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2화 숨겨진 현묘한 계책
태후궁에 다다르기 전, 맞은편에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오는 영친왕비와 대장공주가 보였다.
대장공주도 마침 사방화, 금연을 발견하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했다.
“어찌 돌고 돌아 어서재까지 갔던 것이냐?”
“새언니를 데리고 나온 건 핑계였어요. 그냥 어서재에 가서 폐하와 따로 말씀을 나누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금연이 말했다.
황궁에 소식통이 있던 대장공주도 사방화, 금연이 어서재에 갔다는 소식을 일찍이 전해 들었다. 물론 영친왕비도 당연히 이 소식을 먼저 접했었다.
두 사람이 남몰래 만난 것도 아니니 마땅히 보고가 됐을 터였다. 하지만 대장공주는 금연이 사실대로 말하는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긴장이 됐다.
“연이 너 설마 아직도…….”
연람은 서둘러 고개를 내저으며 대장공주의 팔짱을 꼈다.
“어머니, 그냥 몇 마디 나눈 것뿐이에요. 생각을 떨치긴 했어도 아직 마음속에 응어리가 남아있어서 그랬던 겁니다. 오늘 이렇게 얘기를 나누고 나니 정말 내려놓게 됐어요.”
“정말이냐?”
금연이 대장공주의 팔에 매달려 애교를 부렸다.
“제가 어찌 어머니께 거짓을 고하겠어요? 제가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것처럼 보이세요?”
홀가분해 보이는 금연의 얼굴에선 광채까지 반짝이고 있었다. 확실히 예전 그 방황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대장공주도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래, 내려놓았다니 어미도 마음이 놓이는구나.”
금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대장공주가 다시 또 물었다.
“그럼 형양 정씨와의 혼사는 어찌 된 게냐? 폐하께서 뭐라고 하시더냐?”
금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선 잠시 머뭇거리시며 혹시라도 제가 홧김에 선택한 혼사일까 싶어 걱정하셨지만, 제가 확실하게 말씀드리고 나니 정효순을 경성으로 불러들여 재주와 인품이 어떤지 직접 만나 판단해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대장공주가 웃으며 그녀의 손을 토닥였다.
“폐하께서 네가 후회할까 걱정하신 거였구나. 폐하께서 옳으시다. 흉흉한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는 데다 수백 년을 이어온 세가 대족인 형양 정씨와의 혼사이니 섣불리 치렀다가 번복이라도 하면 죄를 사게 될 테니까.
정효순의 재주와 인품이라면 분명 괜찮을 게다. 명 부인, 우상 부인도 마음에 들어 했던 공자니까. 네 한평생을 결정지을 일이니 신중해서 나쁠 건 없지. 이 못난 딸아, 그렇게나 내 속을 썩이더니 이제야 철이 좀 든 것 같구나. 앞으론 좀 덜 신경 써도 되겠지?”
대장공주가 금연의 볼을 콕, 찔렀다.
“걱정은 전부 배에다 넣어두세요.”
금연이 해맑게 웃다가, 역시 자신을 보며 미소 짓던 영친왕비를 발견하고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외숙모님, 저만 철든 건 아닙니다. 강이 오라버니께서도 얼마나 어른스러워지셨다고요.”
대장공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모처럼 우리 조카 칭찬을 해주려했는데 순식간에 장난꾸러기가 돼버린 걸 보니 칭찬도 못 하겠구나. 늦었다, 어서 돌아가자.”
영친왕비도 웃으며 대꾸했다.
이내 네 사람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황궁을 나왔고, 황궁 입구에서 각자의 마차를 타고 헤어졌다.
* * *
영친왕부 마차 안.
마차의 휘장이 내려지자 영친왕비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싹 걷혔다.
잠시 생각하던 영친왕비가 사방화에게 물었다.
“방화야, 형양 정씨에 정말 큰 문제가 있는 거니?”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어머니께 말씀을 드릴 수 있게 됐네요.”
사방화는 정탐꾼들의 명단, 금연의 혼사와 금연이 혼인하기로 결심한 계기를 간단히 설명했다. 영친왕비는 금세 심각해져선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
대장공주가 황궁에서 출가한 뒤, 20년간 대장공주부는 조정에도 눈을 감은 채 좀처럼 간섭하는 일이 없었다. 그저 황족 가문으로서 본분에만 충실하며 마땅한 부귀영화를 누리는 데에만 익숙해져 있었다.
그랬기에 대장공주는 당연히 영친왕비만큼 예리한 혜안을 가지고 있지도 못했고, 의심이 가더라도 깊이 파고드는 능력은 부족했다.
무엇보다 형양 정씨는 워낙 깊숙이 숨겨져 있어, 사방화도 사씨 정탐꾼이 아니었다면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을 터였다. 그녀 역시 배후에 숨겨진 모략도 알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영친왕비는 마차가 영친왕부에 다다를 때까지 아무런 말도 없었다.
* * *
영친왕비는 왕부에 도착해 본원으로 와서야 깊은 한숨을 쉬며 입을 뗐다.
“대의를 놓고 봤을 땐 금연이 행동이 옳다만, 그 아이가 그럴 줄은 생각지도 못했구나.”
사방화도 따라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저도 금연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폐하를 연모하는 마음 하나로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니 말이에요. 정이 식어 돌아서는 건 세상의 흔한 이야기인데 금연의 초심은 평생 하나도 변하질 않았습니다.”
영친왕비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 어머니보다 훨씬 낫구나.”
사방화도 평생 황실에서 자란 금화 같은 대장공주에 관해 뭐라 평할 말이 없었다. 곧 영친왕비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네 고모 사봉이 남진에 있을 때 마음에 담아둔 이가 없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대의를 위해 막북으로 향했지. 세상은 사봉이 북제 황제와 서로 사랑한다며 떠들어댔지만, 사봉이 혼인하기 전 마음에 담아둔 이가 있었단 건 나와 옥완만이 알고 있었다.
북제 황제는 대장공주와의 혼인을 원했지만, 대장공주가 죽어도 가지 않겠다니 네 고모께서 대의를 위한 결심을 하신 것이지. 북제 황제가 사봉을 사랑하게 만든 것, 그리하여 황후로 책립된 것 모두 네 고모님의 능력이었어.”
사방화 역시 북제 황제가 고모 사봉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건 잘 알았지만 시간이 흘러 고모도 북제 황제를 사랑하게 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 사랑의 증거가 바로 친아들 사운계가 아니겠는가. 이렇듯 나라를 위한 대의와 인연의 정이 하나로 얽혀드는 경우도 있었다.
영친왕비가 다시 사방화의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
“난 금연이 옳은 선택을 했다고 본다. 정과 의를 모두 지킬 수 있으니 이번 생도 헛된 건 아니지 않니. 남진에 폭풍이 휘몰아치고 정세가 불안정하니 당연히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연정은 뒤로 해야지. 나라가 없이는 집도, 사랑도 마냥 영원히 존재할 순 없는 법이니까.”
사방화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영친왕비가 곧 손을 놓으며 말했다.
“피곤할 테니 어서 들어가 쉬거라. 강이가 답신을 주면 내게도 알려주고. 어쨌거나 형양 정씨가 난리를 치게 보고만 있을 순 없지 않겠느냐. 절대 이 남진과 우리를 만만히 보게 둬서는 안 되지.”
* * *
사방화와 영친왕비는 각각 낙매거와 본원으로 향했다.
사방화는 낙매거로 돌아왔다가, 뜻밖에 한 낯선 인물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이가 지긋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한손에 어떤 물건을 들고 있었다.
곧이어 여인도 사방화를 발견하고 급히 다가와 무릎 꿇고 예를 갖췄다.
“소왕비마마를 뵙습니다. 소인은 좌상 부인을 모시는 장 어멈이라 합니다. 이번에 저희 설영 아가씨를 모시게 되어 소왕비마마께 인사를 드리러 찾아왔습니다. 아가씨를 구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편히 해, 장 어멈. 형님은 좌상부에서 돌아오셨어?”
장 어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오늘 진호 공자님께서 아가씨를 모시고 영친왕부로 돌아오셨습니다. 소왕비마마와 왕비마마께서 궁으로 드셨다는 걸 아시곤 우선 본원에 계신 왕비마마께 인사를 올리고, 소왕비마마께도 물건을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장 어멈이 들고 있던 물건을 내밀자, 사방화가 먼저 웃으며 물어보았다.
“이게 뭔데? 형님께서 주신 거야?”
“아닙니다, 좌상 부인께서 소왕비마마께 드리는 답례입니다. 아가씨를 구해주신 데에 부인께서 제대로 감사 인사를 드리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부인의 성의가 담긴 것이니 소왕비마마께선 사양하지 마시고 받아주십시오. 저희 좌상 대인께서도 몇 번이고 살펴보신 것입니다.”
마지막 한 마디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사방화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시화가 인사를 올리며 물건을 받곤 장 어멈을 안으로 들이려했다.
그러자 장 어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에 미처 다 치우지 못한 것들이 있어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방화는 시묵에게 장 어멈을 배웅해주라 말한 뒤 낙매거로 향했다.
* * *
시화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탁자에 물건을 올려두며 물었다.
“소왕비마마, 이제 열어봐도 되겠지요?”
“응, 뭔지 한번 살펴봐.”
물건은 설누에로 만든 비단 다섯 필로, 품질이 좋아 매끈하고 윤이 났다. 시화는 더 꼼꼼하게 살펴본 뒤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는데요. 아무리 설누에로 만든 비단일지라도 마마께는 더 좋은 비단이 많으니 특별한 것도 아닙니다. 색이 좀 곱긴 하네요.”
사방화도 비단을 함께 살피다 말했다.
“안방으로 들고 들어오너라.”
한참 비단을 매만지던 시화가 사방화의 눈치를 살피곤 비단을 다 껴안고서 안방으로 갔다.
사방화는 안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을 꼭 닫고 휘장을 내렸다.
“모두 펼쳐 놓고 얼마나 색이 얼마나 고운지 살펴보자.”
시화는 그제야 분명 심상치 않은 비단임을 직감하고 순서대로 펼쳤다. 하지만 한참을 살펴도 달리 특별한 점은 보이질 않았다.
“아가씨, 소인의 어두운 안목으론 그저 평범한 비단으로만 보입니다.”
사방화도 비단을 꼼꼼히 살피며 더듬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참 이상하네.”
“좌상 부인은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걸까요? 단순히 이 비단을 주셨을 리는 없을 텐데요.”
“그래, 그냥 단순히 비단을 선물했을 리는 없는데.”
시화는 다시 비단을 이리저리 살피곤 비단을 싸온 천까지 펼쳐봤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시화는 끝내 맥이 다 빠져버렸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떻게 봐도 그냥 비단 몇 필일 뿐입니다.”
사방화는 자리에 앉아 비단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시화도 그런 사방화를 방해하지 않으려 조용히 기다리고만 있었다.
잠시 후, 사방화가 문득 입을 열었다.
“시화, 창문의 휘장을 좀 걷어볼래?”
시화는 바로 창가 휘장을 걷었고, 햇살은 앞 다투어 쏟아지듯 내렸다.
사방화는 다시 비단을 살펴보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다!”
시화도 고개를 돌린 후, 눈을 반짝였다.
모두 같은 색이었던 비단은 햇빛을 받자 각기 다른 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주 옅은 색이었지만, 무공 실력이 뛰어났던 두 사람에겐 분명하게 잘 보였다. 시화가 바로 입을 열었다.
“마마, 이 비단들은 전부 각기 다른 연도에 일찍이 짜여 보관돼온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색이 다 다를 순 없지요. 하나하나 새로 짜여 가장 새것으로 보이는 이것도 1년 전일 겁니다.”
사방화도 비단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가장 오래된 건 아마 10년 정도 된 것 같구나. 그래도 이렇게 새것처럼 보이다니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정말 모르겠어.”
“좌상 부인께서 대체 어떻게 보관하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사방화가 말없이 비단의 모서리들을 서로 맞추어 보곤 눈을 가늘게 떴다. 한동안 그녀의 눈빛이 그윽하게 깊어지더니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좌상은 역시 좌상이구나. 과연 여태 범양 노씨의 도움도 받지 않고 심지어 그들을 밟아가면서도 조정 최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킨 이유가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