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9화 (789/978)

789화 태자의 통치 (1) 

황궁 어서재.

진옥이 한창 상소를 읽고 있는데 소천자가 크게 소리를 쳤다.

“폐하! 폐하! 어서 보십시오!”

진옥이 붓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냐?”

“하……, 하늘 좀 보십시오!” 

소천자는 경이로움에 말까지 더듬었다.

진옥도 즉시 붓을 내려두고 어서재를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빛이 별빛을 삼키고 긴 꼬리를 내민, 실로 묘한 광경이었다.

진옥은 눈살을 찌푸리며 밤하늘의 낯선 모습을 바라보다 소천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소천자는 너무 놀라 아예 넋이 나가버린 듯했다.

“뭘 본 것이냐?”

소천자는 서둘러 바닥에 꿇어앉아 말했다.

“소인……. 모든 별이 모습을 드러낸 뒤 달을 에워싸며 돌고 있기에 폐하를 불렀습니다만 폐하께서 나오시자마자 달이 사라지고 별 2개마저……, 뒤이어 사라졌습니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실로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라 깜짝 놀라 폐하를 불렀습니다. 심려 끼쳐 송구합니다.”

진옥은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으니 일어나라.”

소천자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옥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피었다 진 꽃처럼 모든 게 순식간에 지나가버리고 하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검은 빛을 유지했다.

“소천자, 가서 흠천감 천관을 데려오너라.”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소천자는 즉각 진옥의 명을 행하러 떠나고, 진옥은 어서재로 돌아왔다.

잠시 후, 소천자가 흠천감 천관을 데려왔다. 

천관이 정중히 인사를 하자, 진옥이 바로 그에게 물었다.

“문 대인, 오늘 기이한 별의 움직임을 보았는가?”

천관은 어리둥절한 빛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신, 보지 못했습니다. 어떤 기이한 움직임을 말씀하시는지요?”

진옥의 지시에 소천자가 하늘에서 보았던 것을 천관에게 설명했다.

“그런 움직임이 있었다고?”

천관이 깜짝 놀랐다.

“예, 소인이 두 눈으로 직접 봤습니다. 폐하께서도 잠깐 보셨고요.”

소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옥이 다시 천관에게 물었다.

“그래, 짐은 직접 보진 못했다만 무엇을 예시하는지는 알고 있는가?”

천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신의 천문 성상 연구가 정통하지 못해 하늘의 뜻을 헤아릴 수가 없사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폐하.”

“됐으니 가보게. 고대 자료를 살펴보고 깊은 뜻이 있는 건지 알아봐주고.”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소신, 곧바로 알아보겠습니다.”

문 대인은 인사를 올린 후 어서재에서 나갔다. 

진옥은 더 이상 상소를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듣자하니 경이와 목청, 연석, 공자들이 모여 래복루에 갔다던데?”

소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그 외에 최 시랑, 왕 공자님, 정 공자님도 계십니다.”

“우리도 가자.”

진옥은 용포를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폐하, 대인들께 미리 말씀을 전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소천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진옥의 채비를 도와 황궁을 나왔다.

* * *

이제 래복루의 친우들은 술을 반쯤 걸치고 한층 흥이 올라있었다.

그러다 진옥의 등장에, 모두가 놀라서 얼떨떨해하다가 일제히 술잔을 내려놓고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진옥은 바로 손을 내저었다.

“오늘만큼은 신분 따위 따지지 말고 예전처럼 편히 하자.”

이목청과 연석은 진옥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 채고, 서로 잠시 눈짓을 주고받다 고개를 끄덕였다.

* * *

눈 깜짝할 새 열흘이 지났다.

하지만 진강은 여전히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깊은 산속, 물 좋고 공기 좋은 이 공간은 실로 꿈을 꾸듯 평온했다. 모든 번뇌도 다 사라지고 오히려 그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세상이 거짓이라 느껴질 만큼 세상은 원래 이렇게 평화로운 것이란 착각도 일었다.

진강과 사방화는 사냥을 하거나 물고기를 잡고 버섯과 산나물을 캐 요리를 하며 이곳에서 지극히 평범한 둘만의 시간을 즐겼다.

그러나 오늘 아침, 잠에서 깬 사방화는 몹시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진강도 마침 부엌에서 방으로 들어오다가 사방화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왜? 일어났는데 내가 옆에 없어서 화난 것이오?”

사방화는 시무룩한 얼굴을 들고 진강을 올려다보았다.

“월사(*月事: 월경)가 왔어요.”

진강은 순간 바람 빠지듯 엷은 웃음을 터뜨렸다.

“난 또 무슨 일이라고, 덧댈 천은 있소?”

사방화가 점점 새빨갛게 물들어가는 얼굴로 대답했다.

“당신과 매일 밤을 보내고…… 몸조리도 잘 해서 회임할 수 있을 줄 알고, 아무런 준비도 안 했어요…….”

진강이 미소를 지었다.

“생명은 인연에 맞춰 온다고 하지 않소. 아직 때가 아닌 가보오. 천은 내가 얼른 하나 만들어 주겠소.”

진강이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사방화도 혹시나 진강과 자신 사이에 자식을 두지 못할 수도 있단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진 것을 느꼈다. 사방화가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물었다.

“하실 수 있어요?”

“응!”

사방화는 피식, 웃으며 침상에 앉아 가만히 진강을 기다렸다. 

잠시 후, 진강이 천을 가져와 그녀에게 내밀었다.

“어떻소?”

바느질은 삐뚤빼뚤했지만, 그럭저럭 모양을 갖춘 데다 좋은 천을 써서 부드럽기까지 했다.

이내 사방화는 천천히 일어나 진강의 목을 감싸고 입을 맞췄다.

“우리 낭군님은 어찌 이리 못하시는 게 없을까요. 당신과 혼인할 수 있었던 건 내 평생의 엄청난 복이에요.”

진강은 세상을 다 가진 듯 사랑스럽게 웃으며 사방화를 꼭 껴안았다.

“그 말 참 듣기 좋군! 그래, 서방이란 사람이 이리 대단하단 걸 알았으니 우리 소왕비께서도 이제 앞으로 제 말씀을 잘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사방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강은 잠시 어여쁜 사방화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폭, 한숨을 내쉬었다.

“또 며칠간은 당신을 어찌하지도 못하겠네…….”

그 말에 사방화가 피식 웃으며 그를 밀쳤다.

“어서 나가세요!”

진강은 다시금 사방화를 꼭 끌어안고 아주 진한 입맞춤을 하고 사라졌다.

사방화는 천을 갈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얼룩진 옷과 이불을 안고 방을 나섰다. 그러자 문 앞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던 진강이 얼른 받아들고 연못으로 향했다.

진강은 그렇게 한 치 망설임도 없이 피묻은 옷과 이불을 빨기 시작했다.

저토록 고귀한 신분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지만, 진강은 이상하리만큼 그 어떤 행동도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전생에 못다 이룬 사랑에 한을 품고 떠났던 사방화는 다음 생엔 진강과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길 바랐다.

지금 이 순간이 꼭 그때의 한을 어루만지는 위로처럼 느껴졌다.

그때, 별안간 물총새 한 마리가 날아와 하늘을 빙빙 돌더니 정원으로 들어와 사방화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짹짹 우는 새를 보고, 사방화는 일순 어리둥절해졌다.

그 순간, 연못가에 있던 진강도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았다가 물총새를 보자마자 안색이 굳어졌다.

그러다 사방화는 물총새 다리에 서신이 묶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황릉, 열흘. 어서 돌아올 것.」

이 익숙한 필체의 주인공은 바로 진옥이었다.

사방화는 말없이 서신을 보다가 진강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폐하의 서신이에요. 당신과 약조한 열흘이 됐으니 어서 돌아 오시라네요.”

진강은 콧방귀를 뀌었다.

“본인이 일방적으로 열흘이라 말했소. 난 동의한 적 없소.”

사방화가 웃으며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 말했다.

“진강, 우리 이제 돌아가요. 여기서 사는 것도 좋긴 하지만, 이렇게 계속 평범한 일상을 사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왜? 여기가 싫은 것이오?”

사방화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좋아요. 아주 많이요. 하지만 보통은 시끌벅적한 도심에 살든, 깊은 산골에 살든 자유롭게 오갈 수 있잖아요. 우린 여기 갇혀 사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며칠이라도 조용하고 평온한 나날을 보냈던 걸로 충분해요.”

“난 아직 충분히 만끽하지 못했소.”

사방화는 진강의 허리를 더 꼭 껴안고 말했다.

“진강. 사씨든, 진씨든 우린 각자의 신념과 미룰 수 없는 책임을 지고 있어요. 이대로 무시하며 살아간다면 몸은 편하겠지만, 마음이 힘겨워 어떻게 살아가겠어요? 매일 나더러 마음이 약하다고 하지만, 당신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마음 약한 분이란 거 잘 알고 있어요.”

“…….”

진강은 아무 말이 없었다. 

“선황폐하께서 임종 전 제게 말씀해주셨어요. 밀령을 내려 우리 아버지께 돌아오라고 하셨지만, 아버지께선 남진 강산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하셨고 어머니께서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주신 것이라고요.

매족의 천명이 있지만 그 길은 오로지 우리 부모님들의 선택이었어요. 그 끝이 죽음일지라도, 조부님의 머리칼을 온통 백발로 만들지라도, 아직 어린 저와 오라버니를 두고 떠나야할 지라도…….

이 남진을 위해 그간 얼마나 많은 사씨가 피를 흘리고, 얼마나 많은 진씨 황조들께서 부지런히 지켜내셨을까요. 진강, 우리는 결코 우리들 성씨와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에요.”

진강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사방화의 눈시울은 점점 붉게 젖어들었다.

“새로운 삶을 사는 것도 좋지만, 정말 남진이 한 걸음씩 쇠락해가는 걸 보고 있을 수 있으시겠어요? 저도 비록 수없이 이 남진 황실을 무너뜨리고 싶어 했었지만, 이 강산을 지키려 노력했을 사씨 조상님들과 진씨 황조들의 희생과 헌신을 생각하니 사적인 원한은 다 내려두고 대의를 생각하게 됐어요.

얼마 살 수 없다고 해도 남은 시간이나마 단 한 가지라도 지킬 수 있다면 충분히 기쁘지 않을까요? 두 가지 다 지켜낼 수 있다면 한평생을 감사해도 다 갚지 못할 하늘의 은총을 받는 거고요.

남진의 백성들과 남진이 300년간 이어온 역사가 있고,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땅이에요. 정말 남진이 이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있으시겠어요?

어느 날 남진이 멸망하고, 우리 가족들, 형제자매, 우리 집, 충용후부, 영친왕부, 우리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제왕과 백성까지 모두가 다 사라진 황무지가 된다면 그 얼마나 서글플까요?”

진강이 결국 한숨을 내쉬며 사방화의 머리를 껴안았다.

“당신 참…….”

진강은 그녀의 검은 머리칼을 매만지며 따뜻한 눈빛으로 말했다.

“두터운 심덕과 인덕을 가진 자만이 최고가 될 수 있다 했거늘, 당신은 충분히 제왕의 자리에도 오를만한 분이오. 천자께서도 덕이 있으시다면 이 세상을 온전히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복음을 주셔야지.”

사방화가 다시 한 번 진강의 허리를 꼭 껴안았고, 진강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이야기했다.

“당신 심혈이 닳는 걸 가장 조심해야 하니 내가 방법을 찾기 전까진…….”

“여기 있다고 해서 마음이 편하진 않아요. 이미 뼛속까지 스며든 일은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가 없어요.”

사방화가 중간에 말을 끊자, 진강도 바로 입을 다물었다.

“진강, 반드시 이 매족의 규율을 깨트릴 방법을 찾을게요. 저도 죽기 싫어요. 당신이 죽는 건 더 싫고요. 이제 당신과 제 목숨은 하나잖아요.

저도 당신과 저를 닮은 아이를 낳아 우리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어요. 아직 당신과 못 해본 게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죽을 순 없어요. 당신이 나이 들어가는 모습도 보고, 정말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요.

매족에 대해선 아직 잘 몰라요. 은산 종사가 기를 쓰며 제 손에 있는 매족의 비술을 뺏으려 하고 남진 강산을 배신하게 된 걸 보면 북제가 남진 은산 은위들과 연관이 되어있는지도 몰라요.

아직 해결하지 못한 많은 일까지 모두 밝혀내야 해요. 그리고……, 운란 오라버니가 매술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계시니……, 계속 여기 있으면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진강이 긴 한숨을 내쉬며 사방화를 껴안았다.

“그리 일찍 돌아갈 생각은 없었는데 이젠……. 당신 뜻에 따르겠소.”

“오늘 돌아갈까요?”

“뭐 하러 진옥 말을 듣소? 몸도 약하고 그날까지 겹쳤으니 끝나면 갑시다.”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강은 그녀를 놓고 계속 옷을 빨았다.

“이제 방에 들어가서 쉬고 계시오.”

사방화는 다시 손짓해 물총새를 불러들였다.

“폐하께 답장할까요?”

“됐소.”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얘도 참 영리하네요. 그럼 돌려보내 줄게요.”

사방화가 새의 깃털을 만지며 말했다. 

“돌려보낼 필요 뭐 있소? 끓여 먹어버리지.”

새는 진강의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깜짝 놀라 날개를 퍼덕이며 사방화의 손을 벗어나 먼 산을 향해 날아가 버렸다.

사방화는 조용히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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