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화. 도성에 당도한 정씨 일가 (1)
잠시 후, 소천자가 다가와 사방화에게 예를 갖추었다.
“소왕비마마.”
“응, 소 태감. 무슨 일이야?”
소천자가 말했다.
“조금 전 연 소후야께서 폐하의 옷에 술을 쏟아버렸습니다. 하지만 소인이 황궁을 나오기 전 폐하의 옷을 챙겨오는 것을 깜빡해 지금 가지러 가기에도 늦은 듯싶어 말씀드립니다. 소인, 강 소왕야와 폐하의 체격이 비슷하다고 사료되는 것 같은데 혹시…….”
사방화는 곧장 말뜻을 이해하곤 진옥이 있는 쪽을 보며 말했다.
“시화.”
“예, 소왕비마마.”
시화가 다가왔다.
“낙매거로 가서 낭군님 새 외투 한 벌을 찾아 소천자 태감에게 드려라.”
시화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소천자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아, 소왕비마마. 안의 내복도 젖어 낙매거로 가셔서 갈아입으셔야 할 것 같사옵니다.”
“응, 시화. 폐하를 낙매거로 모셔.”
“감사합니다, 소왕비마마.”
소천자는 감사 인사를 올리곤 진옥에게로 향했다.
곧 진옥이 소천자의 말을 전해듣고 사방화를 바라보자,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진옥은 일어나 시화와 소천자의 안내를 받으며 낙매거로 향했다.
* * *
잠시 후, 시화가 헐레벌떡 달려와 사방화에게 살짝 속삭였다.
“소왕비마마, 폐하께서 어제 마마께서 만드신 새 옷을 보시곤 반드시 입으셔야겠다고 하시어 차마 막지 못했습니다.”
사방화가 시화를 돌아보았다.
“그 새 옷이라면…….”
“소왕야께 드리려고 만드신 새 옷이요. 어제 만들어 두시고 치우는 걸 깜빡하셨습니다.”
시화가 서둘러 말했다.
“벌써 입으셨니?”
사방화의 물음에, 시화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 옷에 숨겨진 뜻을 아셨어?”
시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시는지 모르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방화는 잠시 말이 없더니 이내 손을 내저었다.
“이미 입으셨다면 그냥 드려. 하필이면 왜 폐하 옷에 술을 쏟았다니.”
사방화는 남자 손님 자리를 힐끗 쳐다보았다. 연석과 정명은 서로 술잔을 주고받으며 장난을 치고 있었는데, 이미 거나하게 취한 듯했다.
“별수 있니, 연석 소후야를 탓해야지.”
* * *
진옥은 벌써 다 옷을 깔끔히 갈아입고 나왔다.
햇볕에 고풍스러운 무늬는 더 우아한 자태를 뽐냈다. 황제의 부드럽고 점잖은 걸음걸이가 더해지니 그의 아름다움은 더 세를 가했다.
소천자가 진옥의 뒤를 따르며 몰래 사방화를 살짝 보니, 진옥을 매섭게 노려보는 그녀가 보였다.
하지만 진옥은 싱긋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로 돌아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연석을 일으켜 세웠다.
“술 참 잘 쏟았네.”
“상이라도 하사하시겠습니까?”
연석은 아직 정신이 조금 남아있는 듯했다.
“어류에 남은 취청주 한 되를 주마.”
“두 되!”
연석이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좋다.”
진옥의 대답에 만족한 연석이 트림을 시원하게 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낙매거 좋은 술을 마시지 못하게 했던 걸 절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옷으로 좋은 술 두 되를 바꿨으니 값진 것이겠지요?”
진옥이 웃으며 말했다.
“이 옷이 어찌 그 정도밖에 되질 않는단 말인가?”
“무슨 뜻입니까?”
진옥은 연석의 물음을 간단히 무시하고 소천자에게 손을 내저었다.
“소천자, 술은 치우고 차를 내오너라. 더 마셨다가는 땅에 드러눕겠네.”
소천자가 서둘러 술을 치웠다.
연석은 불만이 가득했지만, 찍소리 없이 이마를 붙잡고 말했다.
“해장국 하나 내와라. 정명 이 치사한 놈이 쓴 수에 질 수 없지.”
“술 마시려 안달이 났기에 가만히 내버려 둔 것뿐이다.”
정명의 짧은 응수에 연석은 또 입술을 삐죽였다.
곧 희순이 서둘러 연석에게 줄 해장국을 끓이도록 분부했다.
그때, 송방이 연석을 콕, 찌르며 물었다.
“연석, 그 품죽이란 여인은 아직도 응해주지 않은 것인가?”
“그래, 날 봐주질 않으니 홀아비로 살아야 할듯해.”
“본래 충용후부의 사람이란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지. 일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특히 그 품죽이란 여인도 사씨라고 들었는데.”
송방이 말했다.
“누가 그냥 얻는다고 했어? 나는 아예 혼인을 하겠단 것이다.”
연석이 말했다.
“혼인을 하자고 해도 싫다고 해?”
송방이 매우 의아해했다.
“품죽은 사 후야를 마음에 품은 듯해.”
연석이 머리를 문지르며 말했다.
이내 송방은 크게 놀랐다.
“같은 사씨끼리 그게 어찌 가능하단 말인가?”
그 순간, 잠자코 있던 이목청이 말했다.
“몇 세대를 거치고 다 갈라져서 벌써 통혼이 가능해졌으니 문제는 없어.”
그러자 송방도 연석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주며 말했다.
“나였어도 연석 너보단 사 후야를 택했겠지. 훨씬 더 호감인데. 그래도 어찌 혼인을 못할까 걱정하는가? 연석 소후야와 혼인하려는 여인은 널렸어.”
연석은 바로 송방의 손을 쳐냈다.
“송방 네가 뭘 알아! 세상에 품죽만한 여인은 없다.”
송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건 맞는 말이다.”
곁에 있던 정명도 말을 거들었다.
“예부터 사람은 공훈을 세워야 하고 연정은 한낱 연기와도 같은 거다. 더 나은 여인들이 많을 테니 마음 편히 가져.”
“공훈 좋아하네! 우리가 조정 일로 바쁠 때 넌 대체 어디서 뭘 한거냐?”
연석의 큰 소리에, 정명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조당 일엔 관심이 없어서 말이지. 하지만 폐하께도 내 사업이 커지면 군량미 3분의 1을 내겠다고 말씀드렸다.”
이목청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3분의 1이면 결코 적지 않지.”
정명은 즉각 가슴을 당당히 내밀었다.
“염려 마!”
듣고 있던 연석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뭐 봐줄만하네. 같이 큰 죽마고우 간 의리가 있는데 우리가 이리 힘들게 일할 동안 절대 네가 놀고먹어서는 안 되지.”
정명이 즉각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어찌 놀고먹을 수 있겠어? 너와 폐하께서 날 봐주신다고 한들 강 소왕야께서 날 가만히 놔두실 것 같아?”
연석은 즉시 또 고개를 끄덕였고, 송방이 문득 의문스런 얼굴로 물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강 소왕야께선 대체 뭘 하러 가신 거냐? 경성에 돌아오신 뒤로 그림자밖에 보질 못했어.”
“어차피 강 소왕야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가 할 수도 없는 일이야. 그런데 굳이 알아서 뭘 하겠어?”
연석의 답에 송방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바깥에서 누군가 외쳤다.
“폐하, 형양 정씨 가주와 큰 나리, 큰 공자님께서 도성에 드셨습니다.”
자리에 있던 이들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그래, 영친왕부로 모셔오너라.”
진옥이 말했다.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누군가 떠나고, 정명이 입을 열었다.
“어제 출발했다고 들었는데 참 빠르네.”
“장가를 들려면 당연히 서둘러 와야지.”
연석이 말했다.
진옥은 고개를 돌려 아가씨들과 함께 재미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금연을 한번 보곤 소천자에게 분부했다.
“소천자, 백모님, 고모님, 금연에게 짐이 형양 정씨 사람들을 여기 영친왕부로 모셨다는 얘기를 전해드려라.”
“알겠습니다.”
* * *
잠시 후, 소천자는 서둘러 태후, 영친왕비, 대장공주에게 가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형양 정씨 분들이 성에 드셨다고 하여 폐하께서 영친왕부로 모셨습니다.”
대장공주는 어리둥절해했다.
“이렇게나 빨리 왔다고?”
소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성문에 있던 자가 그리 전했습니다. 빨라도 저녁이라 생각했사오나 더 일찍 도착하셨습니다.”
“모두 누가 왔느냐?”
대장공주가 물었다.
“형양 정씨 가주 정일(郑轶), 큰 나리 정성(郑诚), 정효순 공자님이 오셨다고 했습니다.”
대장공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 크게 소리쳤다.
“연아!”
금연은 이미 신나게 노느라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때, 마침 이쪽을 주시하던 노설영이 금연을 콕 찔렀다.
“금연 군주님, 대장공주마마께서 부르세요.”
금연은 고개를 돌렸다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는 어머니 대장공주를 보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로 향했다.
“연아, 형양 정씨 사람들이 왔다는구나.”
금연이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렇게나 빨리요?”
“그렇다는 구나. 어서 준비라도 해야 하지 않겠니? 그래, 방화야. 같이 연이 준비 좀 도와줄래?”
대장공주는 금연의 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한쪽에 있던 사방화에게 말했다.
사방화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금연은 거울을 한번 꺼내보곤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머니, 머리도 괜찮고 화장도 안 했는데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요?”
대장공주가 즉각 금연을 흘겨보았다.
“제대로 해야지.”
그때, 금연이 사방화의 손을 잡고 말했다.
“폐하께서 영친왕부로 부르셨다고 하니 새언니랑 제가 직접 마중할게요. 이 정도면 되겠지요?”
대장공주는 순간 넋을 잃었다.
“너……, 너희가 직접 마중을 하겠다고? 그게 괜찮을까?”
“어찌 안 괜찮아요? 어머니, 여기 널린 게 아름다운 미인들인데 제가 먼저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가 다른 여인에게 정신이 팔려 절 알아보지도 못하게 되면 어떻겠어요?”
대장공주도 주위를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구나. 그럼…….”
“저희가 갈 테니 모두 앉아 계세요. 새언니도 무척 아름다운 미인이지만 결코 딴 마음을 품을 수가 없잖아요? 목숨이 두세 개씩 여분이 있지 않은 이상, 세상에 누가 감히 강이 오라버니께 맞설 수 있겠어요?”
금연은 그렇게 사방화의 손을 잡고 그대로 뒤돌아섰다.
사방화는 어이가 없었지만, 금연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내 영친왕비가 웃으며 운을 뗐다.
“금연이 말이 맞아요. 둘이서 가도록 둬요. 저 아이들 아니면 형양 정씨 사람들을 맞을 사람은 또 누가 있겠어요. 방화는 영친왕부 며느리이자 안주인이니 금연과 함께 나가는 것도 적절해요.”
“점잖지 않은 모습이라 형양 정씨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할까 걱정입니다.”
걱정스런 대장공주의 말에, 태후도 웃으며 말을 보탰다.
“대장공주는 참 걱정도 많으십니다. 재주에, 미모에, 신분까지 드높은 금연이 흠잡을 데가 어디 있다고. 지금도 아주 자연스럽고 단정한데 금연이 아니면 형양 정씨에서 또 누굴 마음에 들어 하겠습니까? 아까 전 금연이 말처럼 방화라도 눈독 들였다간 강이가 가만히 있지도 않을 텐데.”
그러자 대장공주도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맞습니다. 작은 염라대왕 같은 강이에게 덤빌 인물이 없긴 하지요.”
부인들 사이에서도 웃음이 터졌다.
부인들 중 유일하게 형양 정씨 적통 공자 정효순을 만나본 사람은 명 부인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도 이미 자리를 뜨고 없어서 부인들도 무척 궁금했다.
대체 얼마나 뛰어난 재주와 미모를 가졌기에 사씨 장방 민 부인부터 우상 부인, 대장공주의 마음까지 사로잡았을지 매우 호기심이 증폭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