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7화 오랜 세월 계획을 짜다 (2)
이곳은 산 전체에 둘러싸인 가장 높은 곳으로 남진 경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겹겹이 쌓인 건물들과 저 멀리 보이는 시야에도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했다.
사방화는 문득 청암을 보고 물었다.
“청암, 몇 살 때부터 진강의 곁에 있었던 거야?”
청암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억을 할 수 있을 때쯤부터 주인님 곁에 있었습니다.”
“그럼 부모님과 형제자매도 없었다는 거야?”
청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강이 뭘 제일 좋아하는지 알아?”
“주인님께선 소왕비마마를 가장 좋아하십니다.”
사방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거 말고, 취미 말이야.”
청암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방화의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이 흘렀다.
“거봐, 그렇게 어릴 적부터 진강의 곁에 있었으면서 뭘 좋아하는지조차 모르다니, 진강은 도대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다는 걸까……. 너 외에 평생 가깝게 지낸 우리 오라버니도, 연석 소후작, 목청 공자에게 물어도 아마 다 모른다고 할 거야. 말을 타고, 활을 쏘고, 사냥, 놀이 등등 못하는 게 없긴 하지만……. 그게 취미라고 보이진 않아.”
청암도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의 진정한 신념은 정말 나와 이 남진 강산뿐이야. 그 사람을 낳아주고, 키워주고,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을 엄청난 신분과 부귀영화를 주고, 황조모님, 황조부님, 어머님, 아버님, 형제를 비롯해 모든 걸 준 이 땅을 포기한다면 저 사람은 아마 절대 행복하지 못할 거야.”
순간적으로 긴장하기 시작한 청암을 보고 사방화가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냥 말하는 거니까 긴장하지 마. 어릴 적부터 진강의 곁에 있었으니 넌 그 사람이 내게 절대 알려주지 않는 것들까지 다 알고 있잖아.”
청암은 그제야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소왕비마마께서 더 이상 주인님을 두고 떠나지만 않으신다면, 소인도 숨기지 않고 모두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전부 내 착각이었어. 걱정 마. 더 이상 절대 저 사람을 두고 떠나는 일은 없어. 포기하라고 해도 이젠 죽어도 포기하지 않을 거야. 폐하의 동심술까지 내게로 가져왔으니 이제 우린 한마음 한뜻으로 생사를 같이할 거야. 그간 진강이 뭘 하며 살아왔는지 그것만 얘기해줘. 내가 무명산에 있는 동안 뭘 했는지 말이야.”
청암은 잠시 존경의 눈빛으로 사방화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주인님은 겉으론 모든 면에서 폐하와 맞서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계속해서 황실과 사씨의 관계를 따져보고 계셨습니다. 게다가 설성을 되찾아 영남에 암암리에 10만 병마를 두셨지요.”
“영남에 있다던 그 병마가 그 사람 거였구나.”
청암이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남에 있던 병마가 전부 주인님 것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 영남에다 병마를 둔 걸 아시곤 주인님께서 제게 조사하라 하셨다가, 도중에 다시 불러들이셨습니다.”
사방화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영남엔 유겸왕숙의 사병 5만과 내가 배치해둔 5만 병마가 더 있어.”
“아, 소왕비마마의 것이었군요.”
“응, 언신에게 무명산을 빠져나가면 비상시에 쓸 수 있도록 영남에다 병마 5만 명을 배치해두라고 시켰었다.”
“사씨를 위해서겠지요.”
“응, 사씨를 위해서. 사씨가 이제 이 남진 땅에 얼마나 살았었는지는 사씨의 족보조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야. 진씨 황실을 참 미워했었는데 황실도 제 뜻대로 되지 않고 있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네.”
청암이 입술을 깨물었다.
사방화는 다시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난 사씨를 위해, 진강은 진씨를 위해 이렇게 긴 세월 동안 짜온 계획을 도중에 그만둘 수 있겠어? 어쨌든 이 강산은 지키고 봐야지! 그전에 죽는다면 한으로 남을 거야.”
“그래도 주인님 마음속엔 소왕비마마가 제일 중요하십니다.”
사방화가 웃으며 말했다.
“맞아, 나도 알고 있어. 진강이 곧 일어날 테니 우리도 어서 내려가자.”
청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두 사람이 산에서 내려와 뜰에 다다르니, 예상대로 진강은 잠에서 깨 의자에 기대 멍하게 풀을 씹고 있었다.
이내 진강이 사방화와 청암이 돌아온 것을 보고 서둘러 풀을 뱉고는 두 사람이 든 바구니에 눈길을 고정했다.
“소왕비마마께서 모든 일을 제대로 익혀 작은 공자님을 잘 돌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청암이 바구니에 든 버섯을 하나 꺼내 말했다.
“작은 공자? 그게 누군데?”
진강의 물음에, 청암이 사방화를 살짝 한번 돌아보고 대답했다.
“주인님과 소왕비마마의 아이이지요.”
그러자 진강은 담장 위 풀을 하나 뽑아 청암에게 살짝 튕겨 보냈다.
“꼭 사내아이란 법은 없잖느냐. 여자아이면 어쩌려고?”
청암은 순간 멍해졌다.
“네 그런 모습을 보니 더더욱 믿음이 가질 않는데.”
“주인님께서 바쁘실 때 제가 도움을 드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진강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그래, 어서 가서 밥이나 좀 지어라. 또 소금과 설탕을 구분 못해선 안 된다.”
청암은 서둘러 바구니를 내려두곤 부엌으로 향했다.
청암이 떠나자, 사방화가 진강의 앞으로 가까이 갔다.
“어찌 그리 사람을 못 괴롭혀서 안달이세요? 반나절이나 주무셔놓곤 버섯 따느라 고생하고 온 사람한테 밥까지 짓게 하시는 거예요?”
“소왕비마마, 소인 괜찮습니다!”
부엌에서 바로 청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강은 곧 사방화의 어깨를 살포시 감싸왔다.
“당신이 없어서 편히 자지 못했소.”
사방화가 웃으며 그를 흘겨봤다.
“나물 다듬는 거나 도와주세요.”
진강도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뜰 한 가운데에 탁자와 의자를 두고 두 사람은 함께 나물을 다듬기 시작했다.
진강이 나물 하나를 집어 들고 물었다.
“이건 무슨 나물이지?”
“고채(*苦菜: 씀바귀)예요.”
“쓰나?”
“어떨 것 같아요?”
진강은 즉각 나물을 내려놓았다.
“쓴 건 먹고 싶지 않소.”
그러자 사방화가 다시 고채(苦菜)를 그의 바구니에다 넣으며 말했다.
“열을 내려야 하니 반드시 드셔야 해요!”
진강이 고채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열도 내리고 싶지 않은데.”
사방화는 웃음을 터뜨리곤 계속해서 나물을 다듬기 시작했다.
진강도 눈썹을 살짝 까딱인 후, 그녀를 따라 나물을 다듬었다.
한편, 부엌에서 달그락 소리를 내며 밥 짓는 청암의 모습은 꽤 그럴싸해 보였다.
사방화는 그런 청암을 한번 바라보다 다시 걱정스럽게 진강을 바라봤다.
“……청암이 만든 걸 먹을 수 있겠어요?”
“응.”
사방화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저랑 똑같이 설탕과 소금을 구별 못하는 사람이에요.”
진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똑바로 가르쳐 놓았으니 괜찮소. 그리고 우리 아기한테도 단 걸 짜게 먹이고, 짠 걸 달달하게 먹이고 싶지 않으면 당신도 이젠 고쳐야 하오.”
사방화는 물끄러미 진강을 바라보다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첫날밤엔 회임이 안 되게끔 하려고 약을 드시더니, 이젠 생각이 좀 바뀌셨나 봐요?”
진강은 살짝 일어나 사방화에게 입을 맞췄다.
“죽더라도 우리 핏줄을 남겨놓고 죽어야 하지 않겠소?”
사방화가 바로 그를 밀쳐냈다.
“정말 죽고 싶으신가 보네요.”
“싫소. 그러니 반드시 우리가 살 방법을 생각해내야 하오.”
사방화는 돌연 진지해진 진강을 보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잠시 후 사방화는 잘 다듬어진 나물을, 진강은 버섯을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에선 아주 먹음직스러운 음식 냄새가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청암도 기분이 좋았는지 한상 가득 채울 요리를 만들었고 뜰 한가운데에 상을 차렸다.
“같이 먹자.”
진강의 말에, 청암은 사방화의 눈치를 한번 살피곤 자리에 앉았다.
사방화는 요리를 한입 먹어본 후 웃으며 말했다.
“정말이네요. 간이 다 알맞게 뱄어요.”
“당신도 이젠 실수할 일 없을 것이오. 정말 아기를 하나 가져야겠소.”
사방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몸 관리만 잘하면 언제든 회임할 수 있어요.”
그러다 사방화가 문득 청암을 보고 물었다.
“청암, 혹시 마음에 드는 여인은 없어? 있다면 혼인해야지.”
탁-!
마침 반찬을 집어 들려던 청암이 젓가락을 떨어트렸다.
청암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사방화를 바라보자 진강이 웃으며 이야기했다.
“주위에서 찾으면 더 좋지. 난 시화가 괜찮던데.”
청암이 얼굴을 붉히며 연신 고개를 내저었다.
“소인은 혼인할 생각이 없습니다.”
“내 생각은 다르니 넌 입 다물고 밥이나 먹어라.”
진강의 말에, 청암은 순간 멍해졌고 사방화는 진강을 흘기며 나무랐다.
“입을 다물고 어떻게 밥을 먹으란 말이에요? 그나저나 시화가 참 괜찮긴 하죠. 오라버니가 제게 보내준 여덟 아이들 중에 저도 시화를 제일 좋아해요. 모든 일에 신중하고 야무진 데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를 잘 아는 똑 부러진 아이죠. 근데 그날 절 황궁에서 데리고 나오실 때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됐어요? 아직 황궁에 있는 건가?”
진강은 일순 사방화가 이제껏 황궁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떠올라, 금세 시무룩하게 풀이 죽었다.
“영친왕부로 갔으니 걱정 마시오.”
영친왕부란 말에, 사방화는 순간 영친왕비가 떠올랐다.
어쩔 줄 몰라 미간을 문지르는 사방화를 보고, 진강이 그녀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괜찮소. 어머니께서도 뭐라 하지 않으실 것이오.”
사방화는 폭,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다 제 잘못이잖아요.”
“당신 잘못이란 것을 아는 걸로 충분해. 다음부턴 그러지 않으면 되오.”
사방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어제 폐하를 만나셨다면서요. 당신을 그리 쉽게 놓아주진 않았을 텐데 뭐라고 하셨어요?”
“상대해서 뭘 하겠소.”
사방화가 미소를 지었다.
“남진은 지금 한창 사람을 쓸 시기예요. 선황폐하께서 엄청난 숙제를 남기고 가셨는데, 우리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순 없잖아요.”
진강이 굳어진 얼굴로 사방화의 볼을 콕, 찔렀다.
“그 자식 신경 좀 쓰지 말라니까 어찌 이리 말을 안 듣는 것이오?”
사방화는 눈에 선명히 들어오는 진강의 상처를 보고, 진강도 오죽 답답하겠댜는 생각이 들어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밥 드시오!”
진강이 씀바귀 한 움큼을 집어 사방화의 밥그릇에다 놓아주었다.
그러자 사방화는 그 씀바귀를 고스란히 진강의 입속으로 먹여주었고, 진강은 표정을 한껏 구기면서도 또 얌전히 받아 꼭꼭 씹어 먹었다.
* * *
식사 후, 날이 어두워지자 진강은 사방화를 안고 지붕 위로 날아갔다.
“어제 당신과 별을 보려고 올라왔었는데 당신이 그만 잠들어버렸소. 오늘은 안 잘 거지?”
“별이 뭐 볼 게 있다고요.”
사방화가 대수롭지 않게 답하자, 진강이 팔꿈치로 그녀의 팔을 툭 밀었다.
“하여간 감성이랑은 거리가 참 먼 여인이라니까.”
사방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밤바람에 모기한테 뜯기는 게 무슨 감성이란 말이에요.”
진강이 하늘을 보고 잠시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별구경이라 하면 어떻소?”
사방화가 눈을 깜빡이며 옆을 돌아보자, 진강도 그녀와 눈을 맞추며 입맞춤을 했다.
“요즘 별들이 움직이는 걸 보니 백년 만에 볼 수 있는 장관이 펼쳐질 듯하오. 여기가 별 보기엔 가장 좋은 자리라오.”
사방화도 바로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아직 시간이 이른 탓인지 별은 조금밖에 보이지 않았다.
“알겠어요. 같이 별구경 해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