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0화. 상처와 꽃을 배상하려면 (1)
잠시 후, 건장한 사내들이 밧줄로 묶인 정효양을 데리고 나타났다.
정효양은 이미 머리가 산발이 되고 옷도 엉망이 돼있었다. 몸에도 채찍 흔적이 있고, 얼굴에도 시커먼 자국이 있어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사방화는 엉망진창인 그에게서 두 눈빛만은 아주 맑게 빛나는 것을 확인했다. 정효양도 사내들에게 이끌려 비틀거리며 걸으면서도 몹시도 빠르게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그러다 정효양과 사방화는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잠시 멈칫하던 정효양이 바로 고개를 홱 돌렸다.
“아우야?”
정효순은 거의 누구인지조차 알아볼 수 없는 정효양을 확인하듯 불렀다.
그러자 정효양은 정효순이 꿇어앉아 있는 것을 보고 서둘러 소리쳤다.
“형님! 어찌 꿇어 앉아 계세요!”
정효순이 말했다.
“황제폐하께 어서 인사부터 올리거라.”
“효양, 어서 폐하께 인사부터 올리도록 해라.”
정성도 서둘러 말했다.
정효양은 아버지, 형의 시선을 따라 진옥을 바라보았다. 진옥은 황제 의복이 아닌, 사방화가 진강에게 만들어 준 평범한 옷을 입고 있어 그저 청아한 귀공자처럼만 보일 뿐이었다.
곧 정효양이 살짝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황제폐하? 이 사람이 황제라고요?”
소천자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폐하를 뵙고도 이리 무례하게 굴어서는 안 되지요!”
정효양은 아랑곳 않고 다시 사방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저 사람은 누굽니까? 황후마마이십니까?”
소천자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그분은 영친왕부의 소왕비마마이십니다!”
정효양은 눈을 깜빡거리더니 이내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아, 알겠다. 황후가 될 뻔했던 그 소왕비마마시지요? 폐하와 소왕야가 죽을 듯 다투게 만든 그 소왕비마마, 충용후부 아가씨. 천하가 다 알지요.”
소천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정효양 공자님! 지금 우상부 아가씨를 저렇게 만들어놓고도 무릎 꿇고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까!”
정효양은 더 당당히 허리를 곧게 펴며 말했다.
“잘못한 게 없는데 어찌 죄를 인정해야 한단 말이지?”
소천자는 어이가 벙벙해진 채로 진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진옥은 정효양의 방자함에도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평소처럼 담담한 얼굴이었다.
“우상부 아가씨 얼굴을 다치게 만들었는데 어찌 죄가 없단 말이냐?”
정효양이 콧방귀를 뀌었다.
“당연히 제 앞길이 막혔으니 채찍이라도 휘둘러 길을 터야지요.”
진옥의 안색이 굳어졌다.
“뭐? 네가 휘두른 채찍에 사람이 다쳤다! 누군가 길을 막았다면 비켜 달라 청하면 그만이지, 네 앞길을 막으면 사람이 다쳐도 상관없단 말이냐?”
“형양에선 아무도 제 앞길을 막지 못합니다. 다 자업자득이지요.”
더 당당하게 나오는 정효양을 보고, 정효순이 다급히 말했다.
“효양! 멋대로 지껄여선 안 된다.”
“형님, 난 사실을 말하는 거잖아요.”
동생 정효양의 답에 정효순은 아예 넋이 다 나가버렸다.
그 순간, 우상 부인이 소리쳤다.
“형양은 형양일 뿐이지! 천자의 발아래 다 같은 곳 아니냐! 천자의 발밑에서 건방지게 굴어놓곤 폐하의 앞에서까지 이리도 큰소리를 치다니 참으로 가증스럽기 짝이 없구나. 폐하, 저놈 좀 보십시오. 저런 태도로 일관하는 놈을 어찌 일벌백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정효양도 지지 않고 더 큰소리를 쳤다.
“그래요, 바로 당신! 당신이 내 정인화만 짓밟지 않았어도 내가 그렇게까지 했겠습니까? 나도 도리를 아는 사람입니다! 아직 당신에게 내 정인화를 보상해달라고 하지도 못했습니다! 당신 딸 얼굴값이 그리도 비쌉니까? 내 정인화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보물이란 말입니다!”
“정인화?”
진옥이 눈썹을 들썩였다.
사방화도 정효순을 바라보았고, 영친왕비도 순간 넋을 잃었다. 객정 내의 사람들도 모두 사연을 알았기에 일제히 깜짝 놀랐다.
이내 대장공주가 의아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강이는 정인화를 찾으러 청오산까지 떠난 거 아니었나? 어찌 여기도 정인화가 있단 말이지? 그게 그렇게 아무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꽃이었나?”
정효양이 다시 당당하게 외쳤다.
“어느 누가 정인화를 아무나 구할 수 있답니까! 보름간 심혈을 기울여 쟁취해 형님에게 보여주려 한 건데 경성에 다다르자마자 귀퉁이에서 튀어나온 마차에 짓밟힐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게다가 여기 이 부인께선 누가 감히 우상부 마차에 부딪혔냐고 하시며 되레 날 엄벌에 처하라시는데 마침 폐하가 계시니 여쭙겠습니다. 우상부라는 가문은 원래 이리 강자로서 약자를 업신여기는 그런 집안이었습니까?”
“난 어찌 네놈의 정인화를 보지 못한 것이냐?”
우상 부인도 화를 내며 말했다.
“그걸 못 보셨단 말입니까? 지금 바로 마차 바퀴에 가서 짓이겨진 꽃잎이 있는지 살펴보고 오십시오! 전 절대 거짓을 말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마라! 난 정인화는 본 적도 없어!”
우상 부인이 한사코 인정하지 않자, 정효양도 화를 냈다.
“당신이 못 보면 끝인가요? 내 정인화가 처참히 짓밟힌 건 상관도 없고?”
우상 부인은 집사를 돌아보았다.
“집사, 가서 마차를 가지고 오너라.”
집사가 서둘러 바깥으로 향하자, 진옥이 소천자에게 분부를 내렸다.
“소천자, 집사와 함께 다녀오너라.”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폐하.”
소천자도 즉각 밖으로 떠나고, 진옥은 다시 우상 부인을 보며 말했다.
“말은 근거가 없으니 사실로 확인되면 다시 이야기해도 늦지 않네.”
우상 부인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이내 정효양은 콧방귀를 뀌며 정효순에게 다가갔다.
“형님! 왜 꿇어 앉아계세요. 어서 일어나세요.”
정효순은 맥이 빠진 채로 정효양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우야, 멋대로 행동하지마라. 폐하 앞에서 어찌 함부로 구는 것이냐.”
정효양은 억울하다는 듯 한껏 더 눈을 부릅떴다.
“예! 폐하 앞에선 당연히 예를 갖춰 행동해야겠지요. 물론 내가 매번 사고를 치고 다니긴 했지만, 이번 일은 내 탓이 아니에요. 보름동안 애써 지킨 정인화를 어떤 꼬마가 따라붙어 내내 따라다녔어요! 무려 말 세 마리나 죽을 정도로 달린 후에야 그놈도 겨우 따돌렸다고요!”
정효순이 눈썹을 찌푸렸다.
“보름 내내 집에 오질 않더니 정인화를 따러 간 것이었느냐? 어찌 이리 멋대로 구는 것이냐! 게다가 정인화는 아주 가파른 곳에만 있다던데 네게 무슨 일이라도 나면 나랑 아버지가 훗날 구천에 계신 네 어머니를 어찌 뵈라고!”
“형님! 평생 매번 그 말만 하는데 좀 신선한 이야기는 없어요? 내가 죽어 구천에 계신 어머니를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정효양의 반응에, 정효순은 실로 어안이 벙벙해졌다.
정효양은 손을 내젓고 싶었지만, 뒤로 묵인 밧줄로 인해 손을 움직일 수 없자 진옥에게 말했다.
“폐하! 이제 좀 풀어주시면 안 됩니까? 전 죄인이 아닙니다! 팔이 너무 저립니다.”
그러자 우상 부인이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폐하! 절대 풀어주시면 아니 됩니다!”
“부인! 폐하를 비롯해 정 어르신, 정 대인, 큰 공자까지 있는데 사람을 묶어둔다고 능사가 아니요! 폐하, 어서 풀어주셔도 됩니다.”
우상은 부인을 힐끗 본 후, 진옥에게 정중히 공수를 올리며 말했다.
진옥은 가볍게 손만 휘둘렀다. 그에 진옥의 손끝에서 퍼져나간 장풍이 정효양을 묶고 있던 밧줄만 정확히 끊어냈다.
“아주 훌륭한 솜씨를 지니고 계시네요, 폐하.”
정효양이 눈을 반짝이며 외쳤지만, 진옥은 아무 말이 없었다.
정효양은 곧 굳어진 어깨를 펴며 앞으로 다가가 정효순을 일으켰다.
“형님, 일어나세요.”
정효순이 할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정일이 즉각 입을 열었다.
“효양아, 네 잘못으로 네 형님이 대신 벌을 받겠다고 하더구나.”
정효양은 일순 어안이 벙벙해졌다.
“지은 죄가 없다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 무슨 벌을 받는다는 겁니까?”
정효순이 또 즉각 동생을 꾸짖었다.
“이 아가씨가 얼굴을 심하게 다쳤다! 사람에게 용모가 얼마나 중한데 아무리 네 정인화를 짓밟았대도 우상부를 찾아가 물어달라면 될 것을 사람을 다치게 해선 안 되지! 내가 늘 하던 말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것이냐?”
“말씀하세요. 다 듣고 있어요.”
정효양은 귀를 막고 머리를 싸맨 채 아예 땅에 쪼그려 앉았다. 아마 평생 형의 잔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래왔던 것인지 행동이 몹시도 자연스러웠다.
정효순은 동생의 태도에 화가 나 말문이 막혔고, 정효양은 정효순의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자 고개를 슬쩍 들어보곤 아이처럼 폴짝 일어났다.
“형님, 혼내지 않으실 거죠? 그럼 일어납니다.”
정효순은 이마를 문지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우상 부인은 정효양 모습에 더 화가 나 우상에게 분통을 터뜨렸다.
“나리! 저놈 좀 보세요. 우리 벽이 얼굴을 피투성이로 만들어 놓고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저러고 있단 말입니다!”
우상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 우상부 집사와 소천자가 다시 돌아왔다. 어느새 이목청도 함께였다.
이목청은 이여벽을 잘 살펴달라고 분부하고서 밖으로 나서던 중, 우상부 집사와 소천자를 만나 함께 마차를 살펴보러 간 것이었다.
이내 소천자가 다가와 아뢰었다.
“폐하, 실로 수레바퀴에 꽃잎이 짓이겨진 흔적이 남아있습니다만, 정인화를 본 적이 없어 정인화의 꽃잎인지는 잘 모르겠사옵니다.”
“진짜 정인화라니까요!”
정효양이 펄쩍 뛰었다.
진옥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방화를 보며 말했다.
“정인화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시오?”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옥은 그녀와 함께 대문 앞으로 갔다.
* * *
우상부 대문 앞엔 마차가 들려진 채로 놓여 있었다.
사방화는 마차를 이리저리 둘러보다 마차 바퀴 틈새에서 짓이겨진 꽃잎 한 조각을 찾아냈다. 한동안 자세히 살펴보던 그녀가 이목청을 바라보았다.
이목청은 바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누이가 다친 게 매우 화나지만, 우리 우상부도 함부로 누군가를 업신여길 수는 없지요. 어떤 결과든 따르겠습니다.”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곤 진옥에게 말했다.
“폐하, 정인화 꽃잎이 맞습니다.”
이내 정효양이 즉각 떵떵거리며 소리쳤다.
“보세요! 전 거짓말 하지 않습니다! 제가 얼마나 고생해서 따낸 정인화인데요. 다들 답해주십시오! 세상에 저 정인화를 돈 주고 살 수나 있습니까?”
우상 부인이 격노했다.
“우리 마차가 네 정인화를 짓밟았다한들, 네가 정인화가 들고 있을 줄 알았겠느냐! 그렇다고 사람에게 상처를 입혀선 안 되지! 네놈에게 정인화가 값진 만큼 내 소중한 딸도 우리에겐 값진 보물이다!”
정효양도 화내며 소리쳤다.
“다친 얼굴은 치료할 수 있지만, 내 정인화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누가 내 딸 얼굴을 완벽히 치료할 수 있다더냐! 소왕비가 최대한 노력해도 흉이 질 수 있다던데 세상에 소왕비보다 더 완벽한 의술을 가진 의원이 있더냐! 있다면 어디 한 번 말해봐라!”
“그래도 치료할 순 있단 거 아닙니까! 그럼 제 정인화는요? 겨우 남은 꽃잎 한 장마저 이렇게 짓밟혔는데 다시 돌려낼 수 있습니까?”
계속된 정효양의 반응에, 우상 부인도 점점 기가 찼다.
“내 귀한 딸이 그깟 네 꽃과 비교가 된단 말이냐!”
“당신 딸이 이 대단한 귀족 출신이란 거 말고 가진 게 더 있습니까? 당신 딸이 반드시 제 꽃보다 값질 거라곤 말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우상 부인은 이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릴 정도로 화가 나 우상을 붙잡았다.
“나리! 저놈이 저러는데도 그냥 두실 겁니까? 저놈을 벌하지 않는다면 이제 다들 우리 우상부를 얼마나 우습게 여기겠어요!”
우상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연인들이 꿈속에서까지 바라는 정인화도 값지긴 했지만, 그 가치를 과연 사람과 비교할 수 있을까? 부모에겐 목숨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귀한 존재가 바로 자식이었다.
정효양이 정말 아무 까닭 없이 이여벽을 저렇게 만든 것이라면 우상부에서도 얼마든 엄벌을 요구할 수 있지만, 그 존귀한 정인화를 짓밟았다니 더는 할 말이 없어졌다. 이 빚을 대체 어떻게 청산해야 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