 필요는 없다.”
“그럼 효순에게 달렸군요.”
“아무 의미도 없이 꿇어앉아만 있지 말고 다른 방법을 써보라 전해라. 혼인 허락 하나 받는 것을 뭐 그리 어려워하는 것이냐?”
정성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형양 정씨 가족들이 도성으로 온 단 이틀 만에 엄청난 일들이 파도처럼 쏟아졌다. 금연과 정효양의 정혼, 아우의 죄를 대신하려 이여벽에게 구혼하고 있는 정효순, 사직을 고한 우상, 사관으로 봉해진 정효양까지…….
그야말로 쉼 없이 밀려드는 일들에, 백성들도 수다를 떠느라 몹시 바빴다.
한편, 정효양이 영친왕부를 나섰던 그 무렵. 동녘 하늘은 이미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상점들은 아직 굳게 문을 닫고 있어 딱히 구경할 것도 없었으나 정효양은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것만으로도 매우 즐거워했다.
곧 하늘에 태양이 드높게 떠오르고, 사람들의 왕래도 잦아지며 마차들도 정신없이 지나다니기 시작했다. 그 밝은 세상에서 사람들은 우상의 사직 소식과 함께 정효양이 사관에 봉해졌다는 이야기를 떠들어댔지만, 정효양은 여전히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거리를 한가로이 거닐고 다녔다.
도성 큰 거리를 다 구경한 후엔, 작은 골목길도 돌아보았다.
영친왕부의 하인은 다리가 저려오기 시작했지만 신난 정효양을 감히 말릴 수는 없어 잠자코 그의 뒤만 따랐다.
혹시 정효양 다리는 무쇠로 만들어졌나? 같은 사람인데 어찌 저렇게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이 드넓은 거리를 다 돌아보겠단 패기를 보이는 거지?
그렇게 정오가 되고, 하인은 결국 인내심에 한계가 와 울상으로 호소했다.
“공자님, 정오가 다 됐는데 이제 돌아가시지요. 소인 더는 못 걷겠습니다.”
정효양은 그제야 자신의 뒤에 누군가 따라오고 있었다는 게 떠오른 듯 몹시 미안한 얼굴로 뒤를 돌았다.
“아, 많이 지쳤느냐?”
하인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리에 감각이 없습니다.”
“어찌 이제야 말하는 것이냐?”
정효양의 말에, 하인은 울상이 된 얼굴로 이야기했다.
“신나서 구경하시는데 방해가 될까봐서요.”
“과연 영친왕부는 영친왕부군.”
하인은 정효양의 말뜻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그저 돌아가면 제발 다른 사람에게 정효양을 모시게 해달라고 부탁하겠단 결심만 커졌다.
그때, 정효양이 바닥에 앉아 하인에게 등을 내보였다.
“업혀라, 내가 업어줄게.”
하인은 순간 깜짝 놀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예? 공자님! 괜찮습니다. 다리를 못 쓰게 되더라도 공자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제발 이 미천한 소인의 명줄을 끊지 말아 주십시오.”
“내가 무슨 네 명줄을 끊는단 말이냐? 나는 걸을 수 있으니 못 걷는 널 업고 가겠단 뜻이다. 다른 뜻은 없어.”
하인은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됩니다! 감히 공자님에게 업힐 순 없습니다!”
“왕비마마께는 비밀로 할 테니 걱정마라. 알게 되신다 하더라도 내가 원해서 했다고 말씀드리면 돼. 절대 널 탓하지 않으실 거다.”
하인은 거의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
“공자님,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이 미천한 놈이 어찌 감히 공자님께 업힐 수 있겠습니까? 공자님께선 영친왕부의 귀한 손님이십니다.”
“거 참 쓸데없는 말 좀 그만해라!”
정효양은 바람을 안 듯 손쉽게 하인을 업고 계속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공자님! 제발 내려주십시오!”
깜짝 놀란 하인이 급히 소리를 빽, 질렀다.
“한 번만 더 그 입 열면 바로 떨어트려 버릴 거다?”
하인은 바로 침묵했지만 차라리 이대로 기절해버리길 간절히 소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