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6화 (816/978)

816화. 도성에 당도한 정씨 일가 (2) 

사방화와 금연은 수사를 빠져나와 왕부 대문으로 향했다.

그녀들의 뒤로 진호, 집사 희순, 소천자도 함께 뒤따랐다. 

“진호 오라버니가 참 많이 변하셨네요.”

문득 금연이 사방화에게 작게 속삭였다.

사방화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금연이 또 조용히 속삭였다.

“설영도 그리 고생을 하더니 고생 끝에 낙이 온 셈이네요. 오라버니가 앞으로 설영을 잘 대해주신다면 뒤늦게라도 큰 복이 오는 것 아니겠어요?”

사방화는 금연을 살짝 보곤 낮게 속삭였다.

“형님이 아주버님께 첩실 8명을 붙여주시겠대요.”

금연은 깜짝 놀라 입술을 쩍, 벌렸다.

그에 사방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켜봐야지요. 부부간의 일은 두 사람만이 아는 거니까요.”

금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사방화의 팔짱을 꼈다.

“맞아요. 은희도 오늘 다시 봤잖아요. 난 절대 그만한 용기는 없거든요.”

“은희도 어쩔 수 없이 그런 거예요.”

“그렇다 해도 이런 자리에서 아무나 그렇게 당당히 나설 순 없는 일이니까요. 난 절대 못할 거예요. 언젠가 폐하께서 은희를 연모하신다고 해도 진심으로 축복해줄 수 있어요. 앞으로 은희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겠어요.”

사방화는 금연이 아무런 악감정도 없이 진심으로 사은희를 칭찬하는 모습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안타까움만 일었다.

사람은 본래 각자의 색이 다 달랐다. 누군가는 간절히 온갖 방법을 써도 얻지 못하는 것이 있었지만, 누군가에게는 내일이 오듯 쉬운 일이기도 했다.

물론 사은희도 쉽게 진옥을 얻진 못했지만, 금연의 앞길은 사은희보다 더 험난한 게 사실이었다.

이젠 형양 정씨 사람들과의 만남을 앞두고 있다. 세상에 금연처럼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방화는 그렇게 안타까운 마음을 접고, 금연과 더 얘기를 나눴다.

하지만 대문 앞에 다다라도 형양 정씨 사람들은 아직 보이질 않았다.

곧이어 도착한 진호, 소천자, 희순도 두 사람과 같이 기다리는 대열에 합류했다.

* * *

잠시 후, 말 세 마리가 이끄는 한 행렬이 영친왕부에 다다랐다. 

수염과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노인, 반백이 넘은 중년, 끝으로 인물이 아주 훤칠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젊고 준수한 청년 하나가 말에서 내렸다. 이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쉬지 않고 바삐 달려온 듯했다.

사방화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을 보며 그가 바로 형양 정씨 가주, 정일이라 확신했다. 정일은 지긋한 나이에도 쾌마를 타고 이 먼 길을 쉬지도 않고 달려온 것을 보니 실로 엄청난 체력을 가진 인물 같았다. 그리고 반백이 넘은 중년은 정효순의 아버지 정성, 젊은 청년이 바로 정효순이었다.

이 정씨 일가도 영친왕부 거대한 입구 앞에 서 있는 사방화, 금연과 진호를 보았다. 인물이 매우 훤칠한 진호는 물론, 사방화와 금연은 정말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리따워서 절로 시선이 멈췄다. 이들은 미모는 물론 풍기는 기개와 분위기도 남달라,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인물들임을 알게 했다.

또한 함께 서 있는 소천자, 희순 역시 각각 황궁과 영친왕부 대총관을 뜻하는 패를 달고 있어 한껏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더했다.

이내 형양 정씨의 가주, 정일이 다가와 인사했다.

“저는 형양 정씨의 가주, 정일이라 합니다. 제 조카 정성, 여기는 종손(*從孫: 조카의 자녀) 정효순이고 다 함께 폐하를 뵈러 왔습니다. 그런데 다들 누구신지요?”

진호는 어른을 향한 공경의 표시로 간단히 공수를 하며 말했다.

“예, 정 어르신. 저는 진호라고 하고, 이쪽은 우리 계수 사방화, 여기는 대장공주부의 군주 금연입니다.”

정일, 정성은 깜짝 놀라 사방화를 바라봤고, 정효순도 놀란 눈으로 금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윽고 금연과 정효순은 서로 예의 바르게 인사를 나눴고, 한쪽에선 정일, 정성이 진호와 사방화에게 다가와 극진한 예를 갖추었다.

“큰 공자님과 소왕비마마셨군요. 실례했습니다.”

그런 뒤 금연에게도 웃으며 인사를 올리자, 금연 역시 정일, 정성에게 다가가 예의바르게 인사를 올렸다.

곧 사방화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세 분 모두 형양에서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폐하와 태후마마, 왕비마마, 대장공주마마께서 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정일과 정성도 서둘러 답하며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 * *

안으로 들어가는 길, 사방화가 먼저 말을 붙여왔다.

“경성에서 형양까진 꽤 거리가 멀어 빨라도 저녁 무렵에야 도착하실 줄 알았습니다만, 정 어르신은 아직 너무도 정정하시군요.”

정일은 바로 하하, 기분 좋게 웃었다.

“예, 이 늙은이 아직 정정하긴 합니다. 형양에서 오려면 빨라도 저녁 무렵은 돼야하나 마침 정성과 외지에 있던 차에 폐하께서 뵙고자 하신단 말씀을 듣고 효순을 불렀습니다. 형양에서 왔다면 이 늙은이는 내일 저녁에 도착하는 것도 감지덕지일 겁니다. 효순이 형양에서 오느라 더 고생이 많았지요.”

“아, 그랬군요. 정 공자님, 오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이어진 사방화의 말에 정효순이 서둘러 답했다.

“폐하께서 부르시니 즉시 달려와야지요. 수고스럽지 않습니다.”

사방화는 금연을 힐끗 보곤 돌연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정 공자님, 금연 군주님 잘 기억하셨겠지요? 내원 수사에 들어가면 아가씨들이 많이 있을 텐데 절대 헷갈리시면 안 돼요.”

정효순은 사방화가 자신에게 농담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금연을 흘낏 보았다.

“예, 제대로 기억했습니다. 헷갈리는 일 없을 겁니다.”

“그럼 됐어요.” 

사방화는 정효순의 말투와 얼굴빛을 섬세하게 살폈다. 조그만 농담 한 마디에도 얼굴이 붉어지는 사내라면 적어도 순수함은 갖췄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런 반응을 하는 사내들 대부분은 내향적이고 인품이 좋은 편이었다. 

과연 민 부인, 우상 부인, 대장공주 모두 사윗감으로 생각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때, 금연이 사방화를 톡톡, 치며 그녀의 생각을 깨웠다.

“새언니, 도망가게 만들어 일을 그르치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사방화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금연의 손을 조용히 토닥였다.

“걱정 마요. 정 공자님이 어찌 그리 쉽게 도망가실 분이겠어요.”

금연은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속삭였지만, 사방화는 정효순에게 다 들리도록 고의적으로 목소리를 크게 냈다.

금연이 결국 새빨개진 얼굴로 사방화의 손등을 한 대 때렸다. 그에 사방화는 눈썹을 까딱이며 웃었다.

“금연, 태도를 단정히 하셔야죠. 아가씨에게 놀라 도망가시면 어쩌려고요.”

금연은 여전히 새빨간 얼굴 그대로 정효순을 살짝 한번 바라보았다. 그러자 정효순은 더 새빨개진 얼굴로 몹시도 수줍게 이야기했다.

“청혼하러 온 것이니 결코……, 달아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사방화는 뜻을 두고서도 낯이 두껍지 못한 그가 참 흥미롭게 느껴졌다.

금연 역시 사방화가 다른 목적으로 정효순의 품성을 떠보려 농담을 했단 걸 알았지만, 부끄러움은 숨길 수가 없었다.

“강이 오라버니께 혼내달라고 말씀드릴 거예요.”

사방화는 바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농담을 했다.

“안 놀릴게요. 그러니 진강 염라대왕님에겐 절대 알리지 말아줘요.”

금연이 바로 웃음을 터뜨렸다.

“뛰는 자 위에 나는 자 있다더니, 새언니가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아니면 정말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

사방화는 순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정효순은 이토록 존귀한 여인들이 서로 간 예의를 차리며 어색하게 구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자연스레 웃으며 대화하고 있어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정일과 정성은 그녀들을 보고 조용히 웃음만 짓고 있었다. 사방화도 이를 다 눈치 채고 있었으나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넘겼다. 

* * *

영친왕부 내원 수사.

진옥, 태후, 영친왕비, 대장공주는 남자 객석에 모여 앉아 있었다.

이목청, 연석을 비롯한 공자들은 모두 바깥으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정일, 정성, 정효순은 황급히 황제에게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

진옥은 얼른 일어나 정일을 일으켜 세우며 어른을 배려했다.

“정 어른께선 나이도 있으신데 편히 하셔도 되네.”

“황송합니다, 폐하. 아직 쓸 만한 몸입니다. 백성이 위대하신 폐하께 절을 올리지 않고서야 되겠습니까.”

정일이 답했다.

“어마마마, 백모님, 고모님 모두 형양 정씨가 예교로 여러 세가 집안을 뛰어넘는다고 하시던데 정말 그렇군.”

“과찬이십니다.”

정일은 정성, 정효순과 태후, 영친왕비, 대장공주에게도 인사를 올렸다. 

“정 어른, 편히 하게.”

태후가 웃으며 말했다.

영친왕비와 대장공주는 곧장 정효순을 이리저리 살펴보았고, 영친왕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쪽이 정 공자인가? 과연 소문대로 뛰어나군.”

대장공주도 만족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이곤 금연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금연도 괜찮아하는 것 같은 얼굴이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옥은 웃으며 모두 자리에 앉도록 했다. 

정일, 정성, 정효순은 차례로 자리에 앉았고, 진옥은 정일과 어떻게 이리 빠른 시간 안에 도착한 것인지 등의 이야기를 나눴다.

화기애애하게 인사말을 나누고 시각을 확인하니, 때는 이미 오시(*午時: 아침 11시 ~ 오후 1시)였다. 영친왕비는 희순, 춘란에게 식사를 준비시켰다.

진옥은 다시 밖에 있는 공자들을 불러 함께 식사를 권했다.

정일은 황제 진옥이 권위의식 하나 없이 공자들과 거리낌 없이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긴장되는 마음을 내려놓았다. 과연 소문대로 어떤 자리에 있든 간에 변함없이 참 소탈하고 온화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정일이 문득 질문을 했다.

“그런데 폐하, 공자들도 다 있는데 강 소왕야는 어디로 가셨습니까?”

진옥은 여자 객석에 앉은 사방화를 힐끗 보곤 감정을 담아 말했다.

“창오산(苍梧山)에 500년 된 정인화(情人花)가 피었단 말을 듣고 꽃을 따러 갔네.”

어리둥절한 정일을 뒤로하고 정성이 말했다.

“네? 어째서 정인화를 따러 간 것입니까?”

“서로 사랑하는 정인이 청오산 가파른 절벽 위에 피는 정인화를 함께 먹으면 평생 헤어지지 않고 백년해로한단 말이 있지. 그 말을 듣곤 할 일도 다 내버려둔 채 꽃을 찾으러 떠나버렸어.”

진옥이 말했다.

“그런 꽃이 있다는 건 한 번도 들어보질 못했습니다.”

정성이 말했다.

“천하가 거대하니 별의별 것이 다 있는 법이지.”

이어진 진옥의 말에, 다시 정일이 입을 열었다.

“은연중에 그런 꽃이 있다고 듣긴 했으나 전설로만 생각했는데 실로 있었군요. 강 소왕야께서 청오산 꼭대기까지 가셨다면 지금 경성에서 몇 천 리쯤은 떨어져 계시겠지요?”

그때, 연석이 맞장구를 쳤다.

“당연하지요! 청오산에서 경성이면 쾌마를 타도 일주일은 걸리는 거리입니다. 저도 따라가고 싶었다만 제가 정인화를 가로챌까 바로 거부하셨습니다.”

정일이 픽, 웃으며 말했다.

“강 소왕야께선 기분파이시군.”

진옥도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본업도 뒤로하고 말이지.”

정일은 진옥을 보곤 순간 무언가 떠오른 듯 눈빛을 번쩍였다.

이내 곁에서 영친왕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놈이 어디 한두 번인가요? 방화도 이제 어디 도망갈 일이 없는데 그 먼 청오산 절벽까지 가서 정인화를 딴다고 난리를 쳐대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하지만 강이 성품은 다 선황폐하들, 선 태후마마, 이 황조부님, 황조모님, 황숙께서 만드신 것 아니겠어요? 집안 어른들께서 강이가 뭘 해도 늘 오냐오냐 용납해주셨으니 이제와 고쳐보려 해도 소용이 없어진 게지요.”

그러자 태후가 웃으며 말했다.

“형님, 어찌 그걸 선황폐하와 선황태후마마 탓으로만 돌리시오?”

영친왕비가 태후를 살짝 흘겨보았다.

“예, 이제야 후회합니다. 나날이 그놈 때문에 걱정만 달고 살아요.”

태후는 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청오산에 꽃을 따러 간 것도 다 능력이 되니 가능한 게지요. 아무 일도 없을 테니 걱정 말아요. 방화도 있으니 더는 큰일을 낼 아이가 아니요.”

영친왕비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만 너무 떠들고 있었네요. 세 분이 아주 중요한 일로 경성에 오신 것 아닌가요?”

태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대장공주에게 말했다.

“대장공주, 이렇게 보니 정 공자는 인품이나 용모도 아주 뛰어나 보이는구려. 아주 좋은 혼사를 마련하셨소.”

대장공주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효순이 마음에 들뿐 아니라 금연 또한 반대하는 기색이 없으니 더할 나위 없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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