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9화 직설적인 청혼 (2)
진경은 말을 꺼낸 뒤 얼굴이 더 빨개져 한 발짝 뒤로 물러나기까지 했지만, 쏟아지는 부인들 시선에도 도망치지는 않았다.
영친왕비는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뭐? 귀뚜라미 한 쌍을 가지고 혼담을 꺼내려 했다고? 아이고, 어느 집안 아가씨를 보고 반했느냐? 어서 이 큰어미에게도 들려다오.”
진경은 입술을 깨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왜? 부끄러워? 요 며칠 태황태비마마께서 네 짝을 찾아주려 하셨는데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다더니 이미 마음에 품은 아가씨가 있었던 게로구나. 오늘 여기 있는 아가씨들도 재주면 재주, 미모면 미모,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아름다운 아가씨들이다. 어서 말해 보거라. 부인들도 있으니 곧장 허락해주실 지도 모르잖니.”
영친왕비만 보며 줄곧 아무 말도 못하는 진경을 보니, 부인들도 웃음이 번졌다. 대체 어떤 아이가 8황자 마음을 뺏어갔을까? 모두가 궁금해졌다.
“말해준다면 큰어미가 꼭 네 편을 들어주마. 말해주지 않는다면 우린 꽃구경이나 하러 갈 테야. 귀뚜라미도 찾아주지 않을 테니 잘 생각하거라.”
영친왕비도 진경이 귀여웠는지 놀리듯 장난을 쳤다.
“저……. 명 부인, 둘째 따님 사은희와 혼인할 수 있게 허락해주십시오.”
“…….”
일순 장내에 정적이 흘렀다.
부인들은 넋이 나가버렸고 개중에 사씨 육방 노부인과 태황태비가 사은향을 짝지어주려 했다는 속사정을 아는 이들은 속으로 탄식을 했다.
하지만 영친왕비는 일찍이 눈치를 챘던 듯 웃으며 이야기했다.
“누군가 했더니 은희였구나. 아직 어린 녀석이 보는 눈도 좋지. 명 부인, 내가 조금 전 은희를 칭찬만 하는데도 얼굴이 달아오른다고 하더니 지금은 좀 어떤가? 청혼까지 받게 됐는데.”
명 부인은 차분히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조금 전 사은희가 노설영과 함께 자형화를 구경하러 간 것과 진경이 하필 그때 자형화를 보러갔다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
아니, 애초에 말이 되질 않았다. 진경은 평생 한 가족과 마찬가지인 친척 영친왕부를 밥 먹듯 드나들었다. 그런데 여태 자형화 구경도 한번 못했을까. 거기다 사은희의 안색도 그다지 좋지 못했다. 이상하다곤 생각했지만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명 부인은 순간 어떤 답을 해야 좋을지 난감해졌다.
명 부인에겐 사은희뿐 아니라 진경을 너무도 사랑했던 장녀 사은향도 있었다. 사은향은 진경에게 거절당한 뒤 마음에 문을 닫고 하루하루 야위어갔다. 그런데 이제와 진경이 차녀 사은희를 좋아한다니……. 두 딸들의 어머니로서 명 부인이 대체 무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물론 짝사랑은 진경의 탓이 아니었다. 평생 말 한마디도 섞은 적이 없었고 사은향을 좋아하지 않는 걸 잘못이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진경은 무려 이 나라에서 가장 존귀한 황실의 황자였다. 누구와 혼인해도 환영받을만한 최고의 신랑감이 왜 하필 자신을 사랑했던 사람의 동생 사은희에게 청혼을 한단 말인가. 거기다 귀뚜라미 한 쌍을 가져와 청혼을 하겠다니, 이는 예로부터 극히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명 부인은 진경을 보며 안색이 이리저리 뒤바뀌었다. 다 똑같은 자식인데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있으랴.
진경은 한참이 지나도 말이 없는 명 부인을 보곤 한쪽 무릎을 꿇었다.
“사은희에 대한 마음은 진심이니 부인께서 부디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명 부인은 깜짝 놀라 얼른 몸을 돌렸다.
“8황자마마! 얼른 일어나십시오. 감히 이런 큰절은 받을 수 없습니다.”
진경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인께서 허락해주시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명 부인은 다른 부인들도 지켜보고 있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몰랐다. 할 수 없이 영친왕비를 바라보자, 영친왕비가 웃으며 진경을 바라봤다.
“얘가 혼사를 강요하러 왔구나.”
진경은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지만, 여전히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다.
“꽃놀이 연회에서 인연을 맺을 수 있다면 참 좋은 일이지. 그러나 혼인이란 게 한평생을 좌우하는 큰일인 만큼 양쪽이 다 원해야 하지 않겠어?”
영친왕비가 웃으며 차가워진 명 부인의 손을 잡아주곤, 진경에게 물었다.
“경아, 은희는 널 좋아하니?”
진경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조금 전에 고백했더니 화를 냈습니다. 하지만 전 진심으로 오래도록 연모해왔기에…….”
진경은 말끝을 흐렸지만, 그 뒤는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추측할 수 있었다. 진경은 마지막으로 도움을 청하고자 사은희의 모친, 명 부인에게 간청하며 진심을 털어놓은 것이었다.
영친왕비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부끄러움이 많으신 꼬마 아가씨께서 네가 이리 공개적으로 청혼을 했단 걸 알면 더 화를 내겠구나. 경아, 우선 일어나라. 네 신분을 생각해야지. 이리 존귀한 황자마마께서 이러고 있는 게 더 실례야.
선황폐하께서 계시진 않지만 태황태비마마께서 결정해주실 게다. 또 폐하와 태후마마도 계시니까. 이는 쉽게 허락할 일이 아니란다. 은희와 명 부인께서도 네 마음을 아셨으니 후에 다시 상의하실 거다.”
영친왕비는 명 부인의 곤란을 덜어주려 애썼지만, 진경은 그대로 꼼짝도 않고 명 부인에게 고집스레 말했다.
“부인, 전 진심으로 사은희를 연모합니다. 다른 여인은 마음에 담아본 적도 없이 그렇게 사은희만을 연모해왔습니다. 백모님 말씀에 따라 태황태비마마께 말씀드려 부인과 상의할 수 있도록 청해 보겠습니다.”
명 부인도 진경의 총명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총명한 태황태비 아래서 자라난 황자가 어리석고 아둔할 리 있을까. 이는 결코 쉬쉬하며 넘길 수도 없는 일이고, 공공연히 청혼한 것을 매몰차게 거절할 수도 없었다.
“황자마마, 혼인이란 중대한 일이니 쉽게 결정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명 부인의 답에, 진경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정말 태황태비를 모셔오려는 듯 영친왕비에게 인사를 올리고 밖으로 향했다.
“저 녀석을 칭찬해야 할지, 혼내야 할지, 참.”
영친왕비는 진경의 뒷모습을 보며 기가 찬 듯 웃음을 터뜨렸지만, 명 부인은 한숨을 내쉬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내 어떤 한 부인이 웃으며 이야기했다.
“명 부인, 참 복도 많으세요. 보아하니 8황자마마께서 진심으로 은희를 연모하시는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용기내 청혼할 수도 없었을 겁니다. 총명하고 영리한 둘째 따님과 8황자마마는 아주 잘 어울립니다.”
다른 부인들도 몇 마디씩 거들었으나 명 부인은 이에 함부로 말을 할 수도 없었기에 그저 쓴웃음만 지어야했다.
* * *
모두가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 바깥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황제폐하 납시오! 태후마마 납시오!”
모든 이들이 서둘러 두 사람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오늘 번잡하고 자질구레한 태후복을 벗고 가벼운 차림새로 온 태후는 평소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부인들과 아가씨들도 서둘러 마중 나와 공경하게 인사를 올리자, 진옥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백모님께서 대접해 주신다기에 짐도 태후마마를 모시고 꽃구경을 하러 왔다. 다들 편히 하라.”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감사 인사를 올렸다.
이내 태후가 웃으며 영친왕비에게 말했다.
“형님, 궁 밖을 나가지 못한 지 하도 오래됐더니 곰팡이가 피겠소. 괜히 나 때문에 분위기를 망친 건 아니겠지?”
영친왕비가 웃으며 손을 저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두 분께서 오신 덕에 모두들 더 신이 난걸요.”
부인들도 연신 맞장구를 쳤다. 다들 여기저기서 젊어 보인다, 안색이 좋아졌다, 자주 황궁을 나와 기분전환을 해야 한다며 한 마디씩 거들자 태후도 기분 좋은 미소로 손사래를 쳤다.
* * *
인사말을 나눈 뒤 영친왕비는 손님들을 이끌고 다시 수사로 향했다.
진옥은 제일 앞서 걸으며 이미 사방화가 보이지 않음을 확인했지만, 부러 그녀의 행방을 묻지는 않았다.
“형님, 어찌 소왕비가 보이질 않소?”
태후가 웃으며 영친왕비에게 물었다.
“사씨 육방 둘째 아가씨와 잠시 변소에 갔습니다. 곧 있으면 올 겁니다.”
영친왕비의 말에 태후가 명 부인을 돌아보았다.
“명 부인, 둘째 따님 이름이 사은희라고?”
“그렇습니다.”
명 부인이 웃으며 답했다.
태후는 다시 진옥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황상, 조금 전 앞에서 급히 뛰어나가던 경이를 마주쳤다만, 사씨 육방의 둘째 아가씨에게 혼담을 꺼냈다며 태황태비마마를 모시러 간다고 하지 않았소? 그 아가씨가 바로 사은희를 말하는 것이지요?”
진옥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일찌감치 제게도 얘기를 꺼낸 적이 있었는데 태황태비마마께서 결정해 주셔야 한단 말을 했었지요. 이렇게 직접 와서 혼담을 꺼내다니 배짱이 이리 클 줄은 몰랐습니다. 미래의 장모님께 빈손으로 와 혼담을 꺼내는 건 또 처음 보네요.”
명 부인은 미래 장모님이란 말을 듣곤 얼굴이 붉어졌다. 또한 은연중에 황제 진옥도 아우 진경을 도와주려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태후는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진씨 집안이 사랑에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요. 다들 장가드는 데에 한바탕 난리를 쳐대니 말입니다.”
순간 진옥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태후도 실언을 했음을 깨달았지만 이미 말은 내뱉어진 뒤였다. 태후는 서둘러 명 부인을 보며 화제를 돌렸다.
“명 부인, 경이는 아직 어려 행실이 침착하진 못하다만 근면 성실하고, 문예에도 밝고, 야망도 크니 시간이 지나면 분명 좋은 인재가 될 걸세.”
명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심사숙고해야 할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중대한 일인 만큼 쉽게 결정해선 안 되는 거지.”
그리고 태후가 영친왕비에게 말을 걸었다.
“형님, 왕부에 십팔학사(十八学士)가 모두 피었다던데 그중에 진품 2개가 나왔다고 들었소. 어서 보여주세요.”
“좋습니다.”
영친왕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부인들과 아가씨들 모두 꽃을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한편, 사방화와 사은희는 둘만 있을 수 있는 외진 곳에 다다랐다.
사은희는 진경을 마주친 뒤로 계속해서 표정이 굳어있었다. 그에 사방화가 픽,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은희야, 왜. 무슨 일이야?”
사은희가 사방화의 팔을 꼭 잡고, 볼통거리며 말했다.
“8황자마마께서 절 연모하신대요.”
“누군가 널 연모한다는 게 이리 화를 낼 일이었어?”
사방화가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은희는 더 화가 났다.
“방화 언니! 언니는 모르세요! 황자마마께선 지금 저희 어머니께 가서 저와의 혼사를 청하려 하시는 거라고요.”
“응? 오늘? 지금? 여기 영친왕부에서?”
사은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례금도 안 들고 온 데다 태황태비마마를 모시고 오지도 않았는데 어찌 장가를 가겠단 말이야?”
“누가 알겠어요! 귀뚜라미 한 쌍을 가져왔는데 연석 소후야께 뺏겼대요.”
사방화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언니까지 웃으실 거예요? 아까 경고를 하긴 했는데 제멋대로 하면 어떡하죠? 방화 언니, 어서 도와주세요!”
사은희는 정말로 다급한 듯 작은 얼굴이 다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그럼 넌 진경 도련님을 어떻게 생각해?”
“싫어요!”
사은희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네 언니 사은향 때문에 싫다는 거야, 아니면 그냥 싫은 거야?”
사은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냥 싫습니다.”
“정말? 사실 진경 도련님도 나쁘지 않은데. 나이가 좀 어려 아직 행실이 고르진 못하시지만 몇 년 만 있으면 남진의 젊은 인재들 중 단연 최고의 자리에 오르실 거야. 지금 미모와 재능을 봐서도 둘째가라면 참 서러울 분이지. 황자마마들 중에서도 가장 완벽한 황자라고 꼽을 수 있어.
형제인 폐하와 우리 낭군님과도 잘 지내시고, 다른 공자님들과의 사이도 좋고. 거기다 폐하의 신임을 받고 있으니 장래는 말할 것도 없지. 네게 마음을 표현하고 숙모님께 까지 가서 혼담을 꺼낸다는 것은 네게 진심이신 듯해.
꼭 너희 언니 때문에 거부할 필요는 없어. 연정이란 건 한평생이 달린 것이니까. 안타깝지만 너희 언니는 진경 도련님을 홀로 짝사랑하신 거였고 아무 관계도 아니었잖아. 너희 언니도,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을 거야.”
계속 말이 없던 사은희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말했다.
“방화 언니, 저희 언니 때문이 아니라 그냥 황자마마께 마음이 없어요.”
사방화가 사은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연모하는 사람이 있는 거지?”
사은희는 순간 안색이 붉어져선 사방화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