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6화. 한밤중 상부로 가다
식사 후, 진강이 식기를 한쪽으로 치우고 북제의 정탐꾼을 제거해 형양 정씨를 끌어낸 일과 정효양에 대해 이야기했다.
진옥도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정효양 그놈이 숨은 인물일 줄은 몰랐네. 어찌 그동안 그자가 있는 걸 모를 수 있었는지, 참.”
“여태 누가 형양 정씨에게 신경을 썼다고. 정효양은 더 말할 것도 없지.”
진강의 말에, 진옥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사씨 장방 민 부인이 사윗감을 경성이 아닌 형양에서 정효순을 택했을 때 미리 그 속에 숨은 문제를 알아챘어야 했는데. 사씨 장방이 워낙 충용후부만 노리는 통에 자연스레 사씨 장방의 야망과 충용후부와 황실 사이의 갈등에만 치중하느라 매번 그 틈을 노리던 형양 정씨를 등한시 한거지.”
진강이 조용히 새 화두를 꺼냈다.
“법불사에서 났던 화재, 기억하지?”
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땐 내가 아직 경성에 돌아오기 전이었잖아. 범인이 나라고 생각했어?”
“그래! 처음엔 너라고 생각했지만 바로 아니란 걸 깨달았다. 네가 날 죽이려 했을 리는 없었을 테니까. 아직 경성에 돌아오기도 전이었고.”
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우리가 아무리 서로를 눈꼴사납다 여겨도 목숨을 잃긴 바라지 않지. 네가 죽는다고 너무 좋아서 춤이라도 출 것도 아니고.”
“법불사에서 불이 나던 날 사씨 장방과 영강후부가 엮여 들었다. 하지만 묵주를 찾지 못하고 무망 대사의 시신이 사라진 걸 알고 난 뒤로 한동안 방치됐다가 황숙께서 사씨 장방을 처리하시면서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지.”
진강이 말했다.
“연달아 살인 사건도 일어났고. 손 태의를 시작으로 한 대인까지. 하지만 아직 결론이 나질 않으니 바깥에서도 조용히 끝날 거란 말이 나오고 있다.”
진옥의 말에 진강이 픽, 코웃음을 쳤다.
“뭐가 끝날 거란 말이냐?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형양 정씨가 참으로 깊이 숨어 있더군.”
진옥이 진강을 돌아보았다.
“응?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것이냐?”
진강은 찻잔을 들어 이리저리 흔들다 단숨에 마셔버리곤 진옥에게 말했다.
“오늘 밤에 정효양을 만나보려 한다.”
“지금 영친왕부에 있다던데 만약 그자가 정효양이 아니라면 괜히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하는 격 아니겠느냐?”
“풀을 건들지만 않으면 뱀이 놀라지 않을 거라 생각해?”
진옥도 그냥 미간을 문지르다 손을 내저었다.
“됐다. 알아서 해라.”
진강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사방화의 손을 잡았다.
“갑시다.”
사방화는 두 사람이 한참은 이야기할 줄 알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으나 돌연 끝마무리가 된 것을 보고 어리둥절해했다.
“가기 아쉽소?”
진옥은 또 진강의 말을 한시도 놓치지 않았다.
“아쉬우면 궁에서 살아도 좋지.”
“꿈 깨라.”
진강이 사방화의 손을 잡고 어서재를 나섰다.
진옥이 바깥까지 두 사람을 따라 나와 배웅했다.
“더 이상 나갈 일은 없고?”
“상황 봐서.”
진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음에 답하며 걸어갔다.
진옥은 밖으로 떠나는 두 사람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의 곁엔 저 짙은 밤 외롭게 떠있는 달빛만이 함께였다.
잠시 후, 소천자가 다가와 조심스레 말했다.
“폐하, 밤바람이 찹니다. 옥체 보존하셔야지요.”
“소천자, 짐이 쓸모없다고 생각되지 않느냐?”
갑작스런 진옥의 말에, 소천자가 깜짝 놀랐다.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목숨이 위태로운 방화도 도울 힘이 없고, 진강에게 기대 이 남진 강산의 복잡한 일을 다 처리하고 있으니……. 궁에만 처박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이 자리의 역경이 느껴진다.”
소천자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폐하, 폐하가 계시기에 이 황성도, 황궁도 무탈합니다. 폐하가 계시기에 문무백관들도 안정되고, 나라가 흔들리지도 않고 강산도 굳건합니다. 강 소왕야도 엄청나고 대단한 분이고, 신분도 무척 존귀하시지만 이 나라 황제폐하가 아니십니다. 폐하와 강 소왕야는 서로의 위치가 다르시니 두 분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 다 다른 것일 뿐이지요. 모두 다 운명인 것입니다.”
“운명이라…….”
소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폐하께선 천자의 운명을 타고 나신 분이지요. 소왕야와 비교해 생각하지 마시옵소서.”
진옥이 처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차라리 내가 진강이었으면 좋겠구나.”
소천자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진옥은 할 수 있는 말일지라도 그는 함부로 할 수 없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옥은 한동안 말없이 자리에 서 있다 소천자에게 물었다.
“어마마마께선 어디 계시느냐?”
“정오에 영친왕부에서 돌아오신 뒤로 지금껏 쉬고 계십니다. 태후궁에 불이 밝은 걸 보니 충분히 쉬시고 다른 일을 하시는 듯합니다.”
소천자가 태후궁을 슬쩍 보며 말했다.
“아바마마께서 승하하신 뒤로 어마마마께서도 외로우실 테니 곁에 있어드려야겠구나.”
진옥은 태후궁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소천자는 서둘러 진옥의 뒤를 따랐다.
* * *
진강과 사방화는 이제 황궁을 나와 마차에 올라탔다.
“우상부로 가자.”
사방화는 의아한 눈으로 진강을 돌아보았다.
“응? 우상부엔 왜요?”
“정인화가 우상부 마차에 망가졌다니 가봐야 하지 않겠소?”
사방화는 우상 부인이 자신을 대했던 태도를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 반겨주지 않으실 듯해요.”
진강이 픽, 웃었다.
“반겨주지 않는다고 가지 말란 법 있나? 그냥 정인화를 밟은 마차 바퀴만 좀 보려는 것이오.”
곧이어 마차가 우상부에 다다랐다.
“문을 두드려봐라.”
마부는 마차에서 내려 우상부의 대문을 두드렸다.
“누구십니까?”
누군가 고개를 내밀었다.
“소왕야와 소왕비마마께서 오셨습니다.”
문지기는 깜짝 놀랐다. 아주 깊은 밤은 아니었지만 늦은 시간에 온 존귀한 손님을 보니 결코 소홀히 보낼 수는 없었다. 그렇게 서둘러 안에다 말을 전하고는 황급히 대문을 열어주었다.
진강은 가볍게 마차에서 내려와 사방화의 손을 잡아주었다.
이내 문지기가 조심스레 진강과 사방화에게 물었다.
“소왕야, 소왕비마마, 이 늦은 시간에 어찌…….”
진강은 말없이 문지기를 쳐다보기만 했지만, 문지기는 절로 말을 멈췄다.
잠시 후, 우상부의 집사가 소식을 듣고 나와 두 사람에게 인사를 올렸다.
“소왕야, 소왕비마마,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보통 이 시간엔 사전 연락 없이 찾아오는 손님은 없었다.
“듣자니 우상부 마차 바퀴에 정인화가 깔렸다던데? 마차를 좀 보여 다오.”
진강이 집사에게 말했다.
“그게…….”
집사는 깜짝 놀라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옆에 있던 사방화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사방화는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고, 어떤 말도 없었다.
“어서 가지 않고 무얼 하느냐! 한번 보는 것도 안 된단 말이냐? 그것도 우상 대인께 아뢰어야 하느냐?”
집사가 연신 진강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소인 어서 마차를 들여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 후, 마차가 아닌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우상, 우상 부인, 정일, 정성과 저 멀리 떨어져 걸어오는 이목청이 보였다.
진강은 조용히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윽고 우상이 다가와 진강과 사방화에게 물었다.
“소왕야, 소왕비,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오셨소?”
“마차 좀 보려고 합니다.”
“무슨 마차요?”
“정인화를 밟고 지나간 그 마차 말입니다.”
우상은 얼떨떨해 눈만 깜빡였다.
그때, 우상 부인이 갑작스레 화를 내며 말했다.
“강 소왕야! 적당히 하세요. 이 밤에 우상부까지 와 마차를 살펴보겠다고 소란을 피우시다니, 괜한 트집을 잡으려는 건 아니시오?”
진강은 눈썹을 치켜뜨며 우상 부인을 쳐다보았다.
“부인, 어찌 이리 화를 내십니까? 전 우상부와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제가 뭘 소란을 피웠다는 겁니까? 전 그저 마차를 보러 온 것뿐입니다.”
우상 부인이 말했다.
“마차가 뭘 볼 게 있다고요?”
“부인께는 그다지 별 볼 일 없는 마차겠지만, 제겐 다릅니다. 제가 찾던 정인화가 바퀴에 깔려서 말이지요.”
우상 부인이 또다시 화를 내려 하자 우상이 그녀를 말렸다.
“따라오지 말라니까 기어코 따라와서는 마차 하나 보겠다는 분에게 그냥 보여주면 될 것을 뭘 화를 내고 있소?”
“나리! 강 소왕야가 순수하게 마차만 보러 왔겠습니까? 분명 우리 벽이를 비웃으러 온 거라고요!”
다시 눈시울을 붉히는 부인을 보니, 우상도 골치가 아팠지만 그냥 집사에게 분부를 내렸다.
“가서 마차를 가져오너라.”
“일찌감치 분부해 곧 있으면 올 것입니다.”
우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정일, 정성이 다가와 진강에게 인사를 올렸다.
“영친왕부의 소왕야이셨군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진강은 두 어른을 보며 말을 고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형양 정씨에 이리도 올 사람이 없었습니까? 어찌 이렇게 연로하신 분들께서 이 먼 경성까지 오신 겁니까?”
정일은 순간 넋을 잃었고, 정성은 짧게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숙부님은 오랜만에 경성을 구경하실 겸 함께 온 것입니다.”
“우상부에 난리가 났고 대단하신 형양 정씨의 큰 공자께서 아우를 지키기 위해 베푸신 현량함으로 내일이면 온 천하가 찬양할 정도로 명성이 자자해졌던데 어찌 그 주인공은 보이질 않습니까?”
정일은 계속해서 진강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정성은 그런 숙부 정일과 우상을 한번 흘낏 보곤 대답했다.
“아들놈이 어찌나 고집이 센지 아우를 대신해 벌을 받겠다고 이 아가씨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여태껏 꿇어 앉아있네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오늘이 아니어도 상관없으니 나중에 술 한 잔 대접하겠다고 전해주세요.”
“예, 소왕야의 초대를 받다니 아들놈이 참으로 영광입니다.”
정성이 서둘러 답했다.
그 순간, 이목청이 다가와 진강을 이리저리 살펴보곤 물었다.
“강 소왕야, 황궁에서 나오는 길입니까?”
“소식이 어찌 그리 빠르지?”
이목청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친근하게 물었다.
“마차를 보려고요?”
“그럼 왜 왔겠어?”
이목청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소왕야께 드려도 상관은 없는데요.”
“다 망가진 마차로 뭘 하라고?”
때마침 누군가 마차를 가져와 대문 앞에 놓았다.
진강은 바로 마차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우상 부인은 겨우겨우 화를 참고 있었지만, 진강을 보자 다시 또 딸 이여벽이 생각나 버럭 화를 냈다.
“강 소왕야! 한참이나 보셨는데 뭘 알아내긴 하셨소?”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아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나 평범한 마차가 어찌 소중히 품에 넣어둔 정인화를 짓밟을 수 있답니까?”
진강은 볼일이 끝나자 사방화의 손을 잡고 말했다.
“갑시다.”
사방화는 눈 깜짝할 사이 진강의 인도에 따라 마차에 올라탔고, 마차는 순식간에 우상부를 떠나갔다.
갑작스럽게 와서 영문도 모르게 떠나간 진강과 사방화, 우상부 대문 앞에 모인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 넋이 다 나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