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4화 목숨을 걸다
사방화도 몸에 힘을 다 풀고 그의 품에 폭, 안겼다. 마음엔 끝없는 감회와 탄식이 흘러나왔다. 몇 번이고 굳게 다짐했던 결심도, 진강의 앞에선 순식간에 다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전생에 그녀가 마음속에 묻었던 사랑, 죽을 때까지 놓지 못했던 사랑이 바로 눈앞의 이 사내였다.
심수간에선 영친왕부의 소왕 진강이 남진을 위해 우상부 아가씨 이여벽과 혼인한다는 피 같은 소식이 들려왔지만 사방화는 그래도 끝까지 진강을 미워하진 못했다.
그땐 그저 하늘의 뜻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라 생각했고, 우상부가 아닌 충용후부에 태어나버린 자신의 운명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진강과 평생을 함께 백년해로 할 수 없다는 것이 미치도록 한스러울 뿐이었다.
다시 태어난 순간,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전생의 고통스러운 기억과 사랑을 다 잊어버렸다. 사씨와 충용후부가 멸망하고, 사운란과 함께 심수간에서 서로의 온기에만 의지해 처참하게 죽어갔던 기억도 이제 생각해보니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힘들진 않은 것 같았다.
기억을 잊으면 보통은 다 그럭저럭 썩 잘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기억을 잊지 못한 사람들은…….
전생에 심수간을 찾아와 사방화가 사운란과 함께 피를 토하며 죽어가던 모습을 본 진강의 심정이 어땠을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아무리 운명을 바꾸고 싶다고 한들 사부에게 빌어 하늘과 땅을 바꾸고 별을 되돌리게 만드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진강은 대체 이 기억을 다 안고서 지금껏 어떻게 마냥 기억이 없던 척할 수 있었던 걸까? 무려 8년이란 시간을 또 인내하며 기다리고, 사방화도 모르게 전생을 다 기억하는 스스로를 숨기고, 사방화가 절대로 알 수 없게…….
모든 것을 다 알게 되고 나니, 남몰래 계획을 짜고 온갖 고통과 고난을 감내하며 남진 명운을 암암리에 재보고, 영친왕부를 지렛대 삼아 남진 황실과 사씨 가문의 관계를 알아냈다는 건 더더욱 상상하기 힘들었다.
진강, 그는 대체 얼마나 많은 짐을 짊어지고 있었던 것인가…….
무거운 진실 앞에 사방화는 마음이 점차 더 아려왔다. 진강을 위해서, 그를 살리고자 멋대로 판단하고 홀로 다 포기해버린 것이 결코 좋은 판단이 아니었음을 더 처절하게 깨달았다.
* * *
사방화는 지금껏 진강을 전혀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진강에겐 당연히 이 남진 강산을 지키는 것이 사방화보다 훨씬 더 중요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건 오로지 사방화의 오해와 착각이었을 뿐이었다.
진강이 원하는 건 전생의 사방화 모습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 단정해버린 것도 사방화의 기억이 전생의 진강 모습에 머물러 있어 일어난 오해였다.
전생의 진강도 물론 지금처럼 엄청난 신분과 존재감을 자랑했다.
적통 황손, 덕자 태후의 친손자, 황제의 친조카, 영친왕부 유일한 적통, 그를 수식하는 이름도 화려했고, 덕자 태후의 왕씨 가문, 영친 왕비의 청하 최씨 가문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는 그의 배후도 휘황찬란하기 그지없었다.
황실 황자, 종실 공자, 진강은 모든 황족, 황손을 통틀어서도 가장 최고의 위치에 군림하던 사람이었다. 고귀한 신분은 말할 것도 없고, 어릴 적부터 타고난 재능이 뛰어나 부귀영화는 공기처럼 보장된 삶을 누렸다.
거기다 소탈한 풍류도 즐길 줄 아는 진강은 세상 모든 사내들의 부러움을 받고, 세상 여인들의 마음을 훔치며 천하를 군림하던 사내였다. 300년간 이어온 남진의 부귀영화는 그가 다 누리는 것처럼 독보적인 존재감이 넘쳤다.
전생에서의 진강과 진옥은 지금처럼 사이가 썩 좋은 건 아니었으나 적당한 때엔 검을 거둬들일 줄 아는 형제였다.
전생의 진강 역시 멋대로 행동하는 기질이 있었지만, 지금 세상이 말하듯 세속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세상을 우습게 아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전생의 진강은 걸핏하면 천여 명이 넘어가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하고, 자신의 엄청난 신분을 자랑하듯 풍류를 즐기기 바빴으나 현생의 진강은 고작 8살에 시중드는 하인들까지 모두 다 내보낸 채 오직 사촌 형제 청언만 곁에 남겨두었다.
또 현생의 진강은 사촌 진옥과 평생을 다투며 적당히 끝내는 법이 없었고, 좌상의 마차에 올라 미친 듯 판을 벌여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까지 만들기 일쑤였다.
하지만 분명한 건 현생에서의 진강은 심사숙고한 끝에 자신의 칼날을 딱 필요하고 써야할 곳에만 써왔다는 것이고, 정작 자신이 지고 있던 무거운 짐들은 단 한 순간도 내색 없이 철저히 숨겨왔다는 것이었다.
남진 강산의 명운이란 엄청난 짐과 사방화라는 무거운 연심의 무게…….
이 강산이 무너지면 진강이 매우 힘들어할 것이란 건 충분히 짐작했으나 막상 진강의 곁에 사방화가 없다면 그가 얼마나 극에 달하는 고통을 느낄지는 전혀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이번 생에 진강이 보여준 모습이야말로 진강의 진정한 진심이었다. 진강은 정말 자신이 가진 아니, 그 한계까지 뛰어넘어 사방화 한 사람을 위해 모든 걸 다 쏟아내며 살았다.
사방화는 순간 마음이 미칠 듯이 아파와 저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버렸다.
진강도 그녀의 복잡한 심정이 느껴졌는지, 손을 들어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눈을 아예 가려버렸다.
“방화……. 어찌 또 우는 것이오, 응? 그래, 그릇에 받아뒀다가 꿩을 삶는 데 쓰면 물도 아끼고 좋겠네.”
진강의 농담에도 사방화는 울음을 그치질 못했다.
이내 진강은 살짝 한숨을 내쉰 뒤, 사방화의 눈에 입을 맞췄다.
일순 사방화는 진강의 입술에 데기라도 한 듯 눈물이 뚝, 멈춰버렸다.
진강은 발갛게 부어버린 그녀의 눈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대체 전생과 어디가 달라졌다는 것이오? 그때와 똑같이 이렇게나 상냥한데. 다른 사람만 위하느라 자기 자신은 절대 돌보지 않는 건 여전하고. 그 지옥 같은 무명산의 산송장들도 당신을 악하게 물들이지 못했소. 평생 충용후부를 위해, 사씨와 남진 강산을 위해, 그리고 또 나를 위해 살아오면서 대체 당신 스스로는 어디에다 내버린 것이오?”
사방화가 아무런 말도 없자, 진강이 다시 또 말을 이었다.
“그래, 내 마음에 당신을 품고 있으니 스스로를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소. 아, 경성에 온 뒤로 여태 아무것도 먹질 못했더니 배고파 죽을 것 같군.”
사방화는 옷소매로 눈물을 닦고 괜스레 퉁명스레 말했다.
“밥도 안 하고 여태 절 붙들고 얘기만 하시기에 굶어 죽지도 않는 분인 줄 알았네요.”
“잠든 당신에게 화를 낼 수도 없으니 우선 화를 삭일 수밖에 없었소. 당신이 일어날 때가 돼서 밥 먹고 나서 잘 얘기해보려 했건만 당신이 부득부득 내 화를 돋웠잖소. 그런데 이제와 내 탓을 한다는 건가? 당신 참…….”
사방화는 눈물을 매달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진강은 그녀의 옷소매로 자신의 손에 있던 사방화의 눈물을 닦고 일어났다.
“밥해올 테니 기다리시오. 밥하는 사이 또 날 두고 도망가면 안 되오.”
“어째서 제 옷으로 닦는 거예요?”
“옷이 하나밖에 없소.”
진강은 유유히 문턱을 넘어 부엌으로 향했다.
잠시 후, 부엌에선 그릇들 소리에 이어 고기를 다지는 소리, 장작 패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엌에선 맛좋은 향기가 풍겨왔다.
사방화는 한참 침상에 앉아 있다 천천히 방 밖으로 나갔다.
* * *
정원 한가운데엔 진강이 던져버린 손수건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핏자국은 말라 만발한 매화꽃처럼 드문드문 붉은 흔적을 남겼다.
사방화가 연이어 매술을 썼던 것 때문인지, 아니면 사운란에게 피를 줘서 그랬는지, 진강과의 합방으로써 매족의 규율을 어겨서인지 일찌감치부터 심장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벌써 두 차례나 피를 쏟았다.
첫 번째는 구곡산에서 진옥을 만났을 때였다. 사방화는 그제야 비로소 진강을 놓기로 결심하고, 진옥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무리 험난한 굴곡을 거듭해도 진강을 이길 순 없었다. 자신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이야기하는 진강을 어찌 이길 수 있을까.
전생의 그때처럼 이번 생 역시 피를 쏟아내고 죽음을 맞이한다 해도 진강과 함께 죽을 수 있는 거라면 아무 여한도 없을 것 같았다.
이내 사방화는 문턱에 천천히 쪼그려 앉았다. 무더운 여름이지만 깊은 산속의 햇살은 적당히 따뜻한 느낌이었다.
고요한 주변, 그녀는 가만히 문기둥에 기대 온몸으로 햇볕을 맞았다. 모처럼 느끼는 평화에 기분도 절로 정화되는듯했다.
진강은 꿩을 요리하고, 불을 때 밥까지 준비한 후 부엌에서 나왔다. 그러다 마침 문틀에 기대 조용히 쉬고 있는 사방화를 보고 순간 멈칫하며 섰다.
침울한 것들은 모두 다 떨쳐낸 채, 쏟아지는 햇볕 아래 서 있는 사방화는 실로 그림처럼 아리따워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산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간지럽히는 것조차 너무도 아름다웠다.
진강은 그렇게 아예 넋이 나간 듯 사방화만 바라보고 서 있었고, 사방화는 그의 시선을 느끼고 천천히 진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보통 사내들은 부엌을 멀리했지만 진강은 사방화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주저함이 없었다. 요리도 언제나 스스로 나서서 정성껏 준비하곤 했었다.
사방화는 진강을 보며 더욱더 절실히 느꼈다. 하늘은 결코 그녀를 버린 적이 없었다. 오히려 넘치는 복을 퍼부어주고 있었던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과거의 악몽은 저 축복 같은 진강으로 이미 완전히 다 씻겨내려 가버렸다.
세상엔 이뤄지지 못한 수많은 인연과 사랑이 있다. 결국은 모두가 황천길을 걸으며 회한의 눈물을 흘리고, 내하 다리에서 맹파탕을 마시며 그 절절했던 사랑은 다 잊고 모르는 사이로 돌아선다.
하지만 사방화와 진강에겐 다행히 또 한 번의 생이 주어졌다.
사방화는 또다시 눈물이 차올라 진강에게서 시선을 떼버렸다.
진강은 바로 부엌을 나와 그녀 앞에 쪼그려 앉아 다 쉰 목소리로 말했다.
“사방화, 나 배고파 죽을 것 같소.”
사방화가 고개를 들자, 진강이 그녀의 손을 잡고 제 심장에 가져다댔다.
“여기가 허기져서 너무 마음이 아프오.”
사방화의 눈썹이 살짝 파르르, 떨렸다.
“얼마나 남았어요? 도와드려요?”
진강은 사방화와 눈을 맞추며 더 가까이 다가와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응, 그런데 밥이 되려면 아직 반 시진은 남았소. 장작을 충분히 넣어뒀으니 다 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오. 그런데 더 이상은 기다릴 수가 없소. 먼저 먹어야겠소.”
사방화는 귓가에 닿는 진강의 숨결에 순간적으로 긴장하기 시작했다. 진강은 다시 그녀의 눈을 또렷이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을 먼저 먹어야겠소.”
사방화는 금세 얼굴이 새빨개져 그를 밀쳤다.
“안 돼요.”
진강이 눈썹을 까딱이자, 사방화는 곧 터질 것 같은 얼굴을 숙이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저도 배고파요.”
“그럼 당신도 날 먹으면 되잖소.”
사방화가 있는 힘껏 진강을 쏘아봤지만, 진강은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 사방화를 안고 방으로 향했다.
* * *
사방화를 침상에 눕히고 휘장을 친 진강이 그녀의 눈을 내려다보며 진지한 눈빛을 반짝였다.
“당신이 떠난 뒤로 줄곧 생각해왔소. 당신을 다시 만나는 날, 절대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만들 거라고……. 군자는 절대 빈말하지 않는 법이오.”
이내 진강과 사방화의 진한 입맞춤이 시작됐다.
사방화는 진강에게 대체 당신이 언제부터 군자였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는 물어볼 틈조차 주지 않았다.
침상과 휘장이 흔들리며 사랑을 나누는 열기는 방 전체를 감쌌고 한동안 사라질 기미도 보이질 않았다.
벌써 사방화와 진강이 서로 떨어져 있던 시간도 장장 한 달에 달했다.
진강은 그간 넘치는 그리움을 달랠 듯 열정적인 기운을 감추지 못했지만, 사방화의 몸을 생각해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멈췄다.
그리고 그는 부엌으로 달려가 상을 차려와선 축, 쳐져 잠이 든 사방화를 일으켜 손수 밥을 먹여주었다.
하지만 진강은 허기진 마음을 달래지 못해 결국 다시 사방화를 사랑의 열기로 이끌었고, 정말 그녀가 사흘간 침상에서 내려올 수 없을 만큼 열정적인 사랑을 표현했다. 불꽃은 사방화가 완전히 지친 후에야 겨우 잦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