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5화 열흘을 주겠다
진강은 곧 맑은 기분으로 힘없이 늘어진 사방화를 안아들고 지붕 위로 올라가 별을 구경했다.
밤바람은 가볍고, 밤하늘의 별빛도, 그 아래의 두 사람도 더없이 예뻤다.
그러나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사방화는 밤공기를 마시자마자 잠들어버렸고, 진강은 잠든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미소 짓다가 다시 지붕을 내려왔다.
사방화를 침상에 편안히 눕혀준 진강은 한참동안 잠든 그녀를 바라보다 창가로 다가가 조용히 외쳤다.
“청암.”
“예, 주인님!”
창가 너머로 청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릉에 다녀올 테니 소왕비마마를 잘 보호해드려라.”
“소왕비마마께서 주인님을 찾으시면…….”
“적어도 내일 오시(*午時: 아침 11시 ~ 오후 1시)까지는 잘 테니 그쯤엔 돌아올 것이다. 일찍 일어나 날 찾는다면 내일 오시(午時) 전까지 돌아올 테니 황릉에 갔다고 전해주고.”
청암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 * *
깊은 산속에서 황릉까진 100리나 떨어져 있어, 진강이 황릉에 도착했을 땐 이미 자정이 지난 시간이었다.
지궁 문을 지키는 호위는 진강을 보고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강 소왕야.”
“황숙께 향을 하나 올려드리러 왔다.”
호위는 곧장 지궁 문을 열어주었다.
선황제의 위패는 남진 황조들의 순서에 맞춰 나란히 안치돼있었다.
어두컴컴한 지궁엔 바람 한 점 쫓아 들어오지 않았고, 고요한 등불만이 선황제의 위패를 평화롭게 비추고 있었다.
진강은 더 가까이 다가가 위패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300년을 이어온 남진의 역대 제왕들, 선황제의 위패 뒤로는 다음 세대를 비롯한 다음의 다음, 더 먼 미래 세대를 위한 자리가 비어있었다. 이 선황제 옆에 이름이 오를 인물은 진옥이었다.
그러나 남진 강산이 진옥의 세대에서도 계속 이어질 것인지, 여기서 끝을 맺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진강은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 뒤쪽을 향해 말했다.
“향을 하나 가져오너라.”
진강은 곧장 향을 건네받아 향로에 꽂고는 한참 후 고개를 숙였다.
그는 꽤 오랜 시간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며 품에서 지궁령을 꺼내 선황제의 위패 앞에 올려두었다.
그에 호위가 깜짝 놀라 말했다.
“강 소왕야, 선황폐하께서 소왕야께 지궁령을 드리고 임종 전까지 회수하지 않으셨던 건 지궁령을 소왕야께 전승해 주신 것이옵니다.”
“황제폐하께 넘겨드려라.”
진강은 호위를 보며 담담히 답한 후, 그대로 지궁을 빠져나왔다.
* * *
지궁 밖 달빛 아래엔 뜻밖의 누군가가 서 있었다.
검은 비단 옷을 입고, 달빛 보다 찬란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는 수려한 사내는 바로 남진의 새 황제 진옥이었다.
한참 지궁을 나오던 진강은 그를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진옥은 잠시 냉랭한 눈빛으로 진강을 바라보다 비웃음을 흘렸다.
“황릉에 와 아바마마께 향을 올릴 생각을 하다니, 진씨 자손인 건 잊지 않았나 보군? 남진 강산이 재가 돼도 상관이 없다기에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잊은 줄 알았는데.”
진강은 담담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옥도 말없이 진강을 노려보았고, 맑게 갠 하늘과 평화로운 달빛이 노닐던 지궁은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어두운 기운으로 물들어버렸다.
두 사내가 내뿜는 신경전은 심해 깊은 곳처럼 어두워 끝이 보이질 않았다.
지궁 호위는 그런 둘을 보고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진옥에게 다가가 공손히 지궁령을 바쳤다.
“폐하, 강 소왕야께서 돌려주신 지궁령입니다.”
지궁령은 달빛 아래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진옥은 바로 진강에게 차가운 웃음을 보였다.
“아바마마께서 네 녀석에게 준 지궁령을 내게 버리는 것이냐?”
“지궁령은 본래 역대 황제폐하들께서 갖고 계시던 것이다. 편찮으셨던 황숙께서 돌려받는 것을 잠시 깜빡하신 것이지.”
진옥은 호위 손에 있던 지궁령을 받아 진강을 향해 거세게 날렸다.
지궁령은 진옥의 힘을 받고 맹렬한 기세로 날아왔고, 진강이 이를 피한다면 현철로 만든 지궁문에 산산조각이 날 게 뻔했다. 그에 진강도 할 수 없이 지궁령을 받은 후 미간을 찌푸리며 진옥을 바라보았다.
진옥은 다시 분노하며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께선 임종하시기 전까지도 정신이 멀쩡하셨다! 할바마마께서 임종 전에 남기신 유언을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하지 마라. 네가 남진 강산을 원치 않는다고 해서 내가 네 자식에게 감사할 것 같으냐? 아바마마께서야말로 이 남진 강산을 가장 귀히 여기셨다!”
진강은 입술을 깨물었다.
“황위는 네가 물려받았으니 이 강산은 이제 네 것이다.”
“방화를 내 황후로 맞을 수 있으니 황위를 물려받은 거였다! 방화가 없다면 황위는 그저 종잇장보다 못한 것인데 날더러 뭘 어찌하란 말이냐!”
진강은 계속해서 진옥을 향해 담담히 이야기했다.
“이번 생엔 네 황후가 될 수 없으니 단념해라.”
“단념? 어찌하면 단념할 수 있는지 좀 가르쳐 주겠느냐?”
“어릴 적부터 넌 황숙께 사씨 가문을 제거하란 가르침을 받아 충용후부 아가씨를 자연스레 지켜보게 된 것뿐이다. 결국 넌 사씨를 모략하며 방화까지 함께 궁지로 몰아넣었지. 진옥, 이제 그때의 초심은 다 잊어버린 것이냐?”
진옥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마음 깊이 자리 잡은 여인이다. 이제와 어찌 포기하란 말이더냐?”
진강이 담담히 말했다.
“너와 내 계획은 단 한 번도 같은 길을 걸었던 적이 없었다. 난 초지일관 방화 하나만 원했다. 남진 황궁이 무너져도, 영친왕부가 내려앉아도, 남진 황조가 역사 속으로 파묻힌다 해도, 내가 더 이상 진씨가 아니라 할지라도, 내 뼈와 심장을 도려내더라도 방화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 너는 어떠하냐?”
진옥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말은 참 잘하는구나. 그럼 할바마마와 할마마마께서 네 자식에게 맡기셨던 책임까지 모두 다 버릴 수 있단 말이더냐?”
“그래!”
진강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궁령을 돌려주곤 방화를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갔으니 이제 영원히 경성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이냐?”
“아마도.”
진옥은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하고 진강의 멱살을 잡았다.
“아마도란 없다! 네 자식은 한평생 네 뜻대로만 살아왔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 본 적은 있느냐? 방화가 정말 원하느냔 말이다!
사씨는 남진의 수천, 수백 년을 거쳐 온 뿌리나 다름없다. 남진이 있기에 사씨가 있는 것이지. 방화가 남진과 함께 사씨가 역사 속으로 묻히길 원할 거라 생각하느냐?
남들 눈을 피해 산다 한들 네가 정녕 남진 황실이 무너지는 걸 견딜 수 있을 것 같으냐? 집을 나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겠다고? 남진 황조와 사씨 조상들 무덤이 짓밟히는 걸 보고도 너희가 평온히 살 수 있을 것 같아!”
진강은 조용히 진옥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땐 이미 이승을 떠나 볼 수 없을 수도 있지. 차라리 안보는 게 낫겠군.”
“안 보는 게 낫겠다고? 웃기시네!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낫겠지.”
진옥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진강의 목을 겨눴다.
보검은 날카롭게 시퍼런 빛을 번쩍였고, 그에 비친 진옥의 얼굴에선 형형한 살기가 흘렀다.
진강은 그런 진옥을 바라보다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진옥, 방화가 없어도 넌 이 남진 강산의 위대한 제왕임을 기억해라. 넌 선황폐하들 못지않게 아주 훌륭한 제왕이 될 수 있을 거다.
황조모님께서 임종 전 내게 물어보셨지. 남진 강산, 제왕의 위용과 명성, 만세가 우러러보는 엄청난 이름, 꿈에서도 쉬이 그리지 못할 그 자리를 정녕 원치 않느냐고.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보라 하시더군.
난 그 자리를 원하면 방화를 만날 수 없는데 그게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씀드렸다. 방화 없이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인생이라고. 황위보다 더 값진 자리를, 온 세상을 가져다준다고 해도 내게는 다 소용이 없다. 방화가 이미 내 세상이니까.”
진옥의 날카로운 검은 한없이 진강의 목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진강은 결코 피하지도 않았고, 끝내 그의 하얀 목에선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진강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황조모님은 내 말을 듣고 연이어 탄식만 하시다 끝내 하늘의 뜻이라 말씀하셨어. 하지만 난 하늘의 뜻이 아닌 내 선택임을 잘 알고 있다. 진옥, 방화가 매술을 이용해 네게 있던 동심술을 가져간 것은 기억하느냐?”
순간 멈칫하는 진옥을 보고, 진강이 웃음을 지었다.
“그때 너도 다 알고 있었겠지. 방화는 죽어서도 내 사람으로 남으려했다는 것을. 황조부님께서 생전에 남기셨던 유언은 방화가 이미 다 태워버렸다. 병부만 네게 넘겨준 것이고.”
진옥은 급격히 어두워져가는 눈빛으로 진강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째서 죽음으로 가는 길만 있는 너와 혼인하려하는지 알 수가 없구나. 구곡산에서 날 만났을 때 방화는 피를 토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날 역병에서 구해주곤 매술을 이용해 동심술을 가져가 버렸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를 알고 맞춰둔 거지.”
진강도 안색이 어두웠지만, 여전히 침착했다.
“방화를 너와 함께 죽도록 내버려둔다는 것이 네가 말하는 사랑이냐?”
보검을 타고 흘러내리는 선명한 피는 진강의 옷깃과 가슴을 붉게 물들였고, 그의 피는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서도 선명한 붉은 빛을 발했다.
“살 수 있다면 누가 살고 싶지 않을까. 방도가 없다면 운수를 따라야겠지.”
진강의 눈빛은 슬프도록 차갑고 적막했다.
“운수? 하늘의 뜻도 안 믿는 네가 운수를 따르겠단 말이냐?”
이내 진강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목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믿지 않으니 모든 걸 바꿔서라도 살리고 싶은 것이다. 그나저나 황제폐하, 진짜 날 죽일 생각도 없으시면서 계속 검을 내려놓지 않을 겁니까? 이제 방화가 내 상처를 보게 될 텐데 날더러 어떤 해명을 하란 말이냐.”
“지금 와서도 어찌 해명할지를 걱정한단 말이냐?”
진옥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고, 진강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약한 사람이니 어쩔 수 없지.”
진옥도 바로 검을 거둬들이곤 진강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진강,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남진 강산을 손 놓고 있을 생각은 마라. 황위에 오른 건 내가 맞지만 언제까지나 네게도 책임이 있다. 방화에 대해선……. 난 네게 진 게 아니라 방화의 마음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방화가 내게 승낙한 일은 네게 결정권이 없으니 열흘 안에 방화와 함께 경성으로 돌아와라.”
“돌아가지 않겠다면.”
“그럴 리 없다. 네 녀석 말대로 방화는 마음이 여리니 누구보다 양심도 투철하지. 본래 진강 네 것이었던 강산을 내게 떠넘긴 것이니 거들떠보지도 않겠단 생각은 추호도 마라. 난 어쩔 수 없는 내 출신, 아바마마, 남진의 천만 백성, 그리고 방화를 위해 이 자리에 오른 것이다. 절대 네 자식을 위해 오른 게 아니니 결코 이를 잊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고금 이래 형제 싸움으로 황위는 종종 피로 물들었었지. 하지만 지금은 아무 다툼도 없이 평화로운 선위가 이행됐다. 황제폐하, 그럼에도 아직도 나와 싸우길 원하십니까? 정녕 경쟁만 하며 살아가는 게 좋아 보이십니까?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본래 황제는 황제다운 모습을 갖춰야하는 겁니다.”
진옥이 몹시 아니꼽다는 듯 진강을 노려보았다.
“무슨 자격으로 그리도 득의양양한 것이더냐? 방화를 살게 해야만 득의양양할 자격이 있지.”
진강도 이내 웃음기를 쫙, 빼고 말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난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그 말 절대 잊지 마라!”
진옥은 마지막으로 진강을 노려본 후, 그에게서 뒤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