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8화 정탐꾼의 명단
시화와 시묵이 상을 차려왔고 연람은 신나게 탄성을 질렀다.
“와! 맛있겠다! 술도 좀 줄래? 방화, 우리도 몇 잔은 마셔야죠!”
시화가 사방화의 눈치를 살피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연람 소군주는 다 나았으니 마셔도 상관없어. 난 됐으니 하나만 가져와.”
시화는 곧바로 자리를 떴고, 연람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혼자서 쓴 탕약이나 드시려고요? 아직도 몸 상태가 좋지 않으신 거예요?”
“아이를 하나 갖고 싶어서 몸조리하는 중이에요. 술은 안 마시려고요.”
연람은 순간 멍하게 눈만 깜빡이다가 서둘러 빠르게 말을 읊었다.
“좋아요! 참 좋은 생각이에요! 술 드시지 마세요. 절대로 드시면 안 돼요? 그리고 아이가 생기면 양어머니가 될 수 있게 해주세요!”
사방화는 웃음이 터졌다.
“아직 혼인도 안하고 양어머니부터 되겠다고요?”
“응? 혼인해야만 양어머니가 될 수 있는 거예요?”
“당연하지요.”
연람은 근심이 가득해졌다.
“어서 짝을 찾아 혼인을 해야겠네요.”
사방화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몸이 좋지 않아 금방은 무리일 것 같으니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연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이야기에요. 저와 이렇게 말씀을 나누시고 회임하실 수도 있잖아요. 안 돼요. 어서 준비해야겠어요!”
“그래요, 좋은 소식 기대할게요. 양어머니가 되려고 서둘러 혼인하겠단 여인은 또 처음이네요.”
그에 연람이 목을 빼들며 새초롬하게 말했다.
“어릴 적부터 연모했던 소왕야를 포기하곤 눈앞이 한없이 깜깜했는데 이젠 맘에 드는 이가 생기면 곧장 혼인할 거예요!”
“방금 혼인하지 않겠다던 분이 누구시더라?”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잖아요!”
연람이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고 소리치자, 사방화도 웃음이 터졌다. 사방화 역시 화끈하고 호탕한 성격을 가진 연람이 참 좋았다.
이내 시화가 술을 내오자 연람은 사방화에게 그동안 참았던 말들을 한꺼번에 분출하듯 정말 끊임없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 *
그렇게 무려 두 시진이 흘렀다.
진강은 사방화를 찾아 뒤뜰로 왔다가 아직도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눈썹을 까딱였다.
가까이로 와보니 연람은 아예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돼있었다.
이내 진강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연람, 우린 벌써 끝났소. 지금 오라버니가 같이 가길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일어나시오.”
연람은 마지막으로 사방화의 손을 잡고 헤롱헤롱, 이야기했다.
“약속하셔야 해요? 절대 다른 사람을 들이시면 안 돼요!”
“알겠어요, 약속할게요.”
사방화가 웃으며 말했다.
“뭘 약속한다는 것이오?”
진강이 물어도 사방화는 대꾸도 않고 손짓으로 시화만 불렀다.
“시화! 연람 소군주를 앞뜰까지 모셔다 드려. 조심히 잘 모셔야 한다.”
시화가 대답한 뒤 연람을 조심히 부축해 뒤뜰을 빠져나갔다.
연람이 나가자, 진강이 사방화의 손을 잡고 물었다.
“저리 거하게 취했는데 당신은 안 마셨소?”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도 안 마신 거 아니에요?”
진강은 대답대신 그녀에게 입맞춤을 했다.
“방화, 근데 뭘 약속하라는 것이었소?”
사방화는 웃으며 진강을 피했지만 이내 그의 품에 폭, 안겨 붙잡혔다.
“우리 아이한테 양어머니가 돼주겠대요.”
“허락했소?”
사방화가 진강의 품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럭저럭해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진강도 픽, 웃음을 지었다.
“그래, 다른 여인들보다 강하긴 하지.”
“이제 모두 부로 돌아가신 거예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피곤하진 않소?”
“괜찮아요.”
그러자 진강은 사방화의 허리를 감싸 안고 앞뜰로 걸음을 옮겼다.
“둘 다 피곤하지 않으니 아이나 만들러 갑시다.”
사방화는 순식간에 새빨개진 얼굴로 진강을 밀쳤다.
일찍이 아주 깨끗하게 정리된 앞뜰, 단정한 공간까지도 사방화와 진강의 밤을 축복하는 것 같았다.
진강은 아예 사방화를 안아들고 방으로 향했고, 부부의 달콤한 사랑의 열기는 대략 삼경(*三更: 밤 11시 ~ 새벽 1시)이 돼서야 겨우 잦아들었다.
* * *
날이 밝을 무렵, 진강은 잠에서 깨어 곤히 잠든 사방화의 입에 입맞춤하곤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옷을 갖춰 입고 아예 방을 나왔다.
이른 새벽하늘은 다소 흐렸다. 진강은 그 하늘빛을 가만히 올려다보다, 마침 물을 뜨고 있던 시화에게 손짓을 했다.
“소왕야.”
시화가 다가와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경성을 나갔다 와야 할 일이 있다. 어제 말을 한다는 걸 미처 깜빡했으니 사흘 안에 돌아온다고 전해다오. 그리고 바깥일은 내가 모두 다 맡을 테니 아무 걱정 말고 편히 쉬고 있으라고 전해주고.”
시화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로 가셨냐고 여쭈신다면 뭐라고 답할까요?”
“진옥과 상의했던 일로 뿌리를 뽑으러 간다고 하면 알 거다.”
진강의 말에 시화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잠시 머뭇거리며 말했다.
“어제 소왕비마마께서 제게 사씨 육방을 다녀오라고 하셨습니다. 명 부인께 오늘 오시(*午時: 아침 11시 ~ 오후 1시) 전까지 사씨의 정탐꾼을 시켜 북제 정탐꾼들의 명단을 가져다 달라고 하셨거든요. 명 부인께서 영패를 보시면 반드시 가져다줄 것이니 걱정 말라고도 하셨습니다.”
시화는 다시 한 번 진강의 표정을 확인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그래, 오늘 오시(午時) 전쯤이면 3백리 내에 있는 마을에 있을 테니 내가 필요하면 방화에게 날 찾아도 된다고 전해주거라.”
시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강도 준비를 다 마친 뒤 낙매거를 떠났다.
사방화는 많이 피곤했던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도 일어나지 않았다.
* * *
오시(午時) 무렵.
사씨 육방의 사은희가 영친왕부로 찾아왔다.
시화도 이제는 마지못해 사방화를 깨웠고, 사방화는 멍하게 일어나 머리를 문지르며 물었다.
“몇 시진이야?”
“오시(午時)가 다 됐습니다.”
사방화는 미간을 찌푸렸다.
“또 이만큼이나 자버렸네. 그래, 은희한테는 어서 들어오라고 해줘.”
시묵은 바로 사방화에게 옷을 입혀주었다.
사방화는 아무도 없는 방을 한번 둘러보았다. 아마 진강은 일찍부터 외출을 한 것 같았다.
“진강은 아침 일찍부터 나간 거야?”
“예, 강 소왕야께선 해가 막 뜨시자마자 나가셨습니다.”
사방화가 옷을 다 갖춰 입자 시화도 마침 사은희와 함께 낙매거로 들어왔다. 사방화는 곧장 밖으로 마중을 나갔다.
“방화 언니.”
사은희가 웃으며 인사를 올렸다.
사방화도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화당으로 향했다.
사은희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옷소매에서 종이를 꺼냈다.
“어머니께서 제게 놀러 갔다 오라고 보낸 게 아니라 하셨습니다.”
사방화는 일단 종이를 받아들고 그녀에게 말했다.
“응, 잠시만 기다려줘.”
사은희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묵은 서둘러 사은희를 위해 차를 내주었다.
* * *
사방화는 종이를 들고 즉각 내실로 향했고, 시화가 뒤따라 들어왔다.
“소왕비마마, 어제 소왕야께서 마마께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다고 하셨습니다. 경성을 나갔다가 사흘 안에 돌아온다고 하셨어요. 바깥일은 소왕야께서 다 처리하실 테니 마마께선 어떤 것도 일절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말씀은 없으셨고?”
“폐하와 상의했던 일로 뿌리를 뽑으러 간다고 하면 마마께서도 아실 거라 하셨습니다. 그 일로 직접 가셔야만 한다고 하셨어요. 또 마마께서도 어제 소왕야께 말씀드리는 걸 잊으신 것 같아 제게 사씨 육방에 다녀오라 하셨던 일을 말씀드렸습니다.”
“뭐라고 하시던데?”
“오늘 오시(午時) 전쯤이면 3백리 내에 있는 마을에 계실 테니 마마께서 필요하시다면 찾으셔도 괜찮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은희에게서 받은 명단을 펼쳐보았다.
이내 사방화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시화, 서방님이 청암도 데리고 가셨니?”
시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무공 실력이 형편없어서인지 청암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기러기도 사라진 걸 보니 소왕야께서 데려가신 듯합니다.”
사방화는 직접 창문을 열고 바깥으로 소리쳐보았다.
“청암!”
이내 검은 그림자와 함께 청암이 바람처럼 나타났다.
“예, 소왕비마마!”
사방화는 청암에게 그 명단을 넘겨주며 말했다.
“강 소왕야께서 3백리 너머에 계시다고 한다. 가서 이 명단을 전해다오.”
청암이 망설였다.
“소왕야께선 제게 소왕비마마를 철저히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왕부에서 나가지도 않는데 내게 무슨 일이 있겠어? 널 여기 남겨둔 건 급한 일을 위해서일 거야. 어서 가. 최대한 빨리 전해드려야 한다.”
“알겠습니다!”
청암이 고개를 끄덕이며 명단을 가지고 낙매거를 빠져나갔다.
그런 후에도 사방화는 창가에서 잠시 생각을 하다 시화에게 말했다.
“시화, 마차를 준비해 줘. 황궁에 갔다 올게.”
시화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네? 마마, 지금 황궁에 가시겠다고요?”
“응.”
시화는 조금 머뭇거리며 말했다.
“소왕야께서 경성을 나가시자마자 마마께서 황궁에 드신단 걸 누군가 전하기라도 한다면……, 왕야와 왕비마마께서도…….”
사방화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왕비마마께 가서 지금 급한 일이 있어 황궁에 가야하니 함께 가자고 말씀드려 줘.”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시화는 즉각 본원으로 향했고, 사방화는 내실을 나와 사은희에게로 갔다.
* * *
“은희야,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미안하게 됐어. 오늘 꼭 황궁에 다녀와야 할 일이 생겨서 나중에 다시 이야기 나누면 안 될까?”
사방화는 몹시 미안한 기색에다 낯빛도 썩 어두웠다.
사은희도 진정 급한 일이 있음을 알아챘다. 집에서 나설 때도 어머니 명 부인이 절대 명부를 잃어버려선 안 되니 조심하라고 몇 번이나 당부를 했기에 아주 중요한 일이란 걸 어느 정도는 눈치 채고 있었다.
“방화 언니, 우린 어차피 한 자매고, 한 가족인데요, 뭐. 중요한 일이라는 걸 이해합니다. 저도 언니께 무사히 전해드렸으니 어서 집으로 돌아갈게요.”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시묵에게 말했다.
“시묵, 은희 아가씨를 잘 모셔다 드려라.”
시묵이 대답 후, 사은희를 데리고 낙매거를 빠져나갔다.
* * *
한편, 한창 꽃을 가꾸던 영친왕비도 시화의 말을 전해 들었다.
“응? 방화가 나와 함께 황궁에 들자고 했다고?”
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라 말하지는 않고?”
“예, 급한 일이라고만 하셨습니다. 청암에게도 소왕야께 서신을 전해드리라고 보내시곤 곧장 황궁에 들어야겠다고 하셨어요.”
영친왕비는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빨리 준비해서 가겠다고 전해주거라.”
시화가 서둘러 낙매거로 돌아가자 입구에서 막 나오는 사방화가 보였다.
영친왕비가 준비하고 있단 말을 전하니, 사방화도 곧 대문으로 향했다.
이내 영친왕비도 서둘러 준비를 끝내고 본원을 나왔고, 집사 희순도 두 사람이 황궁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일찍이 마차를 준비해두었다.
* * *
한창 황궁으로 달려가는 마차 안에서 영친왕비가 물었다.
“방화야,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니?”
“그리 큰일은 아니지만 좀 복잡해서 폐하께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제 이전의 행동 때문에 서방님이 경성을 나서자마자 홀로 황궁에 들면 괜한 구설수에 오를 것 같아 어머님을 모시고 나왔습니다.”
“그런 유언비어는 신경 쓸 필요 없단다. 사람은 한평생 자신에게만 떳떳할 수 있으면 돼. 남진이 힘을 모아야 할 시기이니 복잡한 일이라면 황상에게도 알려드려야지.”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곧이어 마차가 황궁에 다다랐다.
사방화와 영친왕비는 황궁에 들어서자마자 어린 태감 하나를 잡고 물었다.
“폐하께선 어디 계시느냐?”
“조금 전 대장공주마마와 금연 군주님께서 폐하를 뵙겠다고 입궁하셨습니다. 지금은 태후마마를 뵈러 먼저 가셨습니다.”
영친왕비가 사방화를 바라보았다.
“어머님, 그럼 어서재로 가세요. 폐하께서 어서재에 안 계시더라도 우리가 왔단 소식을 금세 들으실 테니 곧 어서재로 오실 겁니다.”
“맞는 말이구나.”
영친왕비도 사방화가 다른 이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아하는 일이라는 걸 눈치 채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그렇게 어서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