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3화. 애지중지하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짧은 반나절간의 혼약이 한줌 재로 사라져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정효양의 눈꺼풀도 살짝 떨렸다.
성지가 다 타고, 진옥이 황명을 내렸다.
“다시 명한다. 금연 군주와 정효양 공자에게 사혼을 내리겠노라.”
소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폐하.”
의지관은 서둘러 그 자리에서 성지를 써 내려갔다.
그런데 성지가 반쯤 완성되었을 즈음, 정효양이 갑자기 소리쳤다.
“안 됩니다! 동의할 수 없습니다!”
진옥이 차가운 눈빛을 번쩍이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껏 네놈이 멋대로 구는 것도 다 받아주었거늘 더 이상 3번은 용납할 수 없다. 네 뜻을 확실하게 표해라.”
그러자 정효양이 목을 빳빳이 쳐들며 말했다.
“저리 무서운 배필을 맞았다간 일찍 죽을 겁니다. 결코 그럴 순 없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걸 보니 멀쩡하긴 한가 보구나. 네가 진강의 정인화를 가로챘으니 죽고 싶지 않다면 어서 눈치껏 행동해라. 금연이 아니면 널 감싸줄 이는 아무도 없다.”
정효양이 깜짝 놀랐다.
“예? 제 뒤를 따라오던 그놈이 강 소왕야셨다고요?”
“설마 진강이 네놈 하나 따라잡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느냐?”
정효양도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예, 이미 말 서너 마리가 목숨을 잃을 정도로 달렸습니다.”
“그 사람이 정말 진강이라면 네놈이 얼마나 멀리 도망가든 아무 소용없다.”
진옥의 말에 정효양은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이다 급기야 새집이 생겼다.
“알겠습니다. 혼인하겠습니다. 군주님, 황가의 그 어떤 분께도 아무렇게나 막 고자질 하시면 안 됩니다.”
금연도 정효양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이 날 괴롭히지만 않는다면 그럴 일은 없습니다.”
“여인을 괴롭히는 게 무슨 자랑이라고, 저도 그럴 일은 없습니다.”
이어진 정효양이 답에, 금연이 순간 기가 막혀 실소를 했다.
“네? 그럼 저 여벽의 얼굴에 상처를 낸 분은 누구신가요?”
“마차에 타 있는 사람이 여인인 줄 몰랐을 뿐입니다! 제 정인화를 망가트린 놈은 사람이든 귀신이든 다 채찍을 휘둘렀을 거예요.”
금연도 이제 정효양이 지긋지긋하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어서 가서 씻기나 하세요. 더러워서 못 봐주겠네.”
“처음 경성에 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어딜 가서 씻으란 겁니까? 군주님의 대장공주부라도 갈까요? 대장공주마마께서 절 때리진 않으려나요?”
“때리기만 하면 다행이지. 공자님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르니 조심하세요.”
금연이 말했다.
정효양은 머리를 싸매고 불안한 듯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정성에게 물었다.
“그럼 어쩌지? 아버지, 쉴 곳은 마련했습니까?”
정성도 생각 없는 정효양을 보니 점점 화가 났다.
“경성에 들어오자마자 한숨도 쉬지 못했는데 쉴 곳은 언제 찾았겠느냐?”
정효양은 폭,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형양 정씨가 이리도 무능하다니. 우리 땅이었던 형양을 떠나 천자의 발아래로 오니 쉴 곳도 없다는 게 참 초라합니다. 형양에선 늘 천지를 누비고 다니던 제가 경성에선 하루아침에 압송되다니, 흥이 다 깨졌습니다.”
정일도 끝내 화를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망할 놈 같으니, 다 네놈의 죄로 벌어진 일인 걸 아직도 모르겠느냐?”
“예, 종조부님은 연세도 지긋하시니 어서 쉬셔야지요. 제가 나가서 찾아보겠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저 은전 하나 남은 게 없는데요.”
정성은 이제 더 이상 지킬 면목도 남아있지 않다는 생각에 한숨만 나왔다.
“그동안 대체 뭘 하고 다녔던 게야!”
“5천 냥을 챙겨 나왔습니다만 모두 다 써 버렸으니 그냥 빈털터리네요.”
정효양의 느긋한 대답에, 정일이 수염을 덜덜 떨며 외쳤다.
“너……, 5천 냥을 보름 만에 다 썼단 말이냐?”
“종조부님, 뭘 그리 놀라십니까? 집을 나오면 힘든 일밖에 없다는데 은전을 쓰지 않고 어찌 버티겠습니까?”
정일은 기가 차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냥 은전 한 묶음만 정효양 소에 쥐어주었다.
이내 정효양이 서둘러 돌아서는데, 돌연 금연이 그를 불러 세웠다.
“효양 공자! 어딜 가는 건가요?”
“군주님 말씀대로 씻으러 갑니다.”
“혼인 성지를 받고 가셔야죠.”
“대신 받아주면 되잖습니까.”
정효양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금연이 눈썹을 치켜세우고 매섭게 노려보자, 정효양은 금세 기가 죽어 서둘러 의지관을 재촉했다.
“알겠습니다. 반나절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멀었습니까?”
“거의 다 됐습니다.”
의지관은 당황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평생 이런 사혼은 단 한 번 본 적도 없었다. 거기다 의지관을 재촉하는 혼인 당사자라니…….
한때 세상을 기함하게 했던 사방화, 진강의 그 여러 차례 반복된 성지 이후, 형제가 돌연 상대를 맞바꿔 혼인하는 건 더더욱 보기 드문 일이었다.
진옥은 줄곧 말이 없었고, 장내는 매우 고요했다.
그때, 영친왕비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강이와 참 많이 닮았네. 어릴 적 공자처럼 세상 무서울 것 없이 활개를 치고 멋대로 굴었었는데. 효양 공자, 우리 영친왕부로 같이 가지.”
정효양이 영친왕비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예? 왕비마마, 절 영친왕부에 머물게 해주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영친왕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상 뜻을 받들어 경성에 온 것이니 황상께서 당연히 머물 곳을 마련해 주셨을 테지만 우리 영친왕부에도 공자 하나 머물도록 해줄 뜰은 차고 넘쳐. 내 조카 금연이와 정혼했으니 이제 공자도 한 가족이나 다름없지.”
“감사합니다, 왕비마마! 영친왕부가 그렇게 찬란하고 화려하다던데 그럼 저도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신나서 답하는 정효양을 보고, 영친왕비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의지관도 성지를 마무리하자 소천자가 양손으로 받들며 크게 외쳤다.
“금연 군주님, 정효양 공자님께서는 성지를 받으십시오.”
금연은 바로 자리에 꿇어앉아 성지를 받을 준비했지만 정효양이 오지 않자 눈썹을 들썩였다. 그에 정효양이 곧장 다가와 그녀의 옆에 무릎을 꿇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진옥이 정효양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짐은 다시는 이 성지를 돌려받고 싶지 않으니 그리 알라.”
정효양이 입술을 삐죽였다.
“군주님이 제 성격을 참아주신다면 저 또한 성심성의껏 다할 것입니다.”
진옥은 말없이 손을 내저었다.
정효양은 곧 성지를 품에 안고 영친왕비에게 말했다.
“왕비마마, 우선 영친왕부로 가면 됩니까?”
영친왕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방화에게 말했다.
“그래, 방화야. 이제 우리가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으니 돌아가자꾸나.”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이곤 금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금연이 성지를 들고 사방화를 향해 웃어 보였다.
“어머니를 잘 달래드릴게요.”
영친왕비는 엷게 웃으며 금연을 나무랐다.
“이것아, 저런 배필을 선택해 앞으로 감당해야할 게 산더미일 텐데 뭐가 그리 신나? 어서 화병 난 어머니부터 잘 달래드려라.”
“알겠습니다, 외숙모님.”
금연이 성지를 가지고 먼저 앞서가자 정효양은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영친왕비도 사방화와 함께 사람들에게 인사한 뒤 우상부를 빠져나왔다.
* * *
우상부 대문 앞.
금연의 마차를 붙잡고 무언가 말을 하고 있는 정효양이 보였다.
귀가 밝은 사방화는 멀리서도 정효양과 금연의 대화가 또렷이 다 들렸다.
“깨끗하게 씻고 군주님께 가겠습니다.”
정효양이 말했다.
“됐습니다, 영친왕부에 계시면 제가 갈게요. 저희 어머니는 그리 쉽게 화가 풀리는 분이 아니시라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금연이 말했다.
“사위가 될 사람이 언제까지고 얼굴을 비추지 않을 순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금연이 바로 정효양을 노려보았다.
“발을 들여놓을 수 있을 때 알려드릴 테니 그때 오세요. 금방 형양으로 돌아가지 않으시겠다면 우선 영친왕부에 좀 계시고요.”
정효양이 눈을 깜빡였다.
“장모님을 달래드리지 않고 어찌 형양으로 갈 수 있겠습니까?”
금연은 거칠게 마차 휘장을 내려버렸다.
“어머니가 기분 좋게 동의하실 수 있도록 방법을 생각해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께선 하루가 멀다고 당신을 귀찮게 구실 테니 편히 지낼 생각은 하지 마시고요.”
정효양이 애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꼴도 말이 아닌데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 당신을 불러 세운 건지…….”
금연은 정효양의 말을 무시한 채 그대로 마차를 출발시켜버렸다.
정효양은 후회가 막심한 듯 떠나는 금연의 마차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영친왕비도 사방화와 그 모습을 지켜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저놈 참 재미있다니까.”
사방화도 정효양이 웃길뿐더러 눈앞의 저 정효양이 이제껏 본 정효양이 맞는지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형양 정씨 가주 정일도, 정효양의 아버지 정성, 형 정효순도 하나같이 정효양을 감싸는 것을 보니 한눈에 봐도 정효양의 입지는 형양 정씨 내에서 실로 엄청나게 막강한듯했다.
언행에 거리낌도 없고 우상부 마차를 들이받는 걸고 모자라 이여벽에게 상처를 입히고도 금연과의 혼인 성지를 얻어낸 정효양, 그는 정말로 좋은 운명을 타고난 것일까? 이 엄청난 일을 반드시 그렇게만 설명할 순 없을 것이다.
이내 영친왕비가 정효양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효양 공자, 이만 가자.”
정효양은 힘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영친왕비와 사방화는 마차에 올라타고 정효양에겐 말 한 필을 내주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영친왕비와 사방화는 아무 대화도 하지 않았다.
* * *
순조로이 영친왕부로 도착하자 희순이 마중을 나와 기쁜 소식을 전했다.
“왕비마마, 소왕비마마! 소왕야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영친왕비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강이가 돌아왔다고?”
사방화도 몹시 의아해했다.
“이렇게나 빨리?”
희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조금 전에 오시어 낙매거로 가셨습니다.”
사방화는 곧장 발걸음을 돌렸다.
“어머님,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영친왕비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래, 난 효양이 머물 곳을 마련해주고 가마.”
달려가는 사방화를 보고, 영친왕비가 웃으며 희순에게 분부를 내렸다.
“희순, 전에 의지가 우리 왕부에서 머물던 뜰을 청소해 효양이 쓸 수 있게 해주어라. 좀 오래 머물듯하니 예를 다해 정성껏 대해야한다.”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왕비마마.”
희순은 들어오자마자 이 남진 경성에 폭풍우를 몰고 온 정효양을 유심히 살펴보려했지만, 얼마나 엉망인지 얼굴조차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정효양 공자님, 절 따라오시지요.”
영친왕부를 둘러보던 정효양은 아무렇지 않게 공수를 하며 여유를 보였다.
영친왕비는 희순을 따라가는 정효양을 보다가 춘란을 불렀다.
“춘란, 나랑 방화가 나온 뒤 우상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보고 오너라.”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왕비마마.”
춘란이 떠나고 영친왕비는 본원으로 돌아갔다.
* * *
영친왕부 낙매거.
사방화가 낙매거 뜰에 들어서기도 전 임칠과 옥작이 그녀를 맞이했다.
“소왕비마마! 소왕야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방에서 세욕 중이세요.”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이곤 나지막이 물었다.
“다친 덴 없으시고?”
“다친 덴 없는 듯 보이셨으나 세욕 중에 절대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게다가 몹시 피곤해 보이시는 게 안색도 그다지 좋지 않아보이셨고요.”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없이 방으로 들어섰다.
문턱을 넘고 화당을 지나 본방을 통해 내실로 들어서니, 세욕통에 곤히 잠든 진강이 보였다.
어찌나 피곤에 지쳤는지 사방화가 가까이와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동안 얼마나 고단했을까……. 사방화는 애처로운 눈으로 진강을 잠시 바라보다, 세욕통에 손을 넣어 물 온도를 확인했다. 다행히 물은 따뜻했고 또 지금은 여름이라 이렇게 잠들어도 지장은 없을 것 같았다.
사방화는 행여 진강이 깰까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사방화가 돌아선 순간, 진강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사방화가 고개를 돌리자, 진강이 여전히 눈 감은 그대로 입을 열었다. 너무 지친 탓에 다소 쉰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가지 마시오. 내 옆에 있어 주시오.”
사방화는 마음이 아프기도 하면서 엷은 웃음이 났다.
“그래도 방에 가서 주무셔야지 여기서 주무시면 어떡해요?”
“한 발짝도 움직이기 싫어.”
진강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어요. 그럼 의자 가져와서 옆에 있어 드릴게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방화도 의자를 가져와 세욕통 옆에 놓고 자리에 앉았다. 진강은 다시 사방화의 손을 꼭 잡고 잠이 들었다.
사방화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잠든 진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조심스레 진강의 짙은 눈썹을 따라 눈, 코, 입을 소중히 만져보기도 했다.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듯, 그녀의 손은 진강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잠시 후, 진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방화, 내가 보고 싶었나 보오?”
사방화는 곧장 손을 떼며 말했다.
“주무세요. 방해 안 할게요.”
그때, 진강이 갑자기 일어나 그대로 사방화를 안아들었다.
“침상으로 가서 잡시다.”
“물바다를 만드시면 어떡해요.”
“다시 치우면 돼.”
진강은 그렇게 병풍 뒤에서 나와 창가 휘장을 치고 침상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