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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6화 (786/978)

786화 오랜 세월 계획을 짜다 (1) 

진강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진옥을 보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달빛과 안개가 짙게 낀 밤, 그 아래 고요한 황릉. 이곳은 역대 남진 강산을 지킨 제왕들의 진정한 안식처였다.

하지만 이곳도 후손들이 지켜내지 못하면 황폐해지고 말 터였다. 더더군다나 적통 황손인 진강의 책임감은 더 무거웠다.

다행히 저 멀리 사라져가는 진옥은 어려서부터 선황제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은 훌륭한 적통 후계자였다. 아무리 부정해도 진옥은 이미 뼛속 깊은 곳에 제왕의 의무를 새긴 진정한 남진의 황제였다.

진강은 그가 연심 없이도 남진 강산을 수호할 황제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남진은 결코 전생과 같이 사씨를 따라 무너지는 뼈아픈 운명을 반복해선 안 됐다.

진강은 그 후로도 한참을 제자리에 머물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손 안의 지궁령을 내려다봤다.

그가 곧 지궁 호위를 향해 시선을 옮기자, 호위가 바로 무릎을 꿇었다.

“지궁 은위는 지궁령 주인께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합니다!”

진강이 웃으며 말했다.

“과연 황조부님께서 뽑으신 사람답구나. 일어나라!”

호위가 일어나자 진강이 목덜미를 만지며 물었다.

“좋은 금창약이 있느냐?”

호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목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가장 좋은 금창약이라도 사흘은 있어야 딱지가 앉을 겁니다.”

“평생 내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리지 못한 진옥이 이제는 조금 화가 풀렸겠구나. 사흘은 기다리지 못하니 어서 금창약을 가져오너라.”

지궁 호위는 즉시 약을 가지러 향했다.

* * *

오시(*午時: 아침 11시 ~ 오후 1시)가 되기 전, 사방화가 잠에서 깼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진강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곤, 옆자리를 쓸어보았지만 이미 온기도 없이 차갑게 식어 누웠던 흔적도 다 사라진 뒤였다.

사방화는 머리를 주무르며 천천히 일어나 옷을 걸쳐 입고 방을 나섰다. 

정원은 텅텅 빈 데다 부엌에서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곧 그녀가 문에 기대앉아 산을 바라보고 있을 무렵, 청암이 소리 없이 나타나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소왕비마마, 소왕야께선 어젯밤 황릉으로 향하시어 오늘 오시(午時) 전에 돌아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방화는 청암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암은 딱히 놀라지도 않는 사방화의 담담한 얼굴을 보곤 덜컥 걱정이 되어 잠시 머뭇거리며 설명을 덧붙였다.

“선황폐하께 향을 올려드릴 겸, 지궁령을 가져다 두러 가셨을 겁니다.”

사방화가 매우 긴장한 청암의 눈빛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응, 그래. 기다리면 돼.”

청암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예, 식사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사방화는 매우 어리둥절한 얼굴로 청암을 바라보았다.

“응? 밥할 줄 알아?”

청암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할 수 있을 겁니다.”

“할 수 있을 거라고?”

청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주인님께서 하시는 걸 지켜보며 어느 정도 배웠습니다.”

사방화는 그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괜찮아. 그냥 내가 할게. 가봐.”

“그래도…….”

청암은 아무래도 사방화의 몸 상태가 걱정된다는 듯 계속 주저했다.

사방화는 청암을 올려다보다 다시 웃음이 터졌다. 어릴 때부터 진강의 곁에 있었으니 이 암위는 그간 얼마나 시달렸을까? 진강을 지키는 것도 모자라 요리까지 따라 배워야 했다니. 사방화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밥도 못할 정도면 아무것도 할 필요 없지.”

청암도 사방화가 정말 괜찮은 듯하자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사방화는 홀로 부엌으로 향하다 문득 청암을 돌아보았다.

“청암, 지금 너 혼자야?”

청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주인님께서 소왕비마마를 돌보라 하셨습니다.”

“그럼 불도 피워주고, 그 김에 어느 것이 소금과 설탕인지도 확인해다오.”

청암이 대답과 함께 사방화와 나란히 부엌으로 향했다.

* * *

부엌엔 그릇을 비롯한 쌀, 밀가루, 기름, 소금, 채소, 과일, 고기와 약재까지 부족한 것도 없이 고루 다 갖춰져 있었다. 다 하나같이 몇 달을 머물러도 충분할 것 같은 양이었다.

과연 진강이 이곳을 나갈 생각이 없어보였던 데에도 다 이유가 있었다.

이내 사방화는 손을 씻은 뒤 재료를 준비했고, 청암은 불을 피운 후에 소금과 설탕이 무엇인지 확인해주었다.

“이게 소금이야?”

사방화가 무언가를 집어 들고 청암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청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해?”

청암은 다시 한 번 더 살펴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확실합니다.”

사방화도 소금이란 확신을 갖고 그대로 요리에 넣었다.

그렇게 둘이 힘을 합쳐 한 네 가지 요리를 완성했을 때, 진강이 돌아왔다.

진강이 부엌으로 들어오는데 사방화는 그의 목에 난 핏자국을 한눈에 알아봤다. 옷으로 가린다한들 사방화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어디서 다치신 거예요?”

“괜찮소.”

진강은 대충 손을 저은 뒤, 젓가락을 들고 맛을 보았다.

곧바로 진강의 인상이 구겨졌다.

“방화, 어찌 아직도 소금과 설탕을 구분할 줄 모르는 것이오?”

사방화는 곧장 청암을 돌아보았고, 청암은 진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진강은 순간 웃음이 터져 손으로 청암을 가리키며 물었다.

“설마 청암에게 부탁한 것이었소? 저놈도 검을 쓸 줄만 알지, 소금과 설탕은 구분할 줄 모르오.”

사방화는 청암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소금과 설탕을 구분하지 못하던 사방화도 드디어 동지를 찾은 셈인가.

사방화는 어렵사리 만든 요리들을 보며 그래도 버릴 순 없다고 생각했다. 

진강은 젓가락을 던져두곤 금세 요리 두 가지를 뚝딱 만들어냈다.

그런 뒤 진강이 청암을 보며 사방화가 만든 요리들을 가리켰다.

“청암, 저건 네가 다 먹어라.”

청암은 바로 얼굴을 구겼다.

그 모습에 사방화는 웃으며 진강과 함께 부엌을 빠져나왔다.

* * *

진강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요리를 내려두고 사방화에게 입을 맞췄다.

사방화는 깜짝 놀라서 진강을 툭툭 때리다 이내 그의 상처가 생각나 밀쳐냈다. 뒤로 밀려난 진강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사방화를 내려다보았다.

“어쩌다 다치신 거예요?”

사방화가 진강의 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황릉에 갔다가 진옥을 만났소.”

진강의 답에, 사방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싸우신 거예요?”

진강은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내가 그 자식과 왜 싸우겠소.”

“그럼 이건…….”

“검으로 날 죽이려 해서 그냥 내버려뒀는데 끝내 죽이진 못하더군. 그냥 조금 까진 것뿐이니 괜찮소. 사흘이면 가라앉을 것이오.”

사방화도 금창약을 발라둔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 천천히 앉으며 물었다.

“제가 잠들고 나서 가신 거죠? 그때쯤 황릉에 도착했으면 이미 자정도 넘었을 시각인데 폐하께서 어찌 그곳에 계셨다는 거예요?”

“황릉에 있는 자가 내가 왔단 걸 알려줬겠지. 아, 배고프다!”

진강이 젓가락을 들자, 사방화도 밤새 피곤했을 진강을 생각하니 더 이상 귀찮게 할 수가 없었다.

식사 후, 진강은 의자에 늘어지게 기대 햇살 아래서 잠이 들었다. 

“침상에 가서 주무세요.”

사방화가 진강을 살짝 흔들어 깨웠다.

그러자 진강은 의자에 앉은 그대로 아이처럼 사방화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같이 잡시다.”

사방화는 진강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다 그의 어깨를 톡 쳤다.

“혼자 주무세요. 전 여기서 더 자면 침상과 하나가 될 것 같아요.”

진강이 웃으며 말했다.

“그것만큼 좋은 게 없지.”

사방화가 계속 진강을 밀자, 진강이 고개를 쏙 들고 그녀를 올려다봤다.

“당신을 안고 싶으면 어떡하오?”

사방화는 순간 빨개진 얼굴로 그의 팔을 비틀었다.

“이래도요?”

“나쁜 여인!”

“어서 주무세요.”

그래도 진강은 사방화를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잘 동안 당신은 뭘 할 것이오?”

“이 방에만 박혀있을 순 없겠지요.”

“그 틈을 타 도망가려는 건 아니지?”

“지금 와서 어딜 도망갈 수 있겠어요? 저도 풀지 못하는 진법까지 쳐두고.”

진강이 뾰로통하게 입술을 톡 내밀었다.

“이 정도 진법을 당신이 풀지 못한다고? 못 믿겠는데.”

사방화가 울창한 숲을 바라보며 말했다.

“언신이 한 달 내로는 무공도 써선 안 되고, 반년 내로는 매술도 쓰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어요. 적어도 매술을 써야 풀 수 있으니 불가능해요.”

진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그녀의 뺨에 살짝 입을 맞췄다.

“이리 말을 잘 들으니 얼마나 좋아. 나도 당신을 여기다 가두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소.”

그리고 진강이 옷소매에서 천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이 산의 지형도. 거기 진안도 표시돼있으니 나가고 싶으면 나가도 되오.”

사방화가 물끄러미 진강을 올려다보았다.

“이젠 제가 도망갈까 걱정되지 않으시나 보네요?”

“내가 여기 있는데 당신이 어딜 갈 수 있겠소. 반나절 정도만 잘 테니 나가 놀고 싶으면 해가 지기 전엔 돌아와야 하오. 알겠지?”

진강이 나른히 하품을 하며 침상으로 향했다.

사방화는 침상에 누워 눈을 감은 진강을 보고 웃음을 짓다가, 지형도를 펼쳐보았다. 지형도가 있으니 과연 이 숲속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경성에서 무려 100리나 떨어진 곳에 이런 지형의 산에다 진법까지 쳐놓았으니 당연히 아무도 찾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진강은 이렇듯 장소 하나도 기가 막히게 찾아냈다.

특히나 이 산세는 벽천 절벽과 이어지지만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절벽에 가려지는 곳이고, 빽빽이 우거진 산림까지 더해져 숨기엔 더없이 좋았다.

* * *

잠시 후, 방을 나온 사방화가 청암을 불렀다.

“청암.”

청암이 얼굴을 가득 구기며 나타났다.

“소왕비마마!”

“이 산에 먹을 만한 버섯이나 산나물이 좀 있을까?”

“있지 않을까요.”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청암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소인이 가서 찾아보고 올까요?”

“음, 버섯이랑 산나물이 어떻게 생긴 지는 알지?”

사방화는 이미 청암을 향한 믿음이 다 사라진 눈치였다.

“압니다.”

“그럼 같이 가자.”

청암은 잠시 뒤돌아 진강이 잠든 것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화는 부엌에서 바구니 두 개를 가지고 나와 청암과 하나씩 나눠가졌다.

* * *

사방화, 청암은 산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해 잠시 후 뒷산의 숲에 다다랐다.

사방화는 바로 어느 나무 한 그루 앞에 쪼그려 앉아 버섯 하나를 땄다.

“이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사방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맞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청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사방화가 버섯을 바구니에 넣으며 말했다.

“못 먹는 거면 네가 먹어야 해.”

청암은 몸서리를 치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냥 버리는 게 낫겠습니다. 버섯이 아니면 어떡합니까!”

사방화가 어이없다는 듯 청암을 돌아봤다.

“아까는 맞다고 자신하지 않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청암을 보고, 사방화는 다시 웃음을 터뜨리다가 바구니에 넣었던 버섯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본래 의술을 익힌 자들은 수천 가지 약초들을 다 알아볼 수 있다. 이 산에 있는 그 어떤 걸 내게 보여줘도 다 알 수 있어. 소금과 설탕을 구분하지 못하는 건 좀 특수한 경우긴 하지. 난 나물을 딸 테니 넌 그걸 보면서 버섯을 따. 잘못 딴 건 다 너한테 줄 거니까 똑바로 해야 해.”

청암은 한참 사방화를 말없이 내려다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문득 사방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진강과 나 사이에 아기가 생겨도 너한텐 못 맡기겠어. 우리 아기까지 너처럼 멍해지면 어떡해?”

그러자 청암이 곧바로 사방화를 바라보며 맹세를 했다.

“염려 마십시오, 소왕비마마! 반드시 소금과 설탕을 제대로 구분하고 할 줄 모르는 것들도 제대로 배워두겠습니다! 작은 공자님을 살뜰히 보살펴 어리벙벙하게 만드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사방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잘 배워두도록 해.”

청암은 다시 버섯을 쥐고 열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사방화도 웃으며 나물을 땄다.

그녀는 이렇게 진강과 함께 푸른 산에 맑은 물을 끼고 한가로이 노닐며 늙어가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중을 드는 사람도 청암 하나면 충분할 것이다. 아니지, 청암도 장가를 가야 하는데…….

두 사람은 뒷산을 끼고 천천히 산을 오르며 나물과 버섯을 땄다. 

뒷산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쯤엔 두 사람 모두 벌써 바구니 절반을 채웠다.

사방화는 이내 산꼭대기에 우뚝 솟은 바위 2개를 발견하고 말했다.

“여기서 잠시 쉬다 가자.”

청암은 고개를 끄덕인 후 바위 위에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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