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7화. 그대가 부끄럽다면 (1)
마차가 다 사라질 때까지도 사람들의 정신은 돌아올 줄을 몰랐다.
그러다 잠시 후, 우상 부인이 화를 내며 정적을 깼다.
“대체 무슨 뜻입니까?”
이목청은 말없이 우상 부인을 한번 바라보곤 본원으로 되돌아갔다.
우상은 안색을 구기며 우상 부인에게 화를 냈다.
“적당히 좀 하시오. 대체 오늘 하루 동안 지체 높은 부인의 신분을 지킨 적이 있었소? 부디 돌아가 거울 좀 보시길 바라오. 부모가 이러니 딸이 어찌 낫겠소, 청이도 말수가 적어진 걸 못 느끼오? 소왕야, 소왕비는 이 일과 아무 상관도 없소! 어찌 무관한 사람들을 잡아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것이오?”
우상 부인은 우상과 사랑이 두텁진 않았지만, 줄곧 부부가 화목하게 지내며 서로를 존경해왔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대체 남편에게 잔소리를 몇 번이나 들은 건지 셀 수도 없었다. 그녀도 더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나리, 지금 절 원망하시는 겁니까? 딸애가 다친 걸 어미인 제가 지키지 못했다고 원망하시고, 아들도 절 원망한다고요? 대체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차라리 나가 죽는 게 낫겠어요.”
“그럼 나가 죽으시오!”
우상도 화가 나 옷자락을 펄럭이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우상 부인은 단 한 번도 남편과 거친 다툼을 한 적이 없었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것이 지금 그녀의 기분을 완벽히 설명하는 문장이려나. 우상 부인은 결국 하루 동안 연이어진 참사에 그만 기절을 하고 말았다.
가까이서 시중을 들던 시녀들은 크게 놀라 일제히 소리를 질렀고, 누군가 급히 우상을 불렀지만, 우상은 태의를 부르란 말만 남기고 서재로 향했다.
태의를 부르러 가는 사람들과 이목청을 찾으러 가는 사람들, 우상부가 순식간에 어수선한 분위기로 변해버렸다.
곧 이목청도 어머니가 쓰러졌단 소식을 듣곤 다시 돌아와 분부를 내렸다.
“방으로 모시고 어서 태의를 모셔오너라.”
시녀들은 황급히 우상 부인을 본원으로 옮겼다.
이내 이목청이 멀뚱히 서 있는 정일과 정성을 향해 담담한 태도로 말했다.
“몇 년이고 평온했던 우상부였는데 형양 정씨 일가가 경성으로 오자마자 풍랑에 휩쓸리듯 난장판이 되어버렸군요.”
정일과 정성은 서둘러 사과를 했다.
“이 공자, 우리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어. 진심으로 미안하네. 효양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우릴 탓하시게나.”
이목청은 입 꼬리를 살짝 올리곤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실로 아드님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단 말씀이십니까? 제가 보기엔 아주 능숙히 잘 가르치신 것 같은데요. 큰 공자가 둘째 공자보다 잘났다고 보이지도 않고요.”
정일과 정성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이목청은 옷소매를 털며 다시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정효순 공자에게 사흘을 드리겠습니다. 그 안에 누이가 혼인 허락을 하지 않으면 즉시 우상부에서 쫓아내고 경성에도 영원히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대장공주부와 정혼한 정효양 공자를 빼곤 형양 정씨 사람 그 누구도 경성에 발을 들여놓을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대단하신 형양 정씨 가문은 이 이목청은 안중에도 두지 않으실 테니 그냥 제 말을 한쪽 귀로 듣고 흘리십시오. 크게 신경도 쓰지 마시고요. 밤이 늦었습니다. 두 분께서도 어서 쉬시지요.”
깜짝 놀란 정일과 정성을 두고, 이목청은 밤바람처럼 싸늘히 돌아섰다.
정일과 정성은 이목청의 그림자까지 다 사라진 뒤에도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이목청에게선 실로 엄청난 냉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소문에 이목청은 우상의 온화하고 둥글둥글한 성격을 물려받아 그 누구에게도 미움을 사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실제로 정일, 정성이 이렇게 많은 일을 겪기까지 이목청은 단 한 마디도 거든 적이 없었다. 동생 이여벽이 다치고 정효양이 우상부에서 소란을 피우며 어머니 이 부인을 몇 번이나 화나게 해도 이목청은 단 한 순간도 과격한 행동이나 언사도 보이지 않았고 시종일관 담담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아주 담담하고 온화한 어조로 저런 말을 내뱉으니 이제 고희가 넘어가는 정일도, 반백이 된 정성도 오싹한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많은 세월을 살아오며 줄곧 세상사를 충분히 경험했다 자부했지만, 지금 이 짙은 밤 한 공자가 남기고 떠난 말에 이토록 가슴이 싸늘해질 줄은 몰랐다.
* * *
한참 뒤, 정일이 먼저 정성에게 방으로 돌아가자는 손짓을 했다.
정성도 놀란 가슴을 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방으로 돌아왔고, 정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남진 경성 젊은 세대에 실로 인재들이 넘쳐 나는구나.”
정성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과연 황제폐하를 비롯해 강 소왕야와 이 공자도 소문대로군요.”
“그러니 말이다. 소문처럼 참으로 예사롭지 않더구나. 효양이 말썽을 일으켜 형양 정씨와 우상부 일 중간에 폐하를 끼게 만들었지만 폐하께선 양측에 혼약을 맺어주시곤 손쉽게 빠져나가 알아서 해결하도록 하셨다. 강 소왕야도 마차를 보곤 곧바로 간파하더구나. 이 공자의 말은 소름이 끼쳤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정일을 보고, 정성이 걱정스레 말했다.
“숙부님, 이제 우린 어떡합니까?”
정일이 한숨을 내쉬었다.
“뭘 어쩌겠어? 이틀 내로 효순이 이 아가씨를 설득시킬지 지켜봐야지.”
“설득시키지 못하면요?”
“그리 쓸모없는 놈은 당연히 형양으로 돌려보내야지. 우리 형양 정씨도 영원히 경성엔 발을 못 디딜 게다.”
정성이 깜짝 놀랐다.
“효순에게 있었던 일을 말해주고 알아서 하라고 하거라.”
이어진 정일의 말에, 정성은 잠시 침묵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효양은 어떡합니까?”
정일이 수염을 들썩이며 말했다.
“네놈의 그 잘난 아들 말이냐!”
정성이 고개를 푹 숙이자 정일이 손사래를 쳤다.
정성은 곧바로 나와 이여벽의 문밖을 지키고 있는 정효순에게 향했다.
* * *
한편, 태의는 금세 우상부로 도착해 우상 부인에게 맥을 짚어주었다.
곧 태의가 이목청에게 정중히 공수를 올리며 말했다.
“이 공자님, 부인께선 마음속에 화가 쌓이신 데다 근래 걱정 근심에 무리까지 하신 탓에 쓰러지셨습니다.”
“심각하오?”
태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약을 처방해 드릴 테니 제시간에 약을 복용토록 하시고 마음을 편히 가지셔야 합니다. 속에 걱정 근심이 쌓여 마음의 병이 되면 더 큰일이니 반드시 주의하셔야 하고요.”
이목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약 처방 좀 부탁드리겠소.”
태의는 고개를 끄덕이곤 서둘러 우상 부인에게 약 처방을 내려주었다.
이목청은 처방전을 전해 받고 시녀에게 태의를 배웅하도록 분부했다.
태의가 떠나고 우상 부인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는 이목청이 침상 앞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곤 눈물을 흘리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청아, 너도 이 어미를 탓하는 것이냐?”
이목청은 말이 없었다.
“이 어미가 선행을 베풀지 못한 것들이 이런 식으로 되돌아오는구나.”
이목청은 한숨을 내쉬며 울고 있는 어머니를 토닥였다.
“어머니를 탓한 적 없습니다. 누이에게 일이 생겼으니 아버지께서도 착잡하신 마음에 말실수하신 것일 테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 한 가족이잖습니까. 애타고 화낸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진 않습니다. 마음을 다 가라앉히고 최선의 방도를 찾아보는 게 낫지요.”
“대체 이보다 더 나은 방도가 어디 있단 말이냐. 네 누이는 한평생이 망한 거나 다름없다.”
“어머니,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 마세요. 누이는 이제 시집갈 수 있는 나이도 됐는걸요. 아직 미래가 창창합니다.”
이목청은 손수건을 꺼내 우상 부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청아, 사람의 용모는 목숨과도 같은 것…….”
“실로 고아하고 순결한 인물이란 용모가 아닌 품행과 재주에서 나오지요.”
이목청이 도중에 말을 끊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 누이는 효순을 받아줬다더냐?”
이목청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요.”
우상 부인은 또다시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정효순은 참으로 괜찮은 인물이건만,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싫다고 하다니 강 소왕을 포기하지 못한 게 분명하다. 이제 어떡하면 좋으냐?”
“정효순에게 사흘을 줄 테니 그 안에 누이의 허락을 받아내지 못하면 형양 정씨 모두를 경성에서 쫓아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우상 부인이 깜짝 놀라 울음을 멈췄다.
“청아, 그게……, 무슨 뜻이냐?”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그나마 괜찮은 정효순을 경성에서 쫓아내버리면 네 누이는 어떡하고?”
우상 부인이 말했다.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우를 생각하는 마음은 진심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누이가 허락지도 않은데 강제로 혼인을 시킨다면 누이가 행복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우상 부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목청은 다시 어머니에게 직접 약을 떠먹여주며 말했다.
“어머니, 많이 지치셨으니 약 드시고 어서 쉬십시오. 계속 편찮으시면 더 이상 누이 걱정을 하고 싶어도 못하십니다.”
우상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약을 마셨다.
약 한 사발을 다 마시고, 우상 부인은 아들을 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본래 남편보다 마음 편히 기댈 수 있는 아들이었다.
우상 부인은 그렇게 아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지만 약효가 올라와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서서히 잠에 들었다.
이목청은 바로 이불을 잘 덮어준 뒤 방을 나서, 서재로 향했다.
* * *
서재엔 우상이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어슴푸레한 등불 아래의 우상은 부쩍 더 연로하고 피곤해 보였다.
곧이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우상이 고개를 돌려 외쳤다.
“들어오너라!”
이목청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네 어머니는 어떠시냐?”
“태의가 큰일은 아니라고 합니다. 약을 드시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우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 어머니가 버티지 못한 걸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여태 너와 벽이는 네 어미의 심장과도 같았다. 항상 순조롭게만 흘러가다 올해 들어 네 누이 때문에 속앓이를 해왔는데 이런 일까지 터졌으니 간신히 잡고 있던 끈도 끊어져 버린 게지.”
이목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줄곧 평안하기만 했던 우상부에 이 정도 풍랑이 불었을 뿐인데 네 어미뿐만 아니라 나도 버티기가 힘들구나. 조정에 사람이 필요한 시기가 아니었다면 내일 곧장 사직서를 냈을 게다. 다 늙어서 뭘 하겠느냐.”
이목청은 어느 사이 다 하얗게 세어버린 우상의 머리칼을 보며 문득 아버지와 나이대가 비슷했던 선황제의 죽음을 떠올렸다.
이내 이목청이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아버지, 우상부는 제가 버티고 있으면 되니 사직하고 싶으시면 그러셔도 됩니다. 조정이 사람을 필요로 하는 시기이긴 하나 폐하께서도 우상부가 처한 상황을 보시고 너그러이 이해해주실 겁니다.”
우상은 지나가듯 뱉은 말에 이목청이 동의를 하자 홀연 고개를 들었다.
“청아, 이 아비가 정말 사직해도 괜찮을 것 같으냐?”
이목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형양 정씨가 돌연 경성에 와 우상부를 파문에 휩싸이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어머니와 누이에게서 비롯되었지만, 결국은 아버지와 우상부를 노리고 온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갑작스레 사직하신다면 그들의 계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우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태 형양 정씨가 배후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보진 않았다만 나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 허나 경성에 발을 들이자마자 우상부를 노릴 줄은 몰랐을 뿐이다.”
“막 경성에 들어오자마자 노렸을 거라 확신하긴 힘듭니다. 한때 사씨 장방 민 부인께서 정효순을 점찍으셨지만, 사씨 장방이 영남 이남의 습하고 더운 지역으로 유배되면서 혼사도 자연히 없던 일이 됐지요.
그 뒤로 어머니가 그 혼사를 눈여겨보셨지만 누이가 반대해 대장공주마마께로 넘어간 것입니다. 이렇게 한 바퀴 돌아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 것이지요. 아버지, 이게 그저 우연의 일치라고 보십니까?”
우상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어딜 가나 우연찮게 들어맞는 일은 많다.”
이목청이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겁니다. 세상에 우연한 일들이 어찌 그리 많겠습니까.”
“10년 전, 좌상이 형양 정씨를 노릴 때 난 좌상을 노렸었지. 하지만 지금껏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가 오늘날 경성에 들어와 곧장 우상부를 향해 올 줄은 몰랐다. 됐다. 오늘 밤 상소의 초안을 잡아 내일 아침 올려야겠구나. 내가 물러나면 네 어미와 누이도 더 이상 이용당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예, 아버지. 우상부에 결코 풍파를 일으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목청은 안색을 굳힌 채 정일과 정성에게 경고한 이야기도 전해주었다.
우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사직을 윤허해주신다면 앞으로 우상부는 자연히 네게 넘겨질게다. 누이가 사흘 내로도 동의하지 않으면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네 어머니와 다 같이 고향에 내려가 있으마. 어차피 혼인할 생각도 없으니 우리가 데리고 있어도 문제는 없지.
충용후부도 방법을 잘 택한 게야. 여태 경성은 늘 충용후부를 향해서만 모든 풍파가 일었으니 노후야께선 우리보다 먼저 알아채고 내려놓으신 게지.”
이목청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상도 부자간에 대화를 나누니 한결 홀가분해진 듯했다.
조당의 권모와 권력다툼은 모든 사내들의 독약과도 같았다. 내려놓을 때 내려놓을 수 있는 우상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