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0화 (830/978)

830화. 선택지 

진강은 불길이 여러 갈래로 타오르는 것을 보며 남진 강산의 미래를 생각했다. 곧 이 강산도 이 불꽃처럼 타오를 것 같이 느껴졌다. 정효양의 말처럼 300년을 이어온 이 강산도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세워야 할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남진 강산 외에도 그의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은 과연 사랑하는 그녀와 한평생을 함께 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었다.

어젯밤 그는 자신의 욕심이 더 커져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전엔 그저 사방화와 함께 구천으로 가면 그만이라 생각했지만, 이젠 그녀와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 오래오래 함께 늙어가고 싶었다.

정효양은 문득 내내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기던 진강의 등 뒤로 갑작스레 흘러넘치는 무거운 기운을 감지했다. 그 기운은 실로 천하를 다 압도할 만큼 사람의 숨을 턱, 막히게 만들었다.

“강 소왕야, 지금 무슨 생각하시는 겁니까?”

정효양이 의아한 눈으로 묻자, 진강은 순식간에 그 무겁던 기운을 지운 채 천천히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정효양은 그의 눈을 마주한 순간 더 깜짝 놀랐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소왕야를……, 이리…….”

정효양은 지금 진강을 형용할 말을 찾아 헤매다가, 진강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을 거란 생각에 머리를 긁적이며 진강을 바라보았다.

진강 역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알 필요 없다.”

정효양은 기가 찼지만, 꾹 눌러 참고 다시 그에게 말을 붙였다.

“우리가 딱히 친분은 없지만, 그때 만났던 것만으로도 큰 인연이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말씀해보십시오,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요, 형양 정씨 둘째 공자님. 그대는 개를 길들이고, 사람을 다치게 하고, 꽃을 뺏는 것 말고 뭘 더 하실 수 있습니까?”

진강의 장난스런 반응에 정효양이 발끈하며 눈을 부릅떴다.

“강 소왕야! 전 지금 진지하게 말씀 드리는 겁니다! 제대로 거래를 하십시오, 대체 사람을 이렇게 얕잡아보실 수 있는 겁니까?”

진강이 픽, 웃으며 말했다.

“내가 남진 강산도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다며. 그럼 내게 나와 소왕비 목숨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느냐? 사람이 일단 살아야 무엇이라도 논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

정효양은 순간 깜짝 놀라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넌지시 물었다.

“그럼 소왕야와 소왕비마마가……. 아, 한 사건이 생각나는군. 알겠습니다.”

진강이 그를 쳐다보자, 정효양이 다시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아마 제게 두 분을 구할 물건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진강은 눈을 살짝 가늘게 떴고, 정효양은 더 떵떵거리며 말을 이었다.

“여태 전 개를 길들이고 형양 정씨를 갖고 노는 것 외에도 열중하던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고서적과 진기한 풀들을 모으는 것이지요. 제게 있는 진기한 풀들을 절대 얕봐선 안 되십니다. 저는 만년에 한번 나올 영보(灵宝)를 하나 갖고 있거든요. 이미 죽은 사람을 살릴 순 없지만,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이를 데려오는 데에는 문제도 없습니다.”

“무슨 영보?”

진강도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우연한 기회로 매족의 보물을 하나 얻었습니다. 고서에 따르면 이 보물은 하늘과 땅의 생기를 돋게 하고 불로장생한다고 하더군요.”

진강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에 불로장생하는 보물이 어디 있다고.”

“어찌 못 믿으시는 것입니까! 지금 그게 무슨 태도지요? 배고픔까지 참고 소왕야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얘기하고 있는데, 금연 군주와 혼인하겠다던 약조보다 더 진지하단 말입니다. 됐습니다, 믿으실 생각이 없으시다면 못 들은 걸로 하세요. 거, 부인! 언제 다 되는가? 배고파 죽겠는데.”

관리인이 서둘러 대답했다.

“예예, 효양 공자님. 이제 다 됐습니다.”

정효양은 몸에 붙었던 나뭇가지를 툭툭 털고 일어나 보글보글 끓고 있는 요리 냄새를 맡았다.

“역시, 아주 향긋하네.”

관리인은 흐뭇하게 웃으며 그릇에 면을 담았다.

“우리 소왕야께서도 제가 만든 양춘면을 가장 좋아하셨지요.”

“소왕야께선 딱히 드실 생각도 없어보이시는데 그냥 내게 다 주게.”

정효양의 말에 관리인도 불길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 진강을 돌아봤다.

“소왕야……?”

그러자 진강도 고개를 들고 답했다.

“그래, 공자에게 다 줘도 된다.”

“배고프셨던 거 아니십니까?”

“이젠 괜찮아.”

관리인이 다시 정효양을 올려다보자, 정효양은 더 신난 듯 기뻐했다.

“응, 내가 다 먹을 수 있다! 얼른 내게 다 다주게나.”

관리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양춘면 두 그릇을 푸짐히 담아줬다.

“효양 공자님. 여기서 드시겠어요, 아니면 바깥에 가서 드시겠어요?”

“여기서 먹지.”

정효양은 그릇을 받아들곤 한입 크게 벌려 시원스레 먹기 시작했다.

“와! 진짜 맛있네!”

관리인은 그래도 걱정스런 눈빛으로 진강을 쳐다보았다.

“저, 소왕야. 그럼……, 물이라도 한잔 드릴까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관리인이 금세 따뜻한 물 한잔을 내어주었다.

진강은 물을 몇 모금 마신 뒤 다시 정효양에게 말했다.

“그 큰 거래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정효양은 계속 먹는 것에 열중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이제 거래는 없습니다! 저를 무시하는 분과 얘기하지 않을 겁니다!”

진강은 고개 한번 들지 않고 음식에 집중한 정효양을 보고 픽, 웃다가 남아있는 양춘면 한 그릇과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아, 뭡니까! 안 드신다고 했잖아요!”

정효양이 손을 뻗었다.

“다시 먹고 싶어졌어.”

정효양은 아예 진강의 젓가락을 뺏으려 했지만, 진강은 또 잽싸게 피했다. 한동안 티격태격하는 상황이 벌어지다가, 결국 정효양이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서 버럭 화를 냈다.

“어찌 군자가 말씀에 신뢰 하나 없을 수 있습니까!”

진강은 미소를 지으며 정효양의 비위를 맞춰줬다.

“도성에 오시자마자 천지개벽을 이루시고 금연에게 당당히 구혼해 대장공주부 사위가 되신 정효양 공자님을 대체 어떤 놈이 무시한단 말입니까?”

정효양은 말없이 살짝 콧방귀만 뀌었다.

이내 진강은 그릇을 완전히 내려놓고 물었다.

“효양, 너희 가문을 공명정대하게 세상에 우뚝 설 수 있게 하는 것 말고 또 원하는 게 뭔가?”

“사관 자리요.”

진강이 살짝 코웃음을 쳤다.

“큰 거래가 사관 자리에 앉는 거였다고? 네가 그 자리에 앉는다면 후세 사람들은 결코 역사를 믿지 못하게 될 텐데.”

“책을 천만권이나 읽은 몸이라 제가 또 붓놀림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진강은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했다.

“아, 소왕야! 지금 또 절 무시하는 겁니까!”

정효양이 재빨리 진강의 팔을 붙잡았다.

“사관은 그리 계급이 높지도 않잖아. 근데 그 자리를 왜 원하는 거지?”

정효양도 그릇을 내려놓고, 진강의 손등을 살짝 토닥였다.

“강 소왕야, 거 참 뭘 모르시는군요. 계급이야 높지는 않지요. 하지만 제왕을 제외한 그 누가 제게 감히 밉보이겠습니까? 다시 말하자면 제왕도 제게 잘못 보이는 순간 만년도 지지 않을 지독한 악명을 얻게 될 겁니다.”

하지만 꿈쩍도 않고 평온한 진강을 보고, 정효양이 웃음을 터뜨렸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지요. 남진과 북제는 언젠가 한번 크게 싸울 것 아닙니까? 바람이 일고, 구름이 밀려들고, 강산이 변한다는데 저도 그 역사 한편에 끼어들고 싶습니다.”

진강도 이젠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누구는 숨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데 거기에 끼고 싶다고?”

“어차피 형양 정씨도 피할 곳은 없습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저도 형양 정씨 자손이고, 정씨 사람이지요. 출신을 택할 순 없으나 저로 인해 우리 가문의 역사를 바꿀 수는 있습니다.”

“좋다! 내일 황제에게 널 사관 자리에 앉혀 달라 부탁을 드리마.”

“감사합니다, 진강 소왕야!”

정효양이 싱글벙글 웃으며 진강에게 허리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

“하지만 내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어려울 것 없지요.”

진강은 이내 말없이 부엌을 빠져나갔다.

정효양은 다시 양춘면을 신나게 먹고, 진강이 남긴 것까지 모두 다 해치운 뒤 배를 통통, 두들기며 부엌 관리인에게 인사했다.

“국수가 참 맛있어. 수고 많으셨네.”

“별말씀을요. 왕부에 계시는 동안 드시고 싶으시면 언제든 찾아주세요.”

“왕부에 머무는 것뿐 아니라 경성에 눌러 살게 될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정효양도 부엌을 떠나고, 관리인은 웃으며 식기를 치웠다.

정효양은 트림을 시원하게 하며 하인에게 물었다.

“많이 피곤하냐?”

하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무슨 분부라도 있으십니까?”

“어젠 너무 정신없이 오느라 남진 도성 거리를 구경도 못했구나. 날 데리고 도성 한번 구경 좀 시켜다오.”

동녘 하늘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오긴 했지만, 아직 해가 뜨기는 일렀다.

“효양 공자님, 이 시간엔 상점도 열지 않고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이 없으니 가보려는 것이다. 그래야 또 어느 집안 마차를 들이받고 충돌할 일도 없겠지.”

하인이 순간 깜짝 놀라 말했다.

“공자님……, 지금 거리를 둘러보고 싶으시다는 말씀이시지요?”

“가기 싫으면 나 혼자 가도 되고.”

“아닙니다! 저도 가고 싶습니다.”

하인은 서둘러 길을 안내했고, 왕부를 나서다 입구에서 임칠을 마주쳤다.

하인이 먼저 임칠에게 큰 소리로 인사했다.

“임칠! 장보러 가는 길이야?”

“응. 소왕야께서 소왕비마마 몸보신을 해야 한다고 닭을 원하셔서. 일찍 나가서 파는 이가 있는지 한번 살펴보려던 참이다.”

그리고 임칠은 바로 정효양에게 인사했다.

“정효양 공자님을 뵙습니다.”

정효양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네가 그 부엌 부인이 말하던 임칠이구나. 낙매거에서 부엌일을 한다는?”

“예, 그렇습니다.”

“언제 나도 한번 네 요리를 맛보고 싶네.”

정효양이 웃으며 말하자 임칠도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그렇게 세 사람은 함께 왕부를 나왔다. 임칠은 아침 시장으로, 정효양은 소화도 시킬 겸 큰길을 따라 거닐며 이곳저곳을 느긋하게 구경했다. 

* * *

하늘이 밝아오고, 대신들은 말이나 가마를 타고 황궁에 향했다.

영친왕도 본원에서 나와 희순을 찾았다.

“희순, 어제 강이와 방화는 언제 돌아왔느냐?”

“자시(*子時: 밤 11시 ~ 새벽 1시)가 넘어서 돌아오셨습니다.”

영친왕이 고개를 끄덕인 후 밖으로 나가 마차에 오르는데, 갑자기 옥작이 내원에서 달려 나와 그를 불렀다.

“왕야!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영친왕이 온화한 얼굴로 옥작에게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이냐?”

“소왕야께서 폐하께 드리는 서신이온데 왕야께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옥작이 숨을 헐떡이며 마구잡이로 접은 쪽지를 영친왕에게 건네주었다. 

영친왕은 표정이 굳었다.

“돌아왔으면서 왜 조회에 나가지 않는 것이냐?”

옥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피곤해서 못 가겠다고 하십니다. 오늘은 소왕비마마를 곁에서 돌보시겠다고 왕야께 대신 전해달라고 청하라 하셨습니다.”

영친왕도 쪽지를 받아들곤 마차를 출발시켰다.

영친왕은 항상 조회 시간을 넉넉히 남겨두고 출발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조정에서 기다리는 대신 조정으로 향하는 길에서 진옥을 기다렸다.

진옥도 영친왕을 발견하자마자, 의아한 얼굴로 서둘러 다가왔다.

“백부님,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영친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강이 전해준 쪽지를 건넸다.

“강이가 황상께 드리라고 전해준 쪽지요.”

진옥은 즉각 쪽지를 받아들고 펼쳤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곤 아무 말 없이 쪽지를 펼쳐 그대로 영친왕에게도 보여주었다.

영친왕도 순간 멍하게 굳어버렸다.

“지금……, 황상께 정효양을 사관으로 봉하라 한 것이오?”

“예, 진강의 필체이지 않습니까.”

영친왕은 헛기침을 했다.

“잘못 쓴 건 아니겠소? 정효순이 아니라 정말 정효양이라고?”

진옥이 웃으며 말했다.

“진강이 어찌 사람 이름을 잘못 쓰겠습니까.”

그렇게 진옥이 앞으로 걸음을 옮기자, 영친왕도 함께 따라가며 물었다.

“아무 이유도 언급하지 않고 사람을 추천했잖소. 황상, 아니면 강이에게 무슨 뜻인지 직접 한번 물어볼까요?”

“됐습니다, 분명 무슨 뜻이 있을 테니 그냥 그 뜻에 따르면 됩니다.”

영친왕도 어릴 때부터 서로 아웅다웅하던 아들 진강과 조카 진옥이 이제 화해를 한 뒤로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이 보이자 한결 마음이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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