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0화 (780/978)

780화 선황제의 유언 (2) 

유언을 읽는 진옥의 표정은 짧은 순간 여러 색으로 변모했다. 밝았다가, 어두웠다가, 푸르렀다가, 창백해지길 반복했다. 그러다 진옥은 한참 후, 오권 쪽으로 성지를 집어던진 뒤 진강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역시 아바마마는 네 자식 편이시구나.”

진옥은 이 한마디를 남기고 애써 화를 억누르며 자리를 떠났다.

대신들은 몹시 어두운 낯빛을 하고도 유언의 내용을 궁금해 했다.

오권은 떠나가는 진옥을 한번 쳐다본 뒤, 큰 소리로 유언을 낭독했다.

“천명을 받들어 선황폐하께서 말씀하시길, 오늘 잠에서 깨어나 보니 여태 사씨에게 해왔던 일들이 타당치 않았다는 게 비로소 절실히 느껴지도다. 늦게나마 깨닫게 됐지만 이미 되돌릴 힘도 없고 며칠 사이 정신도 혼탁해짐을 느낀다.

일전에 해왔던 일들에 대해 과오를 논한다는 것은 자연히 후세대에 이루어질 것이나, 오직 한 가지 일에 있어선 짐이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짐은 혼약과 더불어 두 차례의 혼인 성지로 영친왕부 소왕 진강과 충용후부 아가씨 사방화의 폐혼을 시킨 적이 있다. 이는 결국 짐이 조카의 혼인을 가지고 조카를 우롱한 것이나 다름없는 바이니, 오래도록 웃음거리가 되어도 마땅하다.

이제 짐의 과오를 인정하고 다시 세상에 휴서 성지를 거둬들이겠다는 뜻을 밝히노라. 진강과 사방화는 여전한 부부이다. 하지만 훗날 두 사람 사이의 불화로 결별하게 된다면 그것은 짐의 과오라 할 수 없다.

이 성지가 있는 한, 새 황제를 포함한 후세의 그 어떤 누구도 두 사람의 일을 간섭할 수 없다. 이에 짐은 편히 눈을 감고 앞으로도 영원한 남진의 번성을 위해 보우하겠노라.”

선황제의 마지막 유언을 듣고, 대신들은 소리 내어 흐느끼기 시작했다.

영친왕, 좌상과 우상, 영강후를 비롯한 대신들도 선황제가 이런 유언을 남겼을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선황제가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실로 뜻밖이었다.

이내 오권은 황색 성지를 돌려 모두가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선황제의 인장과 옥새가 선명하게 찍힌, 분명한 선황제의 유언이었다.

선황제는 생전 조카 진강이 거칠 것 없이 막무가내로 활보해도 단 한 번도 그를 책망하거나 벌하지 않았다. 평생을 진강에게 져주었던 황제는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진강을 위해 특별한 유언까지 남겨주었다.

그것도 늘 목숨처럼 생각해온 훗날의 명성까지 내려놓고, 스스로의 죄를 인정하는 형식의 성지를 남겨 온 세상에 널리 공포하라 명했다.

진옥이 그토록 분노하며 자리를 뜬 데에도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선황제는 세상에 여전히 진강과 사방화의 혼인이 공고하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사방화는 여전히 영친왕부의 며느리이자 진강의 아내임을 선명하게 알렸다.

선황제의 이 유언 덕에 결국 진강과 진옥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도 면할 수 있었다. 이 유언이 아니었다면 대체 이곳엔 얼마나 험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을까. 그 결과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제 막 새 황제가 즉위한 남진은 절대 그런 거대한 풍파를 감당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대신들은 천만다행의 상황에 실로 감격한 빛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잠시 후, 진강은 바람이 빠진 듯 엷은 웃음을 터뜨렸다.

“황숙께서 비로소 옳은 판단을 해주셨구나. 하지만 이건 날 위한 게 아니라 오직 이 남진 강산을 위해 그리 하셨던 것이지.”

진강이 떠나는 진옥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지만, 진옥은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이윽고 진강도 사방화를 안고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림군은 황급히 활을 거두고 그를 위해 길을 내주었다.

진강은 바깥으로 나가 휘파람을 불었다.

조금 전 그가 타고 왔던 말이 순식간에 진강의 앞으로 달려왔고, 진강은 먼저 사방화를 안전하게 태운 뒤 말을 타고 금세 황궁 밖으로 떠났다.

영친왕이 미처 불러 세울 틈도 없었다. 그러다 영친왕은 마침 춘란의 품에 안겨 있던 영친왕비가 깨어난 것을 보고 서둘러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부인, 괜찮으시오?”

“전 죽지 않습니다. 저 망할 놈이 어찌나 깜짝 놀라게 했는지, 정말 죽었으면 저도 따라 죽었을 겁니다!”

“저 썩을 놈은 죽어도 괜찮소! 그런데 부인이 왜 따라 죽는단 말이오?”

“아무리 나쁜 놈일지라도 왕야보다 훌륭한 아들입니다! 왕야께선 이 남진 강산 하나를 위해 평생 콧바람조차 편히 흥얼거리지 못한 분 아니십니까! 우리 아들이 저러지 않고서야 어찌 며느리를 되찾아 올 수 있었겠어요?”

그리고 영친왕비는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춘란에게 말했다. 

“춘란, 강이는 왕부로 돌아간 것이냐? 우리도 어서 가자.”

춘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영친왕비를 부축했다.

영친왕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황급히 떠나는 두 사람을 보고, 영친왕은 뒤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게 다 왕비가 버릇없게 키운 탓이오!”

영친왕의 목소리에도 영친왕비는 망설임 없이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영친왕은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한번 내쉬곤 뒤돌아 대신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들도 서로의 눈치만 살피며 아무런 말도 없었다.

무려 새 황제의 즉위 당일에 일어난 실로 이 엄청난 사건들, 이 같은 일은 과거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만한 일이었다. 

* * *

진강은 사방화를 품에 안고 곧장 황성을 빠져나갔다. 거리는 새 황제의 즉위로 들떠서 경성 안팎이 온갖 기쁘고 즐거운 분위기로 들썩이고 있었다.

이내 빠르게 영친왕부로 돌아온 영친왕비와 춘란은 급히 희순부터 찾았다.

“강이와 방화는 어디 있느냐? 낙매거로 간 것이냐?”

“황궁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듣고 소왕야께서 돌아오실 거라 생각해 지금껏 기다렸으나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희순이 말했다.

“뭐? 우리보다 먼저 황궁을 나갔는데 대체 어딜 간 것이란 말이냐?”

희순이 머리를 긁적였다.

“나가서 알아보고 올까요?”

영친왕비가 손을 내저었다.

“그래, 어서 가서 알아보고 오너라!”

희순은 서둘러 사람을 보냈고, 잠시 후 희순이 보냈던 이가 돌아와 말했다.

“소왕야께서 도성을 아예 나가시는 걸 보았다는 이가 있었습니다.”

영친왕비는 순간 어리둥절해했다.

“뭐? 성 밖으로 나가 어딜 갔단 말이냐? 어느 성으로 나갔느냐?”

하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북성으로 나가시는 것까지 보았다고 합니다. 말을 타고 계신 터라 너무 빨라 그 뒤로는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놈이 대체 집에 돌아오지 않고 또 성을 나가 뭘 하려는 것이냐! 하……, 어서 소왕야가 어딜 간 건지 더 알아보고 오거라.”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하인은 또다시 왕부를 나섰고, 춘란은 격해진 영친왕비를 다독거렸다.

“소왕야께서 돌아오셨으니 이제 마음 졸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소왕야께서 소왕비마마를 데리고 나가신 데는 분명 뜻이 있으실 테니 큰일이 일어나진 않을 겁니다.”

“그래, 맞는 말이다.”

영친왕비도 고개를 끄덕이며 내원으로 향했다.

사방화의 시녀들도 진강을 뒤쫓아 영친왕부로 왔지만 그가 북성으로 나갔다는 말만 전해 듣고 서둘러 행방을 찾아 나섰다.

* * *

영친왕, 좌우상, 영강후와 대신들은 진옥을 뒤쫓아 어서재로 왔지만, 진옥은 문을 굳게 닫고서 오늘은 더 이상 누구도 만나지 않겠단 말만 전했다.

영친왕과 대신들도 결국 황궁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좌상은 황궁을 나온 뒤, 영친왕에게 말을 건넸다.

“왕야, 방화 아가씨를 다시 며느리로 맞게 되셨군요.”

영친왕은 말없이 한숨만 내쉬었다.

그러자 좌상도 탄식을 하며 힘없이 말을 이었다.

“진정 강산엔 재주 넘치는 인재들이 우리 뒤를 잇나 봅니다. 오늘 같은 싸움이 한 번만 더 일어나면 이 늙어빠진 몸으론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듯해요. 요즘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단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우상이 바로 좌상을 보며 말했다.

“아니, 좌상. 이리 창창한데 무슨 사직을 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단 말인가?”

좌상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답했다.

“그간 내 아들놈에게 심히 소홀했던 듯해. 이제와 돌이켜보니 대인들과 달리 내 뒤를 이을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달았어.”

“소홀했던 게 아니라 심히 관리하셨던 게지. 출세하진 못했어도 행실이 바르니 너무 걱정 마시게. 또 좌상께선 폐하의 중임을 얻으셨으니 좌상부가 무너질 일은 없을 것이야.”

우상이 위로를 전해도, 좌상은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평생 폐하께서 저리 화를 내시는 건 처음 봤네.”

우상도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심히 놀라긴 했다만, 큰일이 일어나진 않았으니 다행이지. 이 일을 계기로 강 소왕야와 폐하께서 평화로이 지내시기만을 바랄 뿐이네. 그렇지 않았다간 남진 강산이 실로 위험해질 수가 있으니 말이지.”

그때, 조용히 있던 영친왕이 입을 열었다.

“몇 년째인데 스스로들 알아서 하겠지. 내 먼저 왕부로 돌아가 보겠소. 세상에 가장 불안한 게 내 아들놈이니.”

좌우상도 고개를 끄덕인 후,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 * *

우상부에선 우상 부인, 이여벽 두 모녀가 나란히 수를 놓던 중이었다.

그러다 진강이 황궁으로 쳐들어와 진옥과 큰 싸움이 일어날 뻔했지만, 선황제의 유언으로 마무리됐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이 이야기에, 이여벽은 정신이 빠진 듯 아무 생각 없이 수만 놓았다.

우상 부인은 그런 딸의 손을 붙잡고 화를 냈다.

“아이고, 벽아. 아직도 모르겠느냐? 한평생 그 어떤 방법으로도 강 소왕야와는 혼인할 수 없을 테니 제발 단념해라!”

이여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마음 접었습니다.”

우상 부인도 그런 딸이 너무도 가슴 아파 더는 나무랄 수도 없었다. 

* * *

한편, 영강후부에서도 황궁의 일이 전해져 연람이 크게 기뻐했다.

“그런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진강 소왕야의 모습이지요!”

영강후 부인은 바로 딸을 째려보며 진정시켰다.

“강 소왕야가 반드시 즉위 날에 맞춰 돌아올 거라더니, 네 오라비 말이 맞았구나.”

“그렇게 방화를 탐탁지 않아 하시더니 이제는 아시겠지요? 방화는 오라버니가 뺏으려 한다 해도 뺏어오지도 못할 인물이에요. 그런데 어머니께서 발목까지 잡으셨으니…….”

후 부인은 바로 연람의 팔을 한 대 때렸다.

“하여간 이 어미 약점을 들추지 못해 안달이지! 그땐 방화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한 게다. 그때 내가 살아있던 게 천운이었구나. 내가 죽고 없어 네 오라비가 이 파란만장한 애정사에 엮여 들어갔다면 어쩔 뻔했느냐.”

“오라버니는 그때도 이미 연심 때문에 충분히 괴로워했어요. 어머니께선 오라버니 마음을 크게 신경 쓰지도 않으셨던 것뿐이죠.”

연람의 말에, 후 부인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가출을 안 했더라면 이 어미가 네 오라비 인생을 망쳐놓을 뻔했다.”

“방화에게도 고마워해야지요. 오라버니를 위해 황실 은위와 우리 후부에게서 안전히 보호해 북제까지 무사히 갈 수 있게 도와줬으니까요.”

“그래, 방화에게 고마워해야 할 게 참 많구나. 너랑 황궁에 가서 방화에게 진맥을 받을 때만 해도 틀림없이 황후가 될 줄 알았는데. 결국 강 소왕야가 다시 방화를 데려가는구나.”

“가장 의외였던 건 선황폐하께서 남기신 유언이에요.”

“그러니 말이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테지. 폐하도 충격이 크셨을 게다.”

“이렇게 보니 진옥도 참 가여운 것 같아요. 그 유언만 없었어도 강 소왕야가 그리 쉽게 방화를 데려가진 못했을 텐데. 그래도 이제 영친왕부로 돌아간다면 전보다 편하게 방화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연람은 턱을 괴고 기쁜 듯 말했다.

“하여간 노는 것밖에 모르지! 어디 감히 황제폐하의 존함을 입에 올리느냐. 그리고 이제 강산을 손안에 쥐고, 최고의 미인들과 평생을 함께 살아가실 텐데 폐하가 어딜 봐서 불쌍하다는 게야?”

후 부인의 호통에, 연람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세상 최고의 미인이 와도 마음에 품었던 한 여인보다 좋을까요? 선황폐하께서도 셀 수도 없이 많은 미인들과 함께 하셨지만, 한평생 영친 왕비마마 한분을 잊지 못하셨잖아요.”

후 부인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경문풍월』 27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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