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4화 꽃놀이 연회 (2)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사이, 사은희가 매우 기뻐하며 깡충깡충 뛰어 들어왔다. 어찌나 신이 났는지 사람보다 들뜬 목소리부터 먼저 들려왔다.
“어머니! 방화 언니께서 제게 초대장을 보내셨다고 하던데 정말인가요? 어디 있어요? 어디? 어디? 어서 제게도 보여주세요!”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이 말썽쟁이 같으니! 여기 있다.”
명 부인이 웃으며 사은희에게 초대장을 건네주었다.
“와! 정말 꽃놀이 연회 초대장이네요? 3년 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친왕부 꽃놀이 연회를 갔다가 그 뒤로 어머니께서 제 소란스러운 모습에 체면을 구길까 안 데려가 주셨잖아요. 그리곤 2년 동안 줄곧 집에서 규율을 배우라시며 못 가게 했던 거 기억나세요?
아, 우리 방화 언니는 어쩜 글씨도 예쁘게 쓰실까요? 어머니, 방화 언니께서 직접 제게 주신 초대장인데 못 가게 하실 건 아니지요? 오늘 오전에는 일이 있다며 나중에 다시 부르겠다고 하셨는데 바로 내일 이렇게 초대를 해주시다니 너무너무 좋아요!”
명 부인도 사은희가 귀여웠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같이 갈 거란다. 네 언니도 가겠다고 하면 데리고 가자꾸나.”
“좋아요. 언니한테 물어보고 올게요!”
사은희는 곧바로 달려갔다가 갑자기 다시 돌아와 시화에게 물었다.
“시화, 어머니께 전할 말이 아직도 남았어?”
시화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은희 아가씨께 초대장을 드리러 온 거라 다른 일은 없습니다.”
“그럼 내가 배웅해줄게!”
사은희는 바로 시화의 손을 잡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시화도 다급히 노부인, 명 부인에게 인사를 올린 뒤 사은희의 손에 이끌려나갔다. 시화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가득했다.
명 부인은 금세 저만치 달려간 사은희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머님, 저것 좀 보셔요. 조금 전에 막 칭찬을 했는데 2년 동안 규율은 헛배웠나봅니다.”
노부인도 웃음을 지었다.
“2년간 헛배운 건 아니지. 바깥에서 적당히 거드름을 피울 줄만 알면 됐다. 규율은 남들에게나 보여주려 배우는 게지, 누가 안에서까지 규율을 따지고 들겠느냐? 너무 그렇게 규율을 따져도 재미없다.
때론 성격이 운명을 결정짓는다 하지 않느냐. 은희는 누구에게나 예쁨 받고 누구나 좋아할 성격이다. 남편에게도, 시댁에게도 더없이 사랑받는다면 그걸로 됐다. 성격이 좋아 은향이보다 더 복이 많을 듯하구나.”
명 부인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적엔 천방지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를 잘 아니 말입니다. 쉬세요, 어머니. 내일 입고 갈 옷을 준비하러 가보겠습니다.”
“그래, 가 보거라.”
명 부인도 노부인의 방을 나왔다.
* * *
사은희는 시화의 팔짱을 끼고 뛰쳐나와선 돌연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갔다.
“시화, 근데 방화 언니께서 어찌 꽃놀이 연회를 여신다는 거야? 시끌벅적한 거라면 질색하시는 거 아니었어?”
시화가 웃으며 말했다.
“소왕비마마께선 혼인하신 뒤로 끝없는 우여곡절을 겪으시다 결국 소왕야와도 화해하시고 이제 정세도 좀 평안하지 않습니까? 거기다 영친왕부 큰 마님도 돌아오셨고 왕비마마께서도 올해 꽃놀이 연회를 열지 못하셨으니 이참에 아가씨들을 모시고 떠들썩하게 보내려는 것이지요. 소왕비마마께서도 즐거운 자리를 마련하시는 거라면 좋아하십니다.”
가만히 시화를 바라보던 사은희가 눈을 새초롬하게 떴다.
“안 믿어.”
순간 시화는 말문이 막혔다.
“게다가 오늘 오전에만 해도 아주 급한 일이 있으신 것 같았어. 어머니께서도 내게 엄청 진지하게 부탁하셨단 말이야. 근데 갑자기 한가로워지셨다고? 벌써 급한 일을 해결하셨을 리는 없는데. 그리 쉽게 해결될 일이었으면 어머니와 방화 언니께서도 그리 무거운 얼굴을 하고 계셨을 리는 없을 테니까.”
시화는 순간적으로 뭐라 말해야할지 막막해 대충 둘러댔다.
“소왕비마마께선 그저 지체 높은 경성 아가씨들께 초대장을 전해주시라고만 하셨습니다. 소인도 급한 일이 해결됐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만, 다른 계획이 있으신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사은희가 홀연 초대장 글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봐. 방화 언니께서 이 청할 청, 자에 힘을 주셨잖아. 분명 다른 계획이 있으신 게 분명해. 됐어, 널 곤란하게 만들어서 뭐해. 어쨌든 영친왕부로 가서 방화 언니를 만날 수 있다니 그걸로 충분히 기뻐!”
시화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은희는 곧 시화를 입구까지 데려다주고 나서야 사은향의 뜰로 향했다.
* * *
영친왕부.
다시 돌아온 시화가 사씨 육방에서 있었던 일과 사은희가 자신에게 꼬치꼬치 캐물었던 것까지 상세한 얘기를 전달했다. 그에 사방화가 미소를 보였다.
“역시 명 숙모님은 은희를 잘 가르치셨단 말이지. 그리도 총명하고 영리한 아이가 사씨 아가씨들을 돌봤다면 사씨 여인도 더 승승장구했을 텐데.”
“은향 아가씨께도 여쭤보러 가셨는데 내일 함께 오실지는 잘 모르겠네요.”
“딸을 규방에서만 키워 안목을 좁히고 예불 심성까지 기르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해선 안 되는 일이지. 그게 바로 사은향이고. 참 안타깝네.”
“예, 어쨌든 각 가문 모두 초대에 응하셨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우상부에서도 내일 우상 부인과 아가씨께서 함께 오신다고 합니다.”
사방화는 잠시 멍해졌다.
“흔쾌히 승낙했다고?”
“그렇다고 합니다.”
사방화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 출가하려 마음먹은 이가 초대에 응할 리는 없지. 보아하니 이여벽도 출가할 마음을 접은 듯하구나.”
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인도 그렇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본원에 가서 왕비마마께도 말씀을 전해드렸어?”
“마마께 먼저 아뢰러 온 거라 아직 못 전했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고, 시화는 낙매거를 나와 본원으로 향했다.
* * *
본원 내에는 영친왕비가 노설영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곁에는 노설영의 진짜 시어머니인 유 측비도 있었지만, 그녀는 영친왕부 안주인 영친왕비보다도 살갑지는 못했다.
노설영은 오랜 시간 좌상부에서 몸조리를 잘 해온 덕에 몸도 가뿐하고 혈색도 좋아 보였다.
그러나 노설영은 영친왕비에게 자신 혼자선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으니, 진호가 첩실 부인을 맞길 바란다며 청했다. 아예 날을 잡아 첩실 8명을 맞았으면 한다고 청하자, 순간 영친왕비가 매우 깜짝 놀랐다.
“설영, 네가 좌상부로 돌아간 뒤로 진호는 여인에겐 눈길도 두지 않는다고 하더구나. 네 뜰엔 시녀 하나 없이 사내 하인 몇 명이 전부잖니. 옛날 말에도 방탕한 놈이 마음을 고쳐먹는 건 돈으로도 바꿀 수 없다 하지 않았느냐.
진호는 내 보기에도 요 며칠 정말 많이 반성하고 고친 듯 보였다. 다신 네게 예전처럼 대하진 못할 게다. 널 데리러 가기 전, 나와 왕야께도 맹세했단다. 이 시기에 한꺼번에 첩실 여덟을 들이면 너희 둘 사이의 감정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더 심사숙고해야 한다.”
노설영이 웃으며 말했다.
“생각이라면 충분히 했습니다. 감정이 좋든 나빠지든 상관없습니다. 그이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사람만 있다면 저도 마음 편히 정실 노릇이나 하며 살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왕비마마.”
노설영은 정말로 굳은 결심을 한 것 같았다.
“진호에게도 말해봤니? 둘이서 상의는 하고 결정을 내린 게야?”
노설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락하진 않으셨지만, 먼저 왕야와 왕비마마께서 뜻을 내려주셨으면 하고 청하는 것입니다.”
영친왕비는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예로부터 사내가 먼저 첩실을 원했는데 우리 큰 공자님은 반대가 됐네. 유 측비, 자네는 어찌 생각하는가?”
유 측비는 오래도록 영친왕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 자신을 생각했다. 사실 첩실이 몇이나 오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유 측비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왕비마마, 설영이 뜻에 따르도록 해주심이 좋을 듯합니다. 소첩 이젠 진호가 잘못을 깨닫고 바르게살기만 바랄 뿐입니다. 정말 반성을 했다면 첩실을 몇이나 맞든 아무런 상관도 없을 것입니다. 여전히 잘못을 깨닫지 못했다고 해도 첩실이 많다면 설영이도 이제 더는 힘들진 않겠지요.”
“측비의 뜻도 그러하다니 저녁에 왕야께 한번 말씀을 드려보마.”
노설영이 영친왕비에게 감사인사를 올렸다.
그렇게 세 사람이 대화를 마무리 짓는데, 시화가 본원으로 들어왔다.
시화는 세 사람에게 깍듯이 인사하곤 사방화가 제안한 연회 소식을 전했다. 왕부가 떠들썩했던 지도 오래됐고 여름 꽃들도 만개했으니 올해 첫 번째 꽃놀이 연회를 열었으면 한다는 말과 더불어, 노설영이 왕부로 돌아온 것을 환영하려 초대장을 보냈다는 말을 더했다.
영친왕비는 잠시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
“떠들썩한지도 오래됐고 설영이도 돌아왔으니 당연히 축하를 해야지. 방화가 옳구나. 예년대로 할 것이니 어서 준비하자꾸나.”
춘란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왕비마마!”
춘란은 예년 계획을 따라 내일 꽃놀이 연회에 필요한 준비를 시작했다.
노설영은 잠시 자리를 지키다 사방화를 만나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친왕비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설영이 떠난 후, 유 측비가 영친왕비에게 말했다.
“저도 별 일 없으니 왕비마마를 도와 꽃놀이 연회 준비를 돕겠습니다.”
영친왕비도 사양하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 나도 경성 부인들에게 초대장을 좀 보내야겠어. 매년 계절마다 꽃놀이 연회 2번씩은 열었는데 올해는 한 번도 열질 못했지 않나. 나처럼 꽃을 좋아하는 부인들도 기다리고 있었을 거야.”
유 측비가 웃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떠들썩했던 날이 언젠지 기억도 나질 않습니다.”
영친왕비도 미소로 고개를 끄덕인 후, 취하를 불렀다.
“취하, 낙매거로 가서 시화에게 어느 집 아가씨들에게 초대장을 보냈는지 물어보고 오거라. 그에 맞춰 부인들에게도 보내려하니.”
“알겠습니다.”
잠시 후, 취하가 돌아와 사방화가 초대한 사람들의 이름을 쭉 나열했다.
이내 영친왕비가 매우 의아해하며 물었다.
“우상부 아가씨가 온다고 했다고?”
취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소인도 깜짝 놀라 다시금 여쭤보았사오나 이 아가씨뿐 아니라 이 부인께서도 오신다고 하셨답니다.”
“이여벽은 출가한다고 난리를 쳤지 않았느냐?”
“생각이 바뀌신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친왕비가 일단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또 물었다.
“강이는 오늘 새벽에 떠났다고 했지? 언제 돌아온다고 하더냐?”
취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심스레 시화에게 물어보았으나 멀리 떠나셨기에 언제 돌아오실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영친왕비는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잘 됐구나. 경성에 다 함께 사는 이웃에다 왕야와 우상도 모르는 사이가 아니고, 강이와 목청도 어려서부터 친했던 지기가 아니더냐. 그런데 어찌 한번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겠어. 이번에도 다녀가지 않으면 더 곤란하게 될 게다. 이여벽이 정말 제대로 생각을 고친 거면 좋겠구나.”
취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친왕비는 사방화의 명단에 맞춰 각 부의 부인들에게 초대장을 썼다. 곧 집사 희순의 진두지휘아래 초대장이 각 가문으로 전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