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0화 4년간 키워온 감정
사방화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누굴 연모하는 거야?”
사은희는 고개만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직 없는 거야? 아니면 말을 못하는 거니?”
사은희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사방화의 팔만 꼭 끌어안았다. 그에 사방화가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은희야, 내 옷소매 다 늘어나겠어.”
사은희는 곧바로 손가락 2개만 똑 뗐다.
사은희의 고개는 이제 금방이라도 땅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사방화가 다시 무어라 말을 하려는데, 순간 시화가 다가와 말했다.
“소왕비마마.”
“응, 시화. 무슨 일이야?”
사방화가 돌아보자, 시화는 사은희를 힐끗 보곤 나지막이 아뢰었다.
“두 분께서 자리를 비우시자마자 8황자마마께서 오셨습니다. 명 부인께 은희 아가씨와 혼인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셨고요. 두 분께도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 서둘러 왔습니다.”
사은희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시화가 다시 차분히 설명하자, 사은희는 불같이 화를 냈다.
“내가 싫다고 했는데 기어코 일을 저지르다니, 진짜 밉상이야.”
사은희는 비로소 사방화의 팔을 놓고, 시화의 팔을 꼭 붙잡고 물었다.
“어머니께선 뭐라고 하셨어? 허락해주신 건 아니겠지?”
시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은희는 폭,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반대하지도 않으셨어요.”
다시 사은희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시화는 두 사람이 자리를 비운 사이 벌어졌던 일에 관해 간략히 설명을 덧붙였다. 마지막으론 영친왕비가 중간에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래서 현재는 진경이 태황태비를 모시러 갔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주었다.
사은희는 다시 사방화의 팔을 붙잡고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방화 언니, 전 정말 8황자마마가 싫어요. 시집가기 싫어요.”
연정은 절대 강요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사방화야말로 누구보다도 이를 잘 알기에 진경의 연심은 결국 이뤄지지 않을 것이란 직감이 들었다.
“태황태비마마께서 오시더라도 은향과의 혼담이 이뤄지지 않은 것 때문에 면목이 없어 널 어찌하진 못하실 거다. 하지만 진경 도련님을 어머니처럼 키워오신 마마께선 도련님을 워낙 아끼시니 체면까지 내려놓으실 수도 있어. 그러나 네가 정 아니라면 일찍이 거절해야지.”
사방화의 말에, 사은희가 걱정스럽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제가 싫다고 해서 제 뜻대로 될까요? 저희 어머니와 조모님께서 허락하시면 어떡해요?”
“숙모님, 종조모님은 절대 그러실 분들이 아니야. 네가 싫다면 강요하지 않으실 거야.”
“아, 8황자마마가 너무 얄미워요. 분명 제가 싫다고 말했는데 무슨 배짱으로 어머니께 찾아간 거죠? 거기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할 수가 있어요! 벌써 소문은 다 퍼졌을 거예요. 어떻게 하면 만회할 수 있을까요?”
사은희는 억울한 듯 발까지 동동, 굴렀다.
사방화도 사은희의 이런 모습은 난생 처음이었다.
“은희야, 그럼 대체 네가 연모하는 사람은 누구니? 내가 도와줄 수 있을지 모르니 내게도 말해줘.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린다면 그땐 늦어.”
사은희는 입술을 깨물곤, 잠시 숨을 가다듬은 뒤 용기를 냈다.
“방화 언니, 제가 연모하는 분은……. 폐하예요.”
“……!”
사방화는 순간 너무 놀라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사은희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사방화를 힐끗 보곤 다시 고개를 숙였다.
“폐하를 연모해요.”
“진옥……?”
사방화가 다시 한 번 눈을 커다랗게 뜨고 물었다.
“네.”
사방화는 일순 멍해졌다. 사은희가 좋아하는 사람이 진옥일 줄이야…….
“어찌……, 폐하를 연모한다는 거야?”
사은희와 진옥이 언제 만나본 적이라도 있던 것일까? 그런 얘기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심각해진 사방화를 두고, 사은희가 더 붉어진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4년 전, 상원절 날 어머니께서 향을 피우시는 동안 법불사 뒷산에 올라갔었다가 뱀에 물린 적이 있었어요. 그때 폐하께서 절 구해주시고 직접 업어서 산을 내려가 주셨어요.
나중에야 그분이 4황자마마란 걸 알게 됐고, 그때부터 저도 모르게 자꾸 생각이 났어요. 사랑이란 게 뭔지도 모르겠지만 한 달 전 폐하께서 언니와 혼인하신단 말을 듣고 너무 괴로웠어요. 언니, 이게 바로 사랑 아닌가요?”
사방화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4년 전엔 한 번도 뵌 적이 없었던 거야?”
“어머니는 제가 이리저리 뛰어노는 걸 싫어하시고 나이도 어려 절 한 번도 황궁에 데려가신 적이 없었어요. 거기다 설령 황궁에 간다한들 제가 어찌 감히 황자마마를 만날 수 있겠어요. 당연히 4황자마마시란 건 아예 몰랐지요.”
사방화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폐하를 연모한다면 일이 힘들어질 것 같구나.”
사은희가 사방화의 팔을 꼭 붙잡았다.
“방화 언니, 폐하께선 언니를 연모하신다는 거 잘 알아요. 만약 언니께서 정말 폐하와 혼인하셨다면 마음은 편치 않았겠지만, 영원히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언니께서도 형부와 화해를 하셨고 8황자마마께서 돌연 저와 혼인하시겠다고 하니……, 언니께 부탁드릴 수밖에 없어요.”
사방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금연 군주님께서도 평생 폐하를 연모했었지만 폐하께선 눈길 한 번도 주신 적이 없어. 그리고 내가 최근에 숙모님과 벌이고 있는 일, 너도 조금은 눈치 챘을 거라 생각하는데.
금연은 폐하를 위해 형양으로 시집가려는 거지만, 폐하께선 여전히 금연에게 아무런 마음도 주시질 않아. 폐하를 연모한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길을 가는 거야. 거대한 고통이나 충격을 받지 않는 이상 마음 접기도 힘들겠지.
폐하께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좋은 인연을 만나신다는 건 세상에서 내가 제일 환영할 일일거야. 나야말로 정말 폐하께서 날 잊고 훌륭하고 멋진 배필을 만나시길 바라.
하지만 은희야, 그 여인이 너라면 내가 어찌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을까. 거기다 지금 나라 상황도 말이 아니라서 혼사를 논할 심정도 아니실 거야. 진경 도련님과 동복형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황자마마들 중에 유달리 제일 가까운 형제지간인 건 너도 잘 알지?”
사은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가 천천히 운을 뗐다.
“방화 언니, 전 4년을 연모해왔어요. 그런 상황이라도 전 포기할 수 없어요. 어머니께서 짝을 찾아주려 하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얘기하려 했는데 8황자마마께서 갑자기 저러시니 저도 어쩔 수가 없어요.”
사방화는 사은희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꼭 그 속에 빠져들 것처럼, 참 호수같이 깊고도 맑은 눈망울이었다.
사은희는 성격도 명랑하고 행실도 단정한데다 매우 총명하고 영리했다. 무엇보다도 아주 바른 심성을 갖고 있는, 너무도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진옥도 사은희와 좋은 인연이 될 수 있다면 썰렁한 황궁도 더 이상 쓸쓸하지만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진옥이 과연 허락할지는 미지수였다. 사방화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사은희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방화가 다시 생각에 잠긴 사이, 사은희가 재차 입을 열었다.
“방화 언니, 전 시도해 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거예요. 외롭게 늙어 죽는다고 해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이 말에 사방화의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도 일순간 멈췄다. 사은희의 결연한 눈빛을 보고 있으니, 사방화에게도 그녀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그래, 그럼 이렇게 하자. 태황태비마마께서 오시기 전에 지금 바로 폐하를 찾아가 진경 도련님이 했던 그대로 청혼을 하는 거야.”
사은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누군가를 연모하려면 용기가 있어야 해. 용기가 없다면 차라리 여기서 그만둬. 폐하를 진심으로 연모하고 다른 이에게 시집가고 싶지 않다면 폐하의 곁에서 수많은 좌절을 견뎌내야 할 용기가 필요해. 하지만 그 어떤 좌절도 오늘 직접 만나 청혼하는 것보단 쉬울 거라고 봐.”
사은희는 잠시 멍하게 있다가 나지막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예부터 먼저 혼담을 꺼낸 여인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그 상대가 황제폐하라면 더더욱 사례를 찾아볼 수도 없겠지요. 전……, 저는 못 해요.”
사방화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천지개벽할 일이나 마찬가지지. 폐하께서 허락하시든, 거절하시든 네 이름은 후대 전기에 황제의 풍류 염사(*艳事: 염문에 관한 일)에 기록될 거야. 얼마나 대담하니? 이름도 널리 알려진 마당에 폐하께서 너와 혼인하지 않으면 넌 정말 그 누구에게도 시집가지 못할 거야.
나도 이 방법밖엔 떠오르지 않아. 이미 어질러진 마당에 일을 더 어지럽게 만든다면 성공할 확률이 더 높을지도 모르는 일이잖니. 금연도 폐하를 포기했는데 네가 용기를 갖고 이름이 알려지든 말든 대담히 나가지 않는 이상 한평생 남몰래 마음에만 품고 살았던 연심은 결국 아무 쓸모없게 될 거야.”
물론 사방화도 가능하다면 아끼는 동생이 이런 방법은 택하지 않길 바랐다. 고귀한 사씨 여인이 온 세상 사람을 놀라게 하면서까지 연심을 얻어야할 이유가 있던가.
하지만 아무리 금싸라기 같은 사씨 딸이라도 4년간 연심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면 명성을 드날리더라도 그 또한 가치 있는 일이었다. 어떤 일이든 다 각자가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금연과 사은희 모두 진옥을 사랑하지만 서로가 택한 길은 다 달랐다. 불꽃을 연모한 나비가 제 몸이 타들어갈 줄 알면서도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 건 타인이 딱하게 여길 일도 아니었다. 스스로의 마음에 따라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 여긴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진정한 화근은 진강보다 진옥이 더 가까운 듯했다.
하지만 진강을 사랑해 상처 입은 이여벽과 노설영을 떠올리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음에 씻지 못할 상처를 입은 이여벽, 모진 고생을 드디어 벗어난 노설영도 그간 애끓는 연정으로 참 안타까운 시간을 보낸 가여운 청춘들이었다.
사은희는 사방화의 말을 듣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에 사방화도 조용히 사은희의 결정을 기다려주었다.
세상엔 천만 가지 길이 있다 해도 꼭 한 길만 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은희는 신분으로 봐도, 총명한 재능을 봐도 참 특출 난 인재였다. 그녀도 곧 급계가 되면 진경뿐 아니라 숱한 소년들의 구애를 받을 것이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사씨 육방의 문턱을 닳도록 넘나들까.
사은희는 이제 진경을 택하든, 다른 집안을 택하든 앞으로 세상에 고운 비단길만 펼쳐져 있을 소녀였다. 하지만 사은희가 원하는 길은 유일하게 모진 가시밭길만 가득할 그곳, 진옥으로 난 길이었다.
물론 진옥이 사은희를 받아준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거절을 당하기라도 하면 몇 년째 금연을 향해 있던 욕설과 유언비어들이 일제히 사은희에게로 돌아서 오래도록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게 뻔했다.
한참 후, 사은희가 고개를 들고 결연한 눈빛을 반짝거렸다.
“방화 언니, 저 해 볼게요.”
사방화도 사은희의 결정에 그다지 놀라지 않은 듯했다. 사랑이란 그 어떤 위험도 감내할 수 있다는 걸 사방화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던가.
하지만 사방화는 아끼는 동생을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었다.
“좋은 방법은 아니니까 잘 생각해. 네 한평생과 연관된 일이야.”
사은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 굳건하게 말했다.
“방화 언니, 전 그렇게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되진 않아요. 폐하께서 절 연모하지 않으신다고 해도 최소한 제가 폐하를 연모하는 마음은 아시게 되는 거잖아요. 오늘 제가 세상 사람들을 경악시키고 그들이 떠들어대는 말에 빠져 익사하게 된다고 해도 뭐 어때요? 전 목숨을 걸고 말 거예요.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한두 번씩은 제멋대로 행동하는 법이잖아요. 그렇죠?”
사방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결말이 어떻든 간에 제가 다 감내하면 되는 일이에요.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떠들어 댄다고 한들 제가 꼭 죽으란 법은 없잖아요. 유언비어도 제 뼈와 살을 다치게 하진 못할 거고 후세에 제 이름이 폐하의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면 그거야말로 제가 바라던 바인데 기뻐해야 할 일이지 않겠어요?
끝까지 절 받아주지 않으신대도 상관없어요. 사씨 집안에서 절 창피하게 생각해 내쫓지만 않는다면 전 여전히 사은희에요.”
<『경문풍월』 28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