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9화 (829/978)

829화. 깊은 밤 이야기 

“여기가 부엌입니다.”

정효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은 부엌 관리인을 불러 문을 열어 달라 청했고, 곧 부엌에서 마흔에 가까워 보이는 한 통통한 여인이 나왔다.

그녀도 정효양을 보자마자 웃으며 반겨주었다.

“효양 공자님은 미모가 아주 수려하시군요. 소인은 강 소왕야께서 오시는 줄 알았습니다. 소왕야께서도 일전엔 종종 한밤중 부엌으로 오셔서 먹을 것을 찾곤 하셨는데 소왕비마마와 혼인 후엔 낙매거 부엌만 찾으시지요.”

그러자 하인도 곁에서 맞장구를 쳤다.

“그렇습니다. 이제 강 소왕야께서도 한밤중 부엌에서 먹을 걸 찾으시던 버릇은 다 고치셨겠지요? 임칠이 얘기하는 건 못 들었던 것 같은데.”

부엌 관리인이 말했다.

“이젠 고치셨나 보지. 소왕야께서 부엌에 와 먹을 걸 찾으시던 그때가 참 그립구나. 효양 공자님은 뭘 좋아하십니까? 뭘 좀 만들어 드릴까요?”

정효양은 거리낌 없이 한 등받이에 걸터앉아 넉살좋게 답했다.

“가리는 건 없으니 그저 배만 간단히 채울 수 있는 거면 좋겠네.”

“하하, 효양 공자님은 어찌 이리 모시기가 쉬운지요. 우리 강 소왕야는 매번 오셔서 제가 만든 양춘면(阳春面)만 찾으셨습니다.”

“그럼 나도 그 양춘면 한 그릇 내주게. 내 불을 지펴 줄 테니.”

부엌 관리인이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소왕야께서도 늘 불을 지펴주시곤 하셨는데 두 분께선 참으로 닮은 데가 있으시군요. 안 그래도 바깥에서 형양 정씨 둘째 공자님이 강 소왕야를 닮았다는 얘기가 들려오곤 했습니다. 왕비마마께서 귀한 손님이시니 잘 모시라 하셨으니 바로 해드리겠습니다. 어렵지도 않습니다.”

정효양은 잠시 눈썹을 들썩였다. 

“경성에 들어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새 바깥에 소문이 났다고?”

“경성에선 단연코 소문보다 빠른 건 없지요.”

부엌 관리인은 국자 하나를 떠 밀가루를 반죽하기 시작했고, 정효양은 곁에서 헛기침을 하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유명해지는 거야말로 골치가 아파서 그러지 않길 바라지 않았는데.”

그런데 정효양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누군가 들어와 문 앞에 섰다.

“경성에 들어오자마자 우상부 마차를 들이받고 이 아가씨 얼굴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도 황제 앞에 장가를 가겠다고 난리를 피워댔지. 그로 인해 하루아침에 경성에 풍랑이 휘몰아쳤는데 이제와 유명해지고 싶지 않다고? 그럼 진즉에 꼬리를 다 숨기고 들어왔어야지.”

어찌나 익숙한 목소리인지 부엌 관리인은 고민도 없이 웃으며 뒤돌았다.

“소왕야! 소인 마침 소왕야께서 혼인하시고 부턴 큰 부엌엔 잘 오시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하던 중이었는데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오시는군요.”

“배가 고파 잠이 안 오더구나. 임칠도 요리를 꽤 하지만 양춘면은 꽝이야.”

진강이 말했다.

“그럼 얼른 한 그릇 더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부엌 관리인은 시간도 잊은 듯 생기를 되찾았다.

“그래, 부탁한다.”

진강은 고개를 끄덕인 후, 문틀에 기대 팔짱을 끼고 정효양을 바라보았다.

“네가 바로 형양 정씨 둘째 공자구나.”

“전에 한번 뵌 적이 있습니다만, 강 소왕야께서 절 기억하고 계신다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잊을 수가 있나. 그날 시신 더미에서 백골을 한아름 안고 개들 무리를 데려갔잖아. 뭐 날 구해주진 않았다만 도와주긴 한 셈이지.”

진강의 말에 정효양이 하하, 시원하게 웃었다.

“영친왕부 작은 공자님이 시체 더미에 갇혀 개들에게 먹힐 위기에 처해있으리라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소왕야를 구해드릴 생각도 없었던 건 그 개들이 참 좋아보였기 때문입니다. 데려가 잘 길들이기만 하면 승냥이보다도 더 뛰어날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그때 그 작은 공자님이 영친왕부 진강 공자님이란 걸 알았다면 개들이고 뭐고 훨씬 값진 소왕야를 구했을 겁니다.”

진강은 자신을 개와 비교하는 정효양을 보고도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외려 의자 하나를 당겨와 정효양 근처에 앉아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

“언제 알게 된 것이냐?”

“제가 정말 멍청한 줄 아십니까? 다음날 바로 재미난 이야기가 들리더군요. 영친왕부 둘째 공자님이 시체 더미에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요. 그래서 태후마마와 영친 왕비마마께서 크게 격노해 경성 방원 300리 내 난장판들을 모두 없애셨다고 하더군요. 그때 어찌나 후회가 되던 지요.”

진강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 개들은 어찌했느냐?”

“다 먹어버렸습니다.”

진강은 순간 멈칫하며 눈썹을 들썩였다.

그때 정효양은 관리인이 밀가루 반죽을 다 민 것을 확인하고 불을 붙였다.

“개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존귀한 영친왕부 적통 공자님인 걸 알았는데 그 교훈을 잊지 않으려면 먹어서 기억해야지요. 안 그럼 누가 먹겠습니까?”

“그래, 잘했다.”

정효양은 금세 득의양양하게 눈썹을 치켜떴다.

진강도 곁에서 마른 장작을 들고 정효양을 도우며 담담하게 말했다.

“근데 참 이상하지. 형양에서 몇 백리나 떨어진 거긴 어찌 있었던 거냐?”

정효양이 살짝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지요. 우리 훌륭한 종조부님께서 날 황실 은위로 키우려하셨지만 도중에 날 데려가던 사람에게 벗어나 그곳을 지나게 됐습니다.”

“정일 어르신?”

진강이 물었다.

“그럼 누구겠습니까?”

정효양이 불쏘시개를 들고 마른 장작을 끌어 모았다. 

“그럼 네 종조부님께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구나. 그분이 아니셨다면 네가 개를 데려갈 일도 없었을 테니 난 이미 개밥이 되었겠지.”

“제가 대신 감사 인사를 드렸으니 됐습니다. 그 개들을 데려가 그대로 가주의 방에 풀어드렸지요. 흥분한 개들이 가주의 급소를 물어버렸습니다.”

진강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뭐? 또 정일 어르신을 말하는 것이냐? 형양 정씨 가주?”

“그럼 제가 누굴 말하는 것 같습니까?”

“아주 악랄하구나!”

진강이 경악하며 쳐다봤지만, 정효양은 되레 더 뿌듯해했다.

“왜요, 형양 정씨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개들을 길들여 얻으려 했던 효과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는데도 어찌 널 가만히 두셨단 말이냐?”

정효양은 더더욱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제 부름에 모든 형양의 개들이 달려와 저를 건드는 이들은 죄다 물어버리는데 가만히 두지 않고 뭘 어쩔 수 있었을까요. 크든, 작든, 미쳤든, 사납든, 다 개들이니 제 말을 따르지요. 호위 따위는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진강은 기가 막힌 듯 웃음을 터뜨렸다.

“형양 정씨에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참 신선하네.”

정효양은 바로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제가 형양 정씨에서 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여태 소왕야께서 경성에서 해 오신 것보다 결코 적진 않습니다. 그까짓 뭐 대수일까요. 워낙 작은 곳이라 밖으로 새나가는 소식을 막으려면 얼마든 막을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땐 그 개들이 참 값지다며 자화자찬에 겨웠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백 마리, 만 마리가 있다한들 결국 강 소왕야께는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더군요.”

진강도 정효양을 도와 장작불을 더했다. 관리인은 일찌감치 귀를 다 닫은 채 요리에만 집중했고, 하인은 어디론가 몸을 피해있어 보이지 않았다.

“정일 어르신과 네 자신에게 다 교훈을 줬군. 근데 그 교훈으로 네가 얻은 건 뭐지? 그 실력을 갖고도 오래도록 도성엔 발도 들이지 않다가 갑자기 이제 도성의 탁한 물을 건너고 싶어졌어? 아니면 세상 물에라도 뛰어 들겠다?”

정효양은 눈을 깜빡이며 진강을 바라보았다.

“강 소왕야께서 보시기엔 제가 어떤 물을 건너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까?”

“형양 정씨 적통이지만, 결코 가문을 중시하진 않고 도성은 껍데기만 번지르르해 여태 오지 않은 거겠지, 재미가 없으니. 그럼 세상 물을 건너려고?”

정효양은 돌연 진강의 어깨를 턱, 잡으며 몹시 친근하게 굴었다.

“왜요, 강 소왕야. 제가 가능할 것 같습니까?”

본래 자유로운 성정의 진강은 예의규범을 중시하지 않았기에 그에게 화를 내진 않았다. 다만 가볍게 정효양의 손을 잡아 내리긴 했다.

“우상 부인의 호위에게 붙잡힐 정도면 불가능하지.”

“그 멍청한 부인을 갖고 절 모욕하지 마세요. 전 지금 진지합니다.”

진강은 홀연 장작을 한 움큼 집어 전부 다 집어넣었다. 불꽃은 일순간 놀랍도록 몸을 불리며 요란스런 소리를 냈다.

“건널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무엇으로 밑천을 댈 거지?”

“형양 정씨 모두요!”

“아버님, 형님과 친척들 모두 네게 그토록 잘 대해주시는데?”

“저를 조상님 모시듯 대하는 이들인데 말이 필요합니까?”

“그럼 더더욱 이해가 가질 않지. 형양 정씨를 없애면 네게 좋을 게 뭐냐?”

정효양은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며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냥 노는 거지요, 재밌잖아요.”

그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조금 전 진강처럼 장작 한 움큼을 쥐고 다 던져 넣었다. 불길은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더욱 거칠게 포효했다.

“제가 꿈꾸는 우리 가문은 어둠 속에 숨어 나라를 져버린 채 더럽고 추한 짓들을 일삼는 것이 아닙니다. 천년 후세에까지 욕보일 가문으로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영친왕부, 충용후부처럼 태양 아래 우뚝 서서 천지와 충효의 대의를 굽히지 않는 가문이 되길 바랍니다. 낡은 것을 버리지 않고는 새로운 것을 세울 수 없는 법이지요.”

낡은 것을 버리지 않고 새로운 것을 세울 수 없다……. 진강은 정효양의 생각에 잠시 감탄의 눈빛을 보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대를 어리석게 보내던 형양 정씨에서 충효와 대의를 정통한 너 같은 훌륭한 자손이 나오다니.”

“분명 칭찬하는 말씀인데 어찌 이리 귀에 거슬리는 것일까요?”

진강은 불쏘시개를 들어 장작을 더 뒤적거리며 불길의 포효를 재촉했다.

“그래서 내가 암암리에 정탐꾼을 제거하는 걸 도와주고 형양 정씨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해줬던 것이군.”

정효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 소왕야의 수단이 몹시 뛰어나고 영민하시다는 얘기는 익히 들어와서 금방 눈치 채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먼저 경성으로 와 거래를 하러 기다린 거지요.”

“결코 가벼운 거래가 아니란 건 알고 있겠지? 넌 날 경성으로 돌아오게 만든 것뿐 아니라 경성에 큰 풍랑을 일으켰다.”

“그럼 저와 거래할 생각이 있으십니까?”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더 자세히 듣고 싶다.”

“강 소왕야께는 절대 손해 볼일 없는 장사입니다.”

정효양의 말에, 진강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강산과 관련된 거래니 남진의 주인을 대신해 너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이다. 원래 난 절대 손해 볼일이 없지. 어차피 강산은 내 것도 아니니.”

정효양은 잠시 눈을 깜빡이며 진강을 빤히 바라보았다.

“강 소왕야께선 정말 남진 강산은 가질 생각도 없어 보이시고 대체 뭘 원하시는 겁니까? 정말 풍문처럼 소왕비마마만 보배처럼 여기는 것이고 나머진 다 먼지처럼 부질없다고 느끼십니까?”

진강은 정효양을 흘깃 쳐다보다 시선을 돌리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보배라니! 내 목숨이다.”

정효양은 헛기침을 하며 실소를 했다.

“예, 오늘 저도 그 소왕비마마를 뵀습니다. 실로 보통이 아니시더군요. 하지만 소왕야 스스로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건 아니시겠지요?”

진강은 불쏘시개를 헤집어 한곳에 모여 있던 불길을 옆으로 풀어주었다.

“내가 그 여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나만 알면 된다.”

정효양은 눈을 흘기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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