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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1화 (831/978)

831화. 작별을 고하는 노신 (1) 

황궁, 금란전.

진옥이 먼저 상석에 앉자 문무백관들은 일제히 절을 올렸다. 

진옥은 손을 내저으며 모두에게 고할 것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우상이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큰 소리로 말했다.

“폐하! 소신은 이제 너무 나이가 든 데다 가정사로 인해 더 힘에 부칩니다. 소신에게 사직을 명해주시고 고향으로 내려갈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우상의 말에 대신들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현재 조정은 한창 사람을 써야할 시기였다. 변경은 잠시 조용해졌으나 나라에선 군량미와 전쟁을 준비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이런 시기에, 사전에 한마디도 없이 문무백관의 수장 자리에서 내려오겠다니. 특히 좌상, 영강후를 비롯한 가까운 대신들도, 영친왕도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진옥 역시 몹시 얼떨떨해하며 물었다.

“짐이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우상, 어찌 갑자기 사직하시겠다는 건가?”

“폐하께 아룁니다. 소신의 가정사로 더는 힘에 부쳐 물러가려 합니다.”

그러자 영친왕이 곧장 우상의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우상, 깊이 생각하셔야 하네. 우상은 문무백관의 수장 아니신가. 사직은 그리 함부로 얘기해선 안 되는 것일세. 누구나 가정사는 다 있지 않는가? 최근 우상부에 일어난 일은 일도 아니라네.”

우상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정사뿐만 아니라 근래 들어 조정에서도 아무 쓸모가 없다 느껴지니 사직하는 게 낫다고 보는 것입니다.”

“자네가 쓸모없다면 우리 늙은이들도 전부 쓸모없는 것 아니겠는가!”

“심사숙고해 결정한 것이니 왕야께서도 그만 말씀하시지요.”

영친왕은 어안이 벙벙해 진옥을 바라보았고, 이번엔 진옥이 다시 질문했다.

“우상, 지금은 조정에 사람을 써야할 시기네. 우상을 대신할 자가 있는가?”

우상은 잠시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친족을 허용하니 아들놈의 재주로 소신의 자리를 대신할 순 있겠으나 아직 수련이 필요한 단계라 당분간은 불가능할 듯합니다. 조정에 좌우상 모두를 세워두셨지만 한 분만 계셔도 충분할 거라 사료됩니다. 소신이 물러나도 좌상이 굳건하게 계시니 큰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우상의 말에 대신들은 또 한 번 크게 놀랐다. 

특히 우상과 정견이 맞지 않아 안팎으로 평생을 다퉈왔던 좌상이 가장 놀란듯했다. 같은 승상으로서 정치적 동반자나 다름없던 그가 갑작스레 사직을 고하고 승상의 대권 모두를 제게 다 넘겨준다니…….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좌상은 서둘러 앞으로 나와 우상을 설득했다.

“우상, 자네는 문무백관의 으뜸일세. 그 자리를 하나 지운다는 건 엄청난 큰일이야. 조정은 지금이야말로 사람을 써야할 중요한 시기네. 우상, 부디 가정사로 인해 공직을 피하셔서는 아니 되네.”

영친왕도 서둘러 말을 보탰다.

“그래, 좌상 말씀이 맞네.”

신하들도 웅성거리며 목소리를 키웠다.

하지만 우상은 시끄러운 한복판에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잠시 후, 장내 목소리가 차츰 가라앉을 때쯤 진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상께선 이미 결심을 하신 것 같군.”

“예, 폐하. 소신은 이미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남진 강산을 위해 힘을 쓸 수도 없으니 소신은 이제 마땅히 조당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상의 말에 진옥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우상의 청을 받아들이지.”

“황송합니다, 폐하!”

우상이 꿇어앉아 절을 올렸다. 

그때, 영친왕이 다급히 말했다.

“황상! 아니 되오!”

좌상도 서둘러 나서서 말했다.

“폐하! 다시 생각해 주시옵소서!”

진옥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영친왕과 좌상을 제지했다.

“짐이 즉위한 이래, 우상부 공자 목청은 군량미를 준비하는 데에 힘써 벌써 큰 성과를 이뤘다. 아직 조당의 경험은 없지만, 탁월한 기재니 조금만 갈고 닦으면 충분할 거라 생각한다.

오늘부터 이목청을 승상사직(*丞相司直: 승상부에 속하며, 관료의 감찰 등을 맡음)에 봉한다. 수중에 있던 일은 연석에게 넘기고 좌승상을 도와 참정할 수 있도록 하겠노라.”

장내는 다시 한 번 경악할 정도로 놀랐다.

좌상도 깜짝 놀랐지만 금세 진옥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상의 사직을 받아들이고 그의 아들 이목청을 자신의 곁에서 정무를 돕게 함으로써 우상부의 가문을 이어받아 미래의 우상 직위에 오르게 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렇듯 우상에게는 뛰어난 아들이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탁월한 능력이 없는 아들은 자신의 뒤를 이어갈 수 없었다.

드디어 진옥에게 사직 허가를 받은 우상은 남몰래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짧은 시간, 너무도 많이 늙어버린 느낌이었다.

이젠 선황제가 세상을 떠나고 우상도 자리에서 물러났다. 앞으로 조당의 노령 신하들도 하나둘 물러날 차례만 남은 것이다. 한 시대는 이렇게 저물고 있었다. 새 황제가 즉위했으니 조당도 신선한 피가 돌 수 있게 해야만 했다.

이내 진옥이 다시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우상께서 말씀하신 우상 직위를 완전히 폐지하는 것은 우선 접어두겠다. 우상께서 사직하셨으니 나머지 일은 모두 좌상께 맡기겠노라. 좌상, 부디 친애하는 좌상께서 더욱 수고해주시길 바라네.”

“한평생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폐하!”

좌상이 서둘러 답했다.

진옥은 고개를 끄덕이곤 꿇어앉아 있는 우상에게 말했다.

“우상, 이만 일어나시게. 목청은 어릴 때부터 친했던 짐의 친우로 그의 재주와 능력은 짐도 매우 잘 알고 있다. 목청이 조당에 있다면 우상이 계신 것과도 같지. 그러니 우상께선 부디 마음 편히 노후를 즐기시게나.”

“황송합니다, 폐하!”

우상은 아들이 가업을 이어받을 수 있다는 것에 크게 기뻐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우상을 보고, 진옥이 다시 한 번 물었다.

“우상, 그런데 형양 정씨 사람들은 어젯밤 우상부에서 잘 지냈던가?”

우상이 조심스레 말했다.

“예, 정 어르신과 정 대인은 편히 주무신 것 같습니다만 큰 공자는 한숨도 자지 않고 여전히 제 딸아이 방 앞을 지키고 있습니다.”

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큰 공자는 참으로 우직하긴 하나 이 아가씨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강요하진 마시게. 인연이라는 것은 강제로 얻어내려해선 안 되는 것이니.”

“예, 소신의 생각도 그렇습니다.”

“부인은 좀 어떠신가? 어제 쓰러져 태의를 데려갔다던데 큰일은 아닌가?”

“화병으로 몸이 허해졌을 뿐 큰일은 아닙니다. 염려에 황공하옵니다.”

“다행이군.”

진옥은 이제 또 영친왕을 보고 화두를 돌렸다.

“백부님, 어제 형양 정씨의 둘째 공자가 영친왕부에서 머무르는 동안 폐를 끼친 것은 없었습니까?”

영친왕은 진옥이 어찌 조정에서 잡담을 꺼내는지 순간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곧 진강이 제게 건네준 쪽지를 떠올리며 조심스레 답했다.

“효양은 많이 지쳤었는지 왕비를 따라온 뒤 일찌감치 잠이 들었다고 하오. 그리곤 새벽에 일어나 해가 뜨기도 전에 도성 거리를 둘러봤다고 들었소.”

진옥이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신하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제 짐은 군주 금연과 정효양에게 사혼을 내렸다. 이로 인해 짐의 고모, 대장공주마마께서 심히 노하셨다. 그로 인해 어젯밤 심사숙고를 했다. 아무래도 이제 황족의 사위가 될 사람이 아무런 능력도 없어서는 안 되겠단 판단이 들었다. 황족은 곧 황제의 얼굴도 대표하는 격 아니겠는가. 하여 정효양을 내일부터 제1사관으로 임하겠노라.”

신하들은 다시 경악했고, 한 사관 어른이 앞으로 나와 급히 공수를 올렸다.

“폐하! 사관은 비록 소관이나 사관으로서 덕과 재주를 겸비해야만 합니다. 사관은 공과를 기록하고, 선과 악을 표창하며, 득실을 일조하고, 천년을 갈 영욕의 큰일을 책임집니다. 그런데 어찌 그런 일을 무능하고 막돼먹은데다 세상사에 무지한 이에게 맡길 수 있겠습니까? 폐하! 절대 아니 됩니다!”

진옥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짐은 그런 이유로 정효양을 사관에 임하려는 것이다. 버릇을 바로잡아 역사를 배우고 듣고 기록하게 함으로 이치와 대의를 알게 하려는 거지.”

“그게……. 사관은 사관으로서의 책임이 있습니다. 사관은 본조의 법에 따라 엄격히 사안을 판단해야 하고 사건의 경과를 완벽하고 상세하게 기록하며 그 어떤 것도 숨기거나 조작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런데……, 그런 공자의 품행 하나 바로 잡고자 사관의 청렴함을 어지럽힌다면 세상이 어찌 생각하겠습니까. 폐하! 부디 심사숙고하여 주시옵소서.”

“짐도 심사숙고해 결정한 것이다. 어제 정효양을 보니 품행은 올바르진 못하다만 말에는 힘이 있어 사관 자리에 앉혀놓아도 문제는 없을 듯하다. 친애하는 그대의 말씀도 일리가 있다만 너무 그리 독단적일 필요는 없다. 만약 품행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짐이 곧바로 사관직에서 물리겠다.”

진옥의 굳은 결심에 사관 어른도 할 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다른 대신들도 더 이상 이의를 표하지 않았고, 이미 사직을 허가받은 우상도 발언권이 없기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윽고 진옥이 장내를 마무리하는 발언을 했다.

“친애하는 경들, 더 말씀하실 것 있는가?”

대신들은 우상의 사직과 정효양을 사관으로 봉한다는 크나큰 사건의 충격으로 다른 일은 이미 다 하얗게 잊어버렸다.

곧 진옥은 손을 내저으며 조회를 마무리했고, 진옥이 자리를 뜨자 우상과 가까이 지내던 이들이 일제히 그를 에워싸고 한마디씩 했다. 

“우상 대인, 어찌 갑자기 사직하시는 겁니까?”

“대인, 아직 이리도 창창하신데 10년은 더 계셔도 됩니다.”

“대인, 진정 고향으로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도성을 떠나실 건가요?”

“…….”

우상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모두에게 공수를 올리며 작별을 고했다.

우상도 어제 밤잠을 설치며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다. 이젠 자신도 늙어버려 무엇에도 힘을 쓸 수 없었다. 하지만 가업을 이어받을 총명한 아들도 있고, 우상부도 풍파에 휩쓸렸으니 마땅히 물러나야할 시기란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남은 건 모두 이목청의 몫이었다. 

이목청은 총명하고 패기도 남달라 분명 청출어람일 터였다. 우상은 부인과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이렇듯 좋은 아들을 낳아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한바탕 작별인사가 끝나고, 사람들은 탄식을 연발하며 황궁을 떠났다.

모두가 떠난 뒤, 좌상은 황궁 입구에서 우상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우상, 자네가 사직을 고하다니 참으로 갑작스럽군. 내게 귀띔 한번 없이 어찌 그리 강단 있게 나간 것인가?”

우상은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직책이 없으니 아주 홀가분하군! 나도 충용후부 노후야를 따라 노후를 편히 즐기려하네.”

좌상은 감탄하며 말했다.

“한창 전성기일 때 결단력 있게 물러나다니, 역시 깨어있어. 난 아직 이 권세를 놓고 싶지 않네. 어렵사리 지켜낸 4황자마마께서 황태자전하가 되시고, 이제 황위에까지 오르셨는데. 아직 불안한 나라에 내 힘닿을 곳이 남아있어 사직하긴 아쉬움이 많아.”

우상은 하하, 시원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동년배라지만 자네는 나와 다르지. 여전히 야심이 남아있는 자네에 비해 난 늙어서 모든 게 힘에 부치네. 친우여, 내 아들놈을 잘 부탁함세.”

좌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목청은 문무에도 능하고 폐하, 강 소왕야, 연석과도 잘 지내잖나. 외려 내가 목청의 보살핌을 받아야할지도 모르지. 자네는 모든 이가 부러워할 아주 훌륭한 아드님을 두셨어.”

우상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들놈이 부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네.”

곧 영친왕도 다가와 우상의 어깨를 토닥였다.

“청렴한 관리라도 집안일은 처리하기 힘들다는 말이 있지. 우상께서 조정을 떠난다니 참으로 아쉽군.”

“높은 자리에 올라있었으니 가정사도 조정 일과 같지요. 이로 인해 나라에 폐를 끼쳐선 아니 되지 않겠습니까.”

우상의 답에, 영친왕도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하셨네. 그런데 정말 경성을 떠나 고향으로 가실 생각인가?”

“예, 그럴 생각입니다.”

“언제 준비하려고? 아직 여벽의 상처를 살펴야 하니 서둘러선 안 될 텐데.”

“벽이가 다 나으면 준비할 생각입니다. 당분간은 우상부 일로도 충분히 바쁠 듯합니다. 나중에 한가해지면 왕야, 좌상, 영강후께 술대접을 하지요.”

영친왕, 좌상, 영강후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벌써 조정에서 2, 30년의 세월을 함께 해왔다. 그러니 갑자기 찾아온 우상과의 작별 앞에 더더욱 커다란 충격을 금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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