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0화 태자의 통치 (2)
물총새가 황궁으로 돌아올 무렵, 진옥은 이목청과 논의를 하던 중이었다.
이내 물총새가 푸드덕거리며 어서재로 들어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진옥의 품에 안겼다. 마치 맹수가 뒤를 쫓아온 듯 공포에 질린 모습이었다.
진옥은 새의 다리에 서신이 없는 걸 보고 밖을 보며 눈썹을 치켜들었다.
물총새가 짹짹 지저귀며 눈동자를 굴리는 모습은 마치 진옥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만 같았다.
진옥은 곧 콧방귀를 한번 뀐 후, 물총새를 다독거려주었고 새는 진옥의 손길에 금세 안정을 찾곤 먹이를 찾아 날아갔다.
“이리 영리한 새까지 키우고 계셨군요.”
이목청이 웃으며 말했다.
“초지가 길들여 내게 준 것이다.”
“과연 영리하군요. 강 소왕야와 방화 아가씨를 찾으러 갔던 겁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진옥의 안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강 소왕야께선 돌아오길 원치 않으시나봅니다.”
“제 뜻대로는 안 될 것이야.”
이목청도 진옥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식이 전해졌으니 방화 아가씨 성격이라면 며칠 내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런데 제언경 황자의 행동이 이리 빠를 줄은 몰랐습니다. 북제로 돌아갔던 건 권력을 쥐러 간 셈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진옥의 안색이 굳어졌다.
“운계 공자도 황위를 원치 않고 몇 년째 황태자 자리가 비어있었으니 북제 황제도 망설임 없이 제언경에게 자리를 내어준 것이지.”
“북제 폐하께서 황태자를 책립하시고 황후마마와 행궁으로 요양을 가셨답니다. 북제의 모든 권력을 황태자에게 넘기고 나라를 다스리도록 한 것이지요. 황태자에게 직접 통치권을 넘겨준다는 건 역대에도 찾아볼 수 없는 일입니다. 황위에서 물러나지도 않고 황태자에게 통치권을 주다니, 실상은 황태자의 이름으로 황권을 잡은 것입니다.”
“북제 황제는 제언경의 행동을 암묵적으로 용인해줬다. 그간 북제가 갈고 닦아 온 야심, 황후에 대한 마음도 차츰 뜰 때가 된 것이지. 북제 황제가 직접 남진에 전쟁을 선포한 것은 아니지만, 황후도 북제 황제가 지금껏 참아와 준 걸 생각해 조용히 계신 것일 것이다.
과연 북제가 갈고 닦아온 실력이 남진을 넘어올 수 있을지, 아니면 남진이 이를 충분히 지켜낼 수 있는지, 더 나아가 반격할 수 있는지는 한번 봐야겠군. 하지만 오랫동안 사씨만 겨냥해왔으니 우리의 국력과 병력은 북제에 비해 그야말로 모래알 수준이야…….”
“여태 있었던 남진의 병폐는 황실과 사씨 사이에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사이에 더 틀어질 일이 없으니 북제와 맞서게 되면 반드시 패할 거라 볼 순 없습니다. 반년의 시간만 준다면 가능성은 충분할 겁니다.”
“당연히 질 수 없지! 하지만 제언경이 반년이란 시간을 줄 인물은 아니지.”
이목청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고, 진옥은 시선을 옮겨 통통히 배불리 먹고 잠든 물총새를 바라보다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수해를 맞아 봄 농사가 지체돼 올해 수확은 그다지 이상적이진 못할 거다. 백성들 국세에 기대자니 부담이 커 원한이 생길까 걱정이군. 몇 년간 사씨 미량에서 비축해 둔 양곡 천만 단으로 조금이나마 도움 받는다면 군량미는 충분히 마련할 수 있을 듯한데. 운란 공자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
이목청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릅니다.”
“운란 공자, 운계 공자가 진강을 막도록 보냈던 내 사람들과 대치했던데 여태 돌아오지도 않고……. 다시 심수간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건가?”
진옥의 말에, 이목청도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몸이 좋질 않아 분심까지 더 심해졌다고 합니다.”
진옥은 한참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진정 분심을 해결할 방법이 없단 말인가?”
이목청이 고개를 내저었다.
“있다면 좋겠습니다. 분심만 해결할 수 있다면 방화 아가씨도 굳이…….”
뒷말은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추측할 수 있었다.
그에 진옥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 * *
이날, 북제가 황태자를 책립했고 북제 황제, 황후는 행궁으로 요양을 떠나 북제의 황태자가 천자를 대신해 나라를 다스린다는 소식이 파다하게 퍼졌다.
이로 인해 남진 조정에선 모두 북제가 진정 전쟁을 치르려 결심한 것 같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제언경이 막북 변경에서 병사를 일으킨 것에 관해 여태 북제 황제는 잘잘못을 따지지도 않았고 심지어 그를 황태자 자리에 앉혀 나라의 모든 통치권까지 넘겨주었다. 이는 곧 제언경이 남진을 향해 병사를 일으킨 것을 암묵적으로 용인함으로써 전쟁의 뜻을 천하에 알린 것과 같았다.
남진은 불리한 상황에 처했지만, 전력을 다해 북제에 맞설 수밖에 없었다.
문무백관들은 모두 제각기 뜻을 냈지만, 나이 든 신하들은 전쟁터에 나갈 힘이 없었고 젊은 세대는 이제 막 조정에 발을 들여놓은지라 경험이 부족해 이 남진의 상황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황제 진옥은 오히려 차분하게 문무백관들의 의견을 경청하곤 아무 말도 없이 조회를 마무리 지었다.
대신들은 다시 황제의 생각을 헤아려보기 바빴다.
* * *
영친왕부.
영친왕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돌아오자, 영친왕비가 바로 물었다.
“북제가 태자를 책립해 모든 권한을 넘겨주고 북제 황제, 황후는 행궁으로 요양을 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들었어요. 이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영친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제언경과 옥가가 흥병을 주장하는데 북제 황제까지 묵인한데다 사실상 모든 황권을 잡은 황태자 자리에 앉았으니 정말 조만간 출병할 듯하오.”
“황상도 목청, 연석과 줄곧 군량미를 준비하고 계시다 들었어요. 남진에 이토록 인재가 널렸으니 겨룬다 해도 북제에 질 거라 생각하진 않아요.”
“말은 그렇지만, 북제 황실과 옥가가 힘을 합쳐 날로 국력을 키운 데다 오래 계획도 해왔잖소. 하지만 남진은……. 아휴, 시간이 너무 부족한 듯하오. 미미했던 차이가 이리도 크게 벌어졌는데 하물며 몇 년이나 지났으니…….”
“강이가 언제쯤 방화와 돌아올지 모르겠어요. 여태 소식도 없으니, 참.”
영친왕비의 말에 영친왕도 연이어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온다 하더라도 황상과 어찌 지낼 수 있을까 모르겠어. 계속 이전처럼 지낸다면 차라리 돌아오지 않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지.”
“설마 그러겠어요? 우리 강이는 대의를 모르는 아이가 아니에요. 일전에 연석도 강이를 따라다녀 황상이 탐탁지 않게 봤었지만 지금은 조정에서 제 할 도리를 다하고 있지 않습니까? 황상이 중한 임무도 맡기셨다 하던데요?”
“그렇소. 진호는 아직도 반성 중이요?”
영친왕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좌상도 그 일로 무척이나 분노하셨어요. 당신이 두문불출하고 반성하게 했더니 줄곧 갇혀 있었어요. 그러다 선황폐하께서 승하하신 날 황궁에 갔다가 설영을 만나 사죄를 하고선 여태 조용하답니다. 정말 반성하는 듯해요.”
“조정에 한창 사람이 필요한 시기니 내일 황상께 진호 얘기를 해봐야겠소.”
영친왕비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진호도 강이와는 거리가 멀고 황상과 잘 지냈었으니 말씀해보세요. 어쨌거나 영친왕부 큰 공자인데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지요.”
* * *
사방화는 줄곧 허약했던 상태에 월사까지 겹쳐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진강은 종일 한기에 힘들어하는 그녀를 보며 더욱더 괴로워했다. 아예 이불에 폭 싸매 끌어안아 봐도 당최 좋아질 기미도 보이질 않았다.
“통증을 줄여줄 약은 없소?”
“독을 포함한 약이 있어요.”
“그럼 그거라도 먹어야지.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순 없잖소. 아니면 온천에 들어가 몸이라도 좀 녹이겠소?”
사방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날엔 물에 들어가지 않는 게 좋아요.”
진강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어떡하오? 전엔 이 정도로 힘들어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사방화가 진강을 더 꼭 끌어안고 말했다.
“그래도 당신 품에 안겨 있으면 좀 괜찮아요. 전엔 매번 약을 먹었는데 언신이 제 몸이 쌓인 독소를 거의 다 빼줬어요. 하지만 예전만큼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조금 더 심할 뿐이에요. 참을 수 있어, 괜찮아요.”
“내가 대신 아파줄 수만 있다면 참 좋겠소.”
자신보다 더 괴로워하는 진강을 보고, 사방화도 웃음이 터졌다.
“이 고통을 당신이 어떻게 대신 느끼겠어요?”
“그러니까…….”
진강은 사방화를 더 꼭 껴안다가, 저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한기에 그녀의 손발이 꽁꽁 얼어버린 것을 느꼈다. 한여름, 진강의 뜨거운 체온에도 이토록 극심한 한기라니……. 진강은 사방화의 고통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청암!”
“예, 주인님!”
“장작을 패서 이 방 좀 데워다오.”
곧바로 사라지는 청암을 보고 사방화가 또 피식, 웃었다.
“당신 같은 주인님 밑에서 청암이 참 고생하네요. 불 때고, 밥하고, 장작 패기에 온갖 일을 다해야하니 조금 있으면 못하는 것도 없겠어요.”
“그럼 그런 청암에게 시집오는 여인은 참 편하겠지.”
사방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좋은 물을 다른 밭에다 뿌려선 안 되겠어요.”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진강은 사방화의 차가운 뺨에 자신의 얼굴을 부비며 말했다.
* * *
잠시 후, 바닥 이불에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좀 따뜻해졌소?”
진강이 물었다.
“응, 훨씬 나아요.”
사방화의 대답에, 진강은 크게 안도했다.
몸이 따뜻해지니 창백했던 사방화의 안색도 돌아왔고, 손발도 따스한 온기를 되찾았다. 그녀도 이젠 점점 졸음이 밀려오는 듯했다.
“자고 싶으면 좀 자도 돼.”
진강이 사방화의 등을 토닥였다.
“덥지 않으세요? 다른 데 가서 있으셔도 되는데.”
사방화가 말했다.
“차디찬 당신을 안고 있으니 더울 새도 없소.”
진강이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사방화는 그의 품 안에서 조금 더 편히 자리를 잡고 얼굴을 파묻었다.
“그럼 자는 동안 계속 이렇게 안고 있으셔야 해요.”
“응.”
사방화는 정말로 잠에 빠졌다.
진강은 눈 밑에 그늘이 진 사방화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틀간 고통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던 게 분명했다.
사방화는 겉으론 이리 가냘프고 연약해보여도 속은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었다. 어떠한 고난이 있어도 실낱같은 바람결에 조차 흔들림이 없었다.
사방화는 진강과 혼인하게 된 것이 평생의 복이라 했다. 하지만 진강은 저야말로 이런 위대한 여인과 혼인하게 된 걸 엄청난 복이자 영광으로 여겼다.
* * *
5일 후, 사방화는 이제 기력이 많이 회복됐고 안색도 좋아져있었다.
진강은 그제야 안도했지만, 사방화는 며칠 새 야윈 진강을 보고 마음이 미어졌다. 안 그래도 조각 같던 이목구비는 더 뚜렷해졌고, 사방화는 그런 아름답고 처연한 진강이 애처로워서 씁쓸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픈 건 저였는데 당신을 더 괴롭게 만들었네요.”
“당신과 그 일 두 번만 하면 내 괴로움도 금방 풀릴 거요.”
그새를 못 참고 농담하는 진강을 보고, 사방화는 금세 얼굴이 붉어져 정원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청아한 풍광을 보니 금세 또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이제는 돌아가야겠죠…….”
“며칠 더 머무를 수 있소.”
진강도 아쉬운듯했다.
“새 황제폐하께서 즉위하신지도 보름이 넘었고 저희도 오랫동안 머물렀잖아요. 조만간 북제에 움직임이 있을 텐데 상황이 어떨지 모르겠어요.”
“별 게 있겠소? 하늘을 뒤집진 못할 것이오.”
사방화의 걱정에도, 진강은 그저 내 일이 아니라는 듯 이야기했다.
이내 사방화가 진강을 꼭 끌어안았다.
“진강, 이제 돌아가요. 며칠 더 있어도 어쨌든 돌아가야 하는 건 마찬가지잖아요. 상황이 나아져서 평화로워지면 그때 또 와요. 우리 또 올 수 있죠?”
“당연하지!”
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님도 좋아하실 텐데 우리 버섯이랑 나물도 가져가요.”
“좋소, 전부 가져갑시다.”
진강이 엷게 웃으며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