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1화 (801/978)

801화 진옥의 분노 

“희생이라 할 순 없어요. 사람이 살아가는 천만 가지의 삶 중 하나를 택한 것뿐이니까요. 이거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이에요.”

사방화는 말없이 금연을 바라보았다. 사랑해서 미워하는 이들은 많다지만 금연처럼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온 마음을 다 바쳐 사랑과 정성을 다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새언니도 강이 오라버니를 위해 온갖 힘든 일을 견뎌냈잖아요. 아니에요?”

사방화가 나지막이 말했다.

“진강과 난 서로 사랑하는 부부잖아요.”

금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옥이 오라버니께선 날 사랑하지 않지만, 내가 사랑한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난 오라버니만 고집스레 뒤쫓는 걸 포기한 거지, 마음을 포기한 건 아니에요. 남진 강산을 위하는 데만 전념하고 계시니 내가 할 수 있는 한 작은 힘을 다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도울 거예요.”

“폐하께선 정말 몇 평생을 다해도 갚지 못할 복을 얻으셨네요.”

금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참 부족해요. 정말 그 정도로 복이 있었다면 새언니도 옥이 오라버니를 선택했겠지요. 며칠 전까지 새언니와 옥이 오라버니께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란 얘기를 듣고, 정말 새언니가 황후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길 바라지, 외롭고 쓸쓸하길 바라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심지어 강이 오라버니가 돌아오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도 했어요. 그러니 새언니, 제발 어찌 된 일인지 말해줘요.”

사방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미 마음을 굳힌 금연을 보니 더 이상 타일러도 아무 소용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사방화는 현재 진강, 진옥과 함께 암암리에 북제가 남진에 심어둔 정탐꾼들을 제거하려 하고 있으며, 사씨의 정탐꾼을 시켜 알아낸 명단을 통해 이 정탐꾼에 형양 정씨가 관련돼있음을 이야기해주었다.

금연은 안색이 굳어졌다.

“그래서 오라버니의 안색이 그렇게 어두웠던 거군요.”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양 정씨 뿌리가 심히 깊어 하나를 끌어들이면 전부 움직이게 돼있어요. 그만큼 아주 까다로우니 만반의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정말 곤란해져요.”

금연은 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잠긴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맑고 그윽한 벽호에 연꽃은 일찌감치 지고 연잎엔 작은 봉우리들만 맺혀있었다. 그래도 드문드문 남은 연꽃들은 아직 고아한 자태로 만개해있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고 숨결은 고요했다.

* * *

한참 후, 금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럴 때일수록 형양 정씨에게 칼을 들이밀어선 안 돼요. 그러니 대장공주부와 형양 정씨의 혼사는 반드시 치러야만 해. 무슨 일이 있어도 형양 정씨에게 시집갈 거예요.”

사방화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안 돼요!”

금연은 차분한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런 긴박한 시국에 형양 정씨가 더 조심스레 나올 건 분명해요. 사씨 정탐꾼에게서 얻은 명단 하나로는 형양 정씨가 은밀히 적과 손을 잡았단 증거로 내세울 수 없어요. 어머니께서도 줄곧 내 혼사로 마음 졸이시다 드디어 양쪽이 뜻을 맞춰 혼사를 잡게 됐어요.

북제의 정탐꾼을 제거하려는 상황에 혼사가 무효화되면 형양 정씨가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도 없어요. 우선 형양 정씨의 경계심을 낮춰 옥이 오라버니 신임을 얻었다고 생각했을 때 반대로 형양 정씨를 이용해 북제에 가짜 소식을 전할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그렇게만 된다면 다른 세가 대족들과 나라를 흔들지 않고도 형양 정씨만 딱 제거할 수 있어요.”

사실 사방화도 이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진옥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금연을 사랑하지 않아도 그녀의 한평생을 희생시킬 만큼 모질지는 않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금연이 이 방법을 먼저 꺼냈다.

“지금 바로 오라버니를 봬야겠어요.”

금연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사방화가 곧바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잘 생각해서 결정해야 하는 문제에요! 충동적으로 행동해선 안 돼요.”

금연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물론 내 생각과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지만, 그 목적은 같은 거니 괜찮아요. 새언니, 날 막지 말아요. 사람이 살면서 어떤 일을 하는 게 가장 의미 있는 것일까요?

사실 난 여운암에서도 그냥 그렇게 잠들어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새언니와 강이 오라버니가 강렬한 이별 끝에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을 보며 깨달았어요.

내가 정말로 원했던 것은 옥이 오라버니가 이 제국의 황좌에 앉아 오랜 세월 이어온 강산의 영예를 고스란히 이어받는 것이었어요. 사랑은 일찌감치 먼지처럼 비천해졌으니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사방화도 천천히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알겠어요. 붙잡지 않을 테니 다녀오세요.”

금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우화대를 나서 어서재로 향했다. 

무덥게 쏟아지는 햇볕 아래, 너무도 서늘한 결심을 한 여인이 사라져갔다.

사방화는 가녀린 금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소천자가 우화대로 와 사방화에게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

“소왕비마마, 폐하께서 어서재로 드시라 하십니다.”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사방화는 소천자의 뒤를 따르며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금연 군주님은 어서재로 가셨어?”

소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반 시진 전에 어서재로 가셨습니다.”

“지금 분위기는 어때?”

“폐하께서 단단히 화가 나셨습니다.”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옥은 과연 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금연이 택한 희생을 허락한다고 하더라도 어찌 마음이 마냥 편할 수 있겠는가.

* * *

어서재에 다다라 소천자가 조심스레 아뢰었다.

“폐하, 소왕비마마께서 오셨습니다.”

“들라하라!”

진옥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방화가 안으로 들어서자 정중앙에 서서 평온히 고개를 숙인 금연이 보였다. 반면, 진옥은 창가에 서서 몸을 반쯤 돌리고 있었다. 보이는 건 오직 옆모습뿐이었지만, 그의 어두운 기운을 가릴 수는 없었다.

금연이 이내 고개를 들어 사방화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우화대를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굳은 결심을 반짝거리고 있었다.

사방화는 몰래 한숨을 내쉬곤 진옥을 향해 말했다.

“폐하,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금연의 결심이 무엇인지 아는가?”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옥이 눈을 가늘게 떴다.

“동의했단 말이오?”

사방화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사람마다 다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진옥이 결국 화를 냈다.

“한평생을 망치겠다는 게 올바른 뜻이라고? 내 남진은 아직 누구의 희생으로 지켜내야 할 만큼 무너지지 않았어! 그렇게 되면 내가 이 황위에 앉은 게 얼마나 쓸모없고 무능해 보이겠소!”

사방화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금연이 바로 고개를 들어 반박했다.

“어찌 무능해 보이신다는 겁니까?”

“그만하라! 내가 널 좋아하지 않는다 해서 이런 방법으로 날 창피하게 만들려는 것이냐? 넌 사내를 아주 우습게 보는구나. 싫으면 싫은 것이다, 네가 무슨 짓을 하던 난 널 좋아할 리가 없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냐? 헛된 희생일 뿐이다. 네가 그런다고 네 마음을 생각해줄 리 없으니 그만두거라.”

“폐하께서 절 좋아하시지 않는다는 건 일찌감치 알고 있었습니다. 절 좋아하실 거였다면 진작부터 좋아해주셨겠지요. 폐하를 창피하게 하려고 택한 길이 아닙니다. 제 마음을 생각해주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요. 전 그저 제가 결심한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폐하와 상관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또 상관없는 일이기도 하지요.”

진옥은 금연을 노려보다 책상 위에 있던 상소를 집어 아무도 없는 빈 공간으로 던져버렸다. 상소는 진옥의 엄청난 힘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너……. 고모님께서 널 얼마나 애지중지 키우셨는데 네가 고작 한다는 게 자신을 짓밟겠다는 것이냐!”

“제 자신을 짓밟는 게 아니라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겁니다.”

금연은 여전히 평온한 모습이었다.

“뭐가 가치 있다는 것이냐? 난 절대 형양 정씨를 남겨둘 생각이 없다. 모두 남김없이 없애버릴 것이다.”

“그래도 할 것입니다!”

진옥이 불꽃 튀는 눈빛으로 외쳤다.

“당장 꺼져라!”

금연은 더 단호하게 말했다.

“전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폐하께서도 아시듯 어머니께선 제가 원한다면 반드시 이 혼사를 성사시키실 겁니다. 오라버니께서 아무리 반대하셔도 확실한 증거와 이유를 가지고 진실을 말씀하지 않으시면 어머니께선 절대 믿지 않으실 겁니다. 게다가 이 일은 절대 밖으로 새나가서는 안 되니 득실을 따지고 보면 폐하께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신 겁니다.”

금연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돌아 나가버렸다.

그녀의 퇴장에 주렴이 쩌렁쩌렁 울리고, 진옥은 주먹으로 옥안을 내리쳤다. 

순식간에 옥안의 한 귀퉁이가 부서졌다.

어서재 앞을 지키던 소천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진옥은 며칠 전 진강이 경성으로 돌아왔을 때보다도 더 화가 난 듯 보였다.

하지만 사방화는 진옥의 짙은 분노를 이해했다. 진옥은 금연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 화가 난 것이었다.

금연의 희생이 담긴 이 방법이야말로 형양 정씨를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이었다. 다른 방법은 완벽하지도 못했고, 남진에 얼마나 큰 손해가 있을지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 진옥은 현재 스스로에게 무너진 것이었다.

남진의 천자로, 한 세대의 존귀한 제왕으로 이 황좌에 앉았지만 진옥은 단순한 황자, 황태자였을 때보다도 더 힘들고 괴로운 나날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마 과거의 제왕들도 다 이 같은 고통 위에 평생을 살아갔겠지. 아무리 황제라도 세상의 흐름조차 순조로이 흐르게 만들 수는 없었다.

고요한 어서재는 주인의 분노 앞에 더 깊은 적막으로 무너져 내렸다.

* * *

한참 후, 진옥이 옥안을 짚고 천천히 앉으며 힘없이 말했다.

“내가 금연을 연모했다면 다 좋았을 것을. 지금까지도 그럴 수는 없소.”

사방화도 진옥의 마음과 고통을 십분 이해했다. 누군가 사랑하고, 싫어하는 건 내 의지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심장의 주인도 마음을 조종할 순 없었다.

이내 사방화는 깊은 한숨을 쉰 뒤, 조용하게 이야기했다.

“사랑을 받아줄 순 없어도 그 사람 마음정도는 채워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바라는 걸 이뤄서 그 마음이 채워진다면 원하는 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진옥은 눈을 감았다.

“그래도 금연은 내 사촌 동생이오! 동생의 희생을 어찌 견디란 말이오!”

“금연이 말했던 것처럼 가치가 있고 없고는 금연의 선택에 달린 문제입니다. 폐하, 저는 이만 왕부로 돌아가 서방님 서신을 기다려야겠습니다. 서방님 생각은 어떤지 한번 기다려보겠습니다.”

진옥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방화는 어서재를 나왔다. 

어서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기다리던 금연이, 사방화가 나오는 것을 보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오라버니께서 나한테 저리 화내시는 건 처음 봤어요. 이걸로도 충분히 가치는 있네요.”

사방화는 말없이 금연을 바라보았다. 

가치가 있다……. 그래, 금연이 가치 있다면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금연은 사방화의 복잡한 눈빛을 마주하며 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시간도 늦었으니 어서 어머니와 외숙모님께 돌아가요.”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나란히 태후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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