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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7화 (797/978)

797화 혼담을 나누다 (2) 

그리고 사방화는 제 답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연석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진강은 겉보기엔 무심해보여도 실은 아주 세심한 사람이에요. 저도 모르는 일을 언제나 한눈에 알곤 하니까요. 아마도 품죽이……, 우리 오라버니를 연모하고 있는 것 같네요.”

연석은 순간 어리둥절해 눈을 크게 떴다.

“같은 사씨끼리 어찌 혼인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방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품죽은 남양에 있는 사씨 방계의 곁가지로 일찌감치 벌써 10대는 넘어 혈연이 다 옅어졌습니다. 많은 방계에 흩어져있는 사씨 자녀들도 일찌감치 서로 통혼하기도 했고요. 품죽이 정말 오라버니를 연모한다면 예법에서도 어긋나는 일은 아닙니다.”

연석은 일순 목이 메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연석 소후야, 소후야는 무려 영강후부의 소후작 아니십니까. 세상엔 아직도 소후야와 혼인하겠다는 훌륭한 여인들이 넘쳐날 겁니다. 품죽이 원치 않는다니 마음을 접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본래 말이 많고 복잡한 혼인은 결국 서로가 연이 아니란 뜻이겠지요. 앞으로 더 마음에 드는 여인을 만나 행복하게 사세요. 어디에선가 소후야의 짝이 소후야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연석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내 조상님께 죄를 지었던 건가……. 어찌 제 마음에 드는 여인 하나 만나기가 이토록 힘들단 말입니까? 사 후야께서도 품죽을 연모하실 거란 보장이 없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방으로 들어가 버린 연석을 보고, 사방화는 머리가 지끈지끈 거려 고개를 흔들었다.

“소왕비마마!”

그때, 사방화를 부르는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즐겁게 낙매거로 들어서는 연람이 보였다. 연람은 낙매거로 뛰어오며 다짜고짜 부엌 앞에 서 있는 사방화부터 크게 소리쳐 부른 것이었다.

짙은 밤이지만 아리따운 연람이 별빛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걸보니 사방화의 기분도 금세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사방화도 곧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온단 말을 듣고 기다렸는데 반 시진이 넘어서야 드디어 만났네요.”

연람은 신나게 달려왔다가 돌연 사방화를 향해 공손히 예를 갖췄다.

“소왕비마마!”

사방화는 새초롬하게 눈을 흘기며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연람, 자꾸만 나랑 그렇게 거리를 둘 건가요? 그러고 보니 내가 혼인하고부터 늘 그렇게 딴 사람처럼 예를 차렸던 것 같은데. 그러지 말아요, 내가 말했었잖아요. 어디에 있든 내가 사방화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고요. 그냥 예전처럼 친한 벗 같이, 또 자매같이 편하게 지내요, 우리.”

연람은 찡긋, 웃으며 사방화를 바라보다 덥석 그녀의 어깨를 잡고 이곳저곳을 세세히 살폈다. 이내 연람이 사방화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강 소왕야도 참 대단하시네요. 황궁에서 봤을 땐 거의 도 닦는 분과 얘기하는 줄 알았다니까요! 이제야 제 모습을 찾았네요.”

사방화도 웃음을 터뜨렸다.

“다친 데는 좀 어때요?”

연람은 금세 나비처럼 빙그르르, 돌곤 사랑스럽게 웃었다.

“약이 얼마나 잘 듣던 지요! 벌써 이렇게 걷고 뛸 수도 있어요! 일전엔 계절이 변하는 데에만 아쉬워하며 슬픔을 느꼈는데 죽을 뻔한 경험을 했더니 살아있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이제야 알게 됐어요.”

사방화가 웃으며 말했다.

“후부에서 식사 안 하고 왔죠?”

“당연하죠! 한턱 내신다기에 얻어먹으러 왔어요. 그런데 우리 저 남정네들이랑 같이 있지 말고 우리 둘만 조용한 곳에 가서 얘기 나눠요. 후부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얼마나 숨이 막혔는데요.”

연람이 화당에 많은 이들이 모인 걸 힐끗 보고 사방화에게 살짝 속삭였다.

“그럼 뒤뜰로 가요! 볼 건 없지만 고즈넉하고 괜찮아요.”

“좋아요!”

사방화는 연람의 손을 잡고 시화에게 말했다.

“뒤뜰에 따로 식사 준비 좀 해줘.”

“알겠습니다, 소왕비마마!”

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화, 연람은 그렇게 다정한 자매처럼 손을 잡고 뒤뜰로 향했다. 

* * *

낙매거 뒤뜰은 전체적으로 아주 깨끗했다. 계수나무 몇 그루와 탁자와 의자, 참 단정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연람은 자리에 앉자마자 사방화에게 말했다.

“어머니께서 감사 인사를 드리라며 당부하셨어요. 방화가 아니었더라면 아들을 망쳐놓았을 거라고요. 오라버니가 예전과 많이 달라진 모습에 어머니께서도 많이 뿌듯해하세요.”

사방화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연석이 과연 자신의 시녀에게 장가를 들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게 돼도 여전히 감격해줄까. 하지만 연람에게도 말을 꺼내기는 쉽지 않아 그저 미소만 지었다.

“후 부인께서도 참,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어머니께서도 많이 달라지셨어요. 예전에 어머니께는 너그러움이란 찾아볼 수도 없었는데. 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드세신지 잘 아시잖아요. 평생 살아오면서 이제야 비로소 영강후부가 집처럼 느껴져요.”

“후 부인께서 아이를 낳으시면 이젠 혼사 얘기를 꺼내실 거예요.”

연람이 바로 입술을 삐죽였다.

“전 시집가고 싶지 않아요!”

사방화가 웃으며 말했다.

“남진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지, 보는 사람마다 혼인하길 원치 않아 하네요. 평생 외로이 살아가려는 거예요?”

“그것도 좋죠.”

사방화는 미소를 지으며 연람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연람, 그러지 말고 어서 잘 생각해둬요. 후 부인께서도 어렵사리 너그러워지셨는데 시집가기 싫단 말을 들으시면 또 걱정하실 거예요.”

연람이 크게 웃으며 사방화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방화, 그런데 우상부 일에 대해선 들으셨어요?”

“무슨 일이요? 오늘 오전에 돌아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몰라요.”

“모르신다고요? 그럼 조금 전 혼인하길 원치 않는단 말은 무슨 뜻이에요?”

“아까 정명, 송방, 목청 공자님 이야기를 얼핏 들은 거예요.”

연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말했다.

“이여벽이 출가하겠다고 난리를 쳐서 우상 부인께서 걱정에 머리가 하얗게 세셨대요. 우상께서도 어찌하질 못하셔서 우상부 분위기도 말이 아니고요.”

사방화가 깜짝 놀랐다.

“왜요?”

“뭐 때문이겠어요? 줄곧 강 소왕야를 연모했는데 이젠 일말의 희망도 없으니 그런 거지요. 우상부와 폐하의 혼사도 물러졌으니 인생이 아무 의미가 없어져 절에나 들어가려는 건가 봐요. 이틀 전 우상 부인께서 금연 군주님께 부탁해 어찌 좀 타일러 보라고 하셨는데도 씨알도 먹히질 않는대요. 어찌 저리 마음을 접을 생각을 않는지.”

사방화도 한숨을 내쉬었다.

“목청 공자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던데요?”

“어디 가서 자랑할 일도 아닌데 어찌 얘길 꺼내겠어요? 게다가 두 분과도 관련된 일이잖아요. 강 소왕야께서 이여벽을 보면 죽여 버린다고 하셨던 건 아세요?”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건 내게 화가 나 했던 말일뿐이었어요. 설령 정말 마주친다 해도 어디 사람을 함부로 죽일 분인가요.”

“진심이 아니라고 해도 우상부에서 들었을 땐 엄청난 공포였을 거예요. 소왕야가 어떤 분이신데요? 정말 마음을 굳게 잡수신다면 정말로 사람을 죽이지 않으실 거라 확신하실 수 있으세요?”

사방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인 것 같네요.”

연람이 고개를 내저었다.

“관련이 있긴 하지만, 탓할 정도는 아니에요. 이여벽이 소왕야에 대한 마음을 접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게 문제지요. 단념만 하면 될 것이지 출가를 하겠다고 이 난리를 피워대니 누굴 탓하겠어요?”

이여벽은 신분, 미모, 재주, 어디를 따져 봐도 최고에 속하는 완벽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대로 떠나버린다면 너무도 아깝고, 안타까울 듯했다.

사방화도 그렇게 근심에 젖어있는데, 연람이 팔랑팔랑, 손을 내저었다.

“됐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워낙 고집이 세니 좋은 일도 아닌데요, 뭘. 대장공주부에선 벌써 신랑감을 구했대요. 이변이 없는 한 금연 군주님께서 혼인하시게 될 거예요.”

“어떤 가문인데요? 금연도 동의한 건가요?”

연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형양 정씨 적자로 사씨 장방의 큰 아가씨와 혼약을 맺었었다가 사씨 장방이 영남으로 유배되면서 혼담도 자연히 끊어졌대요. 대장공주마마께서 보시기에 괜찮은 인물로 보였고, 금연 군주님도 보시고 괜찮다고 하셨대요. 대장공주마마께선 여태 암암리에 중매를 부추기고 계셨던 거예요.

형양 정씨에서 무려 대장공주부의 적녀를 원치 않을 리가 있을까요?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건 당연하죠. 두 가문 모두 동의하면 선황폐하의 효기가 지나고 난 후에 혼인을 치를 수 있을 거예요.”

사방화는 너무나 뜻밖이란 생각이 들었다.

“고모님께서 어찌 형양 정씨를 고르신 거죠? 그리 아끼시던 금연을 어찌 저 멀리 시집보내신단 말이에요?”

연람이 다가와 속삭였다.

“사실 형양 정씨 적자는 우상 부인께서 먼저 점찍어뒀었어요. 이여벽에게 뜻을 물었지만 여벽은 죽어도 경성을 떠나지 않겠다며 거절했대요. 대장공주마마께서 그걸 보시고 금연 군주님 뜻을 슬쩍 물어보신 거였는데 뜻밖에도 금연 군주님이 동의를 하더래요.”

선황제와 영친왕의 누이 대장공주는 황족 가문답게 드높은 명성은 있으나 권력은 없었다. 때문에 형양 정씨 가문과도 어울리는 격이라고도 볼 수 있었지만 그곳은 여기 경성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본래 금연과 이여벽은 태생부터 뛰어난 미모와 넘치는 재주로 유명세를 떨쳤다. 그 외에도 이 미인들의 공통점은 많았다.

대장공주부 군주, 우상부 아가씨라는 고귀한 신분, 고집스러운 성격, 그리고 각각 진옥, 진강 두 사촌 형제를 좋아한다는 연심까지.

우상 부인은 그렇게 연모에 젖은 딸을 위해 최대한 이 경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찾다보니 형양 정씨 적자를 택하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여벽은 멀리 시집가는 것도 거부하고 출가만 고집하고 있었다.

이를 보고 대장공주가 살짝 기회를 잡아 금연에게 의사를 물었지만, 매우 뜻밖에도 금연이 바로 이 혼사에 동의를 했다.

“저도 금연 군주님이 그렇게 흔쾌히 승낙하실 줄은 몰랐어요. 아시다시피 성격도 좀 있잖아요. 저도 어머니 감시 아래 금연 군주님을 못 본지도 며칠 돼서 왜 승낙을 한 건지 정확한 연유는 모르겠네요.”

사방화는 한참 연람의 말을 들으며 잠시 생각한 끝에 입을 열었다.

“사실 경성을 떠나 멀리 시집가는 것도 나쁠 건 없죠. 형양 정씨 적자는 인품도 단정하고, 온화하고, 어릴 때부터 가문의 훌륭한 교육을 받아 재주도 넘치고 미모도 뛰어나다고 들었어요.

오죽 좋았으면 사씨 장방 백모님도 다방면으로 수소문해 혼약하려 하셨을까요. 보향 언니도 하겠다니 서둘러 날을 잡으신 거죠.

백모님이 사씨 가문인 것에 만족만 하셨더라도 사씨 장방을 무너뜨리고 혼사를 망칠 일은 없었을 거예요.”

“그래요, 근데 형양 정씨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어릴 적부터 경성에서 자라오신 금연 군주님이 거기서 적응을 잘할 수 있을까요?”

여전히 걱정에 잠긴 연람을 보고, 사방화가 미소를 지었다.

“사실 금연이 경성을 떠나지 않겠다면 형양 정씨와 혼인해도 경성엔 남을 수 있어요. 사씨 장방과 단박에 정혼한 것만 봐도 형양 정씨도 분명 경성에 발을 붙이고 싶어 하는 거니까요.”

연람이 웃으며 말했다.

“그것도 맞네요. 아……. 어릴 적엔 늘 원하는 대로만 했었는데 크고 나니 멋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사방화는 돌연 쓸쓸한 외로움을 느꼈다.

그녀는 평생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충용후부와 사씨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텨온 인생이었다. 그 사랑했던 진강조차 잊어버린 채 오직 가문을 지키는 데만 전념했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방화가 기억을 잃었기에 진씨 황가와의 갈등을 피할 수 있었지만, 이 기억을 모두 홀로 안고 산 진강은…….

기억을 잊지 못한다는 건, 그것도 상대와의 추억을 혼자서만 기억하고 있다는 건, 기억을 다 잃은 자보다 몇 배는 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영원한 고독에 갇혀 산다는 것이 그 얼마나 괴로운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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