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2화 (822/978)

822화. 혼인 상대가 바뀌다 

이윽고 정일도 다가와 정중히 공수를 올렸다. 

“대장공주마마, 부디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십시오. 형양 정씨에선 효순을 제외하면 마땅히 금연 군주의 짝으로 내세울 만한 자손도 없습니다. 이게 다 형양 정씨가 복이 없어 군주를 놓치게 된 것입니다.”

“그런 말은 필요 없으니 하지 마세요. 연아, 가자!”

대장공주가 옷자락을 펄럭이며 뒤돌아섰다.

그 순간, 정효양이 소리를 쳤다. 

“잠깐만요!”

대장공주가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정효양을 바라보았다.

“아직 할 말이 남은 게냐? 네가 한 짓을 형이 나서서 대신하겠다는데 이젠 우리가 가는 것도 막는단 말이냐!”

정효양은 곧 정일을 보며 물었다.

“종조부님(*從祖父: 할아버지의 형제), 방금 하신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어째서 형양 정씨에 형님을 제외하고 금연 군주님 짝으로 내세울만한 인물이 없다는 거죠? 형양 정씨에 오직 형님만 잘났다는 것입니까?”

정일도 정효양을 당해낼 재간이 없는 듯 맥없이 답했다.

“넌 가만히 있거라.”

정효양이 콧방귀를 뀌었다.

“어차피 이 아가씨와는 혼인하지 않으려했는데 형이 가주신다니 그렇게 하라고 하지요. 그럼 전 형님을 대신해 금연 군주님과 혼인하겠습니다.”

정일은 순간 할 말도 잃고 멍해졌다.

그때, 불같이 화를 내는 대장공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정말이지, 황당무계하구나! 네놈이 뭔데 우리 딸과 혼인하겠단 말이냐! 꿈도 꾸지 말거라!”

그러자 정효양이 어깨를 으쓱하며 당당하게 말했다.

“대장공주마마, 지금 제 모습이 구질구질해 보이는 건 전부 우상부 사람들에게 맞아서 그런 것입니다. 씻고 가꾸면 저도 꽤 봐줄 만합니다. 정인화도 따낸 몸인데 금연 군주님 짝이 되지 못할 건 또 뭐가 있겠습니까? 눈 크게 뜨고 보십시오. 전 공주마마께서 형양 정씨와 사돈을 맺으려 하시는 그 마음을 보고 혼인하겠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면 저도 혼인할 이유는 없지요.”

“네놈이…….”

대장공주도 말문이 막혀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정효양은 다시 금연을 바라보았다. 구질구질한 옷차림에 얼굴도 된통 맞아 형편이 없었지만, 눈빛만은 매우 당당하고 도도하기까지 했다.

“금연 군주님, 저와 혼인하시겠습니까? 물론 형님보다 못한 부분도 있겠지만, 온종일 엄한 스승님처럼 구는 형님보단 훨씬 인생의 풍류도 아는 사람입니다. 매일 새로운 일로 즐겁게 해드리겠다 약조하겠습니다. 저도 형양 정씨 적통입니다. 우리 가문도 꽤 괜찮은데 신분으론 전혀 문제없지 않습니까?”

대장공주가 바로 소리쳤다.

“연아! 받아줘선 안 돼! 네가 이 혼사를 받아들이는 순간, 이 어미는 여기서 머리 박고 죽을 것이다!”

정효양은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대장공주마마, 아무리 싫어도 그렇게까진 하지 마십시오.”

대장공주는 이마에 핏줄이 설 정도로 화가 나 금연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려했지만 금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장공주는 금연이 열심히 정효양을 살펴보는 것을 보고 얼굴이 다 하얗게 질려버렸다.

“연아, 너 설마……. 네가……, 저 버릇없이 자란 놈에게, 절대로…….”

“어머니.”

금연이 단호하게 말을 끊자, 대장공주는 순간 멍하게 딸만 쳐다보았다.

고요한 분위기 속, 금연이 정효양에게 질문했다.

“그럼 혼인하면 공자님 형님처럼 평생 잘 대해주겠다 확언할 수 있나요?”

“당연합니다!”

정효양이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금연은 더 가늘게 눈을 떴다.

“말로 하는 건 누구나 가능하죠. 어찌 그리 망설이지도 않고 답하세요? 공자님 형님께서도 조금 전까진 내게 한평생 잘해주겠다 약조하셨지만 공자님을 위해 망설임도 없이 다른 사람과 혼인하겠다고 가버렸습니다. 역시 직접 행동으로 보기 전까진 말로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겠습니다.”

정효양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다가 돌연 얼굴색을 굳혔다.

“보아하니 군주님도 의도가 있는 분이군요.”

금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 말씀하시니 저도 장담은 못하겠습니다. 전 성격이 불같아 한번 화가 나면 소 10마리도 절 못 말립니다. 제 말씀은 그냥 못 들은 걸로 하시지요.”

그때, 금연이 말했다.

“허락할게요.”

“뭐라고? 연아, 너 미쳤니?”

대장공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금연을 향해 소리쳤다. 

정효양도 눈썹을 까딱이며 금연을 돌아보았다. 

금연은 어머니 대장공주를 보며 말했다.

“어머니, 저 제정신이에요. 사람은 인연으로 이루어진다고 믿고요. 효양 공자님 성격이 좀 괴팍하시긴 하다만 이런 서방님이 있다면 적어도 남들에게 괴롭힘 당할 일은 없지 않겠어요?”

정효양이 고개를 까딱하며 호응했다.

“그렇지, 당연히 남들이 우리 부인 털끝하나 건드릴 수 없게 해야지.”

대장공주는 바로 코웃음을 쳤다.

“이런 막돼먹은 애가 널 괴롭히면 어떡하니?”

금연은 홀연히 진옥을 돌아보았다.

“뭐 제가 한 선택인데 그것도 제 업보겠지요. 그리고 제가 괴롭힘을 당하면 폐하와 어머니께서 나서주시지 않겠습니까? 만약 서방님이 절 괴롭히신다면 폐하께 성지를 청해 죽여 버리게 만들면 됩니다.”

정효양은 바로 눈을 동그랗게 뜨곤 공포에 질린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와, 무시무시한 여인이구만? 됐습니다, 군주님과 혼인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공자님 뜻대로 될 수 없어요. 폐하. 저와 정효양 공자님께 혼인 성지를 내려주시길 청하옵니다.”

진옥은 금연을 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방화 역시 너무도 빠르게 전개되는 상황에 조용히 침묵만 지켰다. 현실은 본래 상상보다도 더 극적으로 흘러가는 법이었다.

그리고 영친왕비를 필두로 한 주변엔 어느새 좌상, 영강후를 비롯한 대신들도 모여 있었다. 다들 일이 어떻게 될지 지켜보러만 온 것이었으나 돌연 혼사의 상대가 바뀌어버린 이 상황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특히 모두가 금연을 다시 보게 되는 계기였다. 아주 쉽게 정효순이 아우를 대신하겠다는 것에 동의한 것도 모자라 얼굴빛도 변하지 않고 정효양과 혼인하겠다고 선언하고 직접 혼인 성지까지 청했다.

누군가는 금연이 진옥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고 정효순도 혼사를 포기하니 홧김에 정효양을 받아준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이 정효양을 보니 자연스레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세상을 거칠 것 없이 누비는 자유로운 영혼 진강. 

버릇없이 자라 제멋대로 구는 정효양을 보니 어딘가 진강이 떠오르긴 했지만 사실 정효양은 진강보다 도를 넘는 수준으로 난폭해 보이는 청년이었다. 무엇보다 형양 정씨가 아무리 유서 깊은 세가 대족이라 한들 감히 진강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신분 아니던가.

그리고 진강이라면 애초에 이렇게 붙잡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진강을 떠올리니 다들 또 자연스레 정인화를 생각했다. 정효양이 들고 있던 정인화가 망가졌으니 이제 진강은 어떻게 나올까? 이를 알게 되면 그가 과연 정효양을 가만히 둘까? 왠지 앞으로 또 하나의 사건이 펼쳐질 듯했다. 

* * *

잠시 후, 진옥이 금연에게 말했다.

“고모님도 동의하지 않으시니 그냥…….”

금연이 곧바로 진옥의 말을 끊었다.

“어머니 말씀이 먼저이긴 하나 제 혼사는 오직 제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효양 공자님과의 혼인에 뜻을 굳혔으니 폐하께선 성지를 내려주십시오.

효순 공자님은 여벽과 혼인하고, 전 효양 공자님과 혼인한다면 우상부와 형양 정씨도 더는 반목하지 않을 테고 저희 대장공주부와 형양 정씨 또한 억울하지 않을 것이니 최상의 결말 아닙니까? 저도 진심으로 원합니다.”

진옥은 금연을 보며 잠시 말이 없었다. 

이 방법은 확실히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형양 정씨, 우상부, 대장공주부의 분쟁을 면할 수 있었고 모두가 만족할 테니 이여벽의 뜻도 크게 중요하지는 않게 됐다.

이여벽이 억울하다고 한들 금연이 있는데 큰소리나 낼 수 있겠는가? 혼사만 놓고 생각하자면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금연 하나 뿐이었다.

이내 진옥이 사방화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사방화는 계속해서 형양 정씨 사람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특히나 이곳에 끌려 들어와 이 어마 무시한 폭풍우를 몰고 온 정효양을 매우 눈여겨봤다.

그녀는 정효양이 결코 풍문과 같은 사람이 아닐뿐더러 세상사를 완전히 뒤로 한 채 멋대로 구는 사람도 아니라고 감히 확신할 수 있었다.

확실히 어느 부분에 있어선 진강이 생각나긴 했지만 굳이 집어 말하자면 딱히 닮은 점도 없었다. 남달라 보이는 인물이었으나 진강과는 확실히 달랐다. 진강은 사방화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늘 솔직하고 소탈했지만, 정효양은 속마음은 저 깊이 감춰둔 채 절대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으로 보였다.

금연이 그런 사람과 혼인한다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사방화도 특별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특히나 금연은 목적을 가지고 형양 정씨에 시집을 가는 것이었으니 정효양이 그것을 꿰뚫어 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방화도 끝내 말이 없어졌다.

우상부 객정 앞이 돌연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그때, 금연이 사방화에게 다가왔다.

“새언니, 새언니도 반대하실 건가요? 정효양 공자님은 좀 거칠어 보여도 막상 혼인을 하면 가족을 지키는 굳건한 사람이 되진 않을까요? 정말 날 괴롭힌다면 새언니도, 강이 오라버니도 절대 가만히 계시진 않을 거잖아요.”

그러자 정효양이 금연을 향해 말했다.

“후회합니다. 군주님과 혼인하지 않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이 거룩한 천자의 발아래 후회한다면 끝입니까? 폐하의 앞입니다. 한번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도 없지요. 공자님과 혼인할 테니 그리 아세요.”

금연이 정효양을 노려보며 톡, 쏘아붙인 뒤 다시 사방화에게 말했다.

“새언니, 동의해주실 거예요? 폐하는 새언니 뜻을 따라주시잖아요. 무슨 말씀이라도 해보세요.”

사방화는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 평생을 결정지을 혼사를 내가 어떻게 반대할 수 있겠어요.”

“들으셨죠? 새언니도 반대하지 않는다니 어서 성지를 고쳐주십시오.”

금연이 옷소매에서 성지를 꺼내 진옥에게 내밀었다.

그 순간, 대장공주가 금연을 노려보며 독설을 퍼부었다.

“저놈에게 시집가려거든 이 어미와는 끝인 줄 알아라.”

하지만 금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 효과도 없는 말씀을 대체 몇 번째나 하시는지……. 폐하, 어서 성지를 고쳐 내려주십시오.”

결국 화가 난 대장공주가 옷자락을 펄럭이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진옥은 살짝 한숨을 쉰 뒤 금연에게 말했다.

“급하지 않으니 효순 공자가 이 아가씨 답을 듣고 오면 다시 결정하자.”

“여벽의 뜻이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무슨 이유가 됐든 절 그렇게 쉽게 버리고 다른 사람과 혼인하겠다고 가버렸으니 저도 아우를 생각하는 그 마음을 충분히 헤아려준 것입니다.

어쨌거나 동생을 대신해 모든 걸 감내하겠다는 것도 효순 공자님 결정이었으니 오늘 일은 전부 효순 공자님 일이지 효양 공자님과는 상관없습니다. 그럼 저희 혼사도 아무 상관없는 별개의 일인데 왜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금연이 말했다.

“정말 결정한 것이냐?”

“예. 결정했습니다, 폐하.”

진옥도 고개를 끄덕이며 금연이 내민 성지를 받아 소천자에게 말했다.

“좋다, 소천자. 이 성지는 파기하라.”

소천자는 서둘러 성지를 불에 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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