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9화 선황제의 유언 (1)
진강의 차분한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좌상이 곧장 앞으로 나왔다.
“강 소왕야, 말씀에 착오가 있는 것 같소만. 충용후부 사봉 아가씨는 북제 황제폐하를 연모하시어 북제로 시집간 것이오.”
진강은 바로 웃음을 터뜨렸다.
“애초에 북제 황제폐하께서 혼인하려 하신 분은 대장공주마마십니다. 하지만 고모님께서 북제로 가는 걸 완강히 거부하셨지요.
이 때문에 변경에서 협상을 했는데, 사영 세자께선 황숙과 함께 계셨고 당시 사봉 아가씨께선 막북을 뒤쫓아 가 북제 황제폐하께 접근을 했던 겁니다. 남진을 구하려고요! 그리하여 사봉 아가씨께서 북제 폐하의 마음을 얻어 우리 고모님을 대신해 북제로 시집을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좌상은 일순 어리둥절해졌다.
“북제 폐하와 황후마마께선 오래도록 깊은 정을 나누고 계시다고 들었었는데 그건 모두 다 거짓이었단 말이오?”
“북제 폐하께서 황후마마를 깊이 연모하시는 건 당연히 황후마마가 그럴만한 분이라 그런 것이겠지요. 거기에 남진이 왈가왈부할 자격이 있습니까!”
진강의 말에, 순간 좌상은 말문이 턱 막혔다.
진강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사봉이란 한 여인께선 북제의 침범을 막고자 무려 20년이란 세월을 견디고 계신 것입니다! 황후마마의 조국 남진을 위해서요! 그런데 정작 이 20년간 남진에선 뭘 하고 있었지요? 황숙께선 뭘 하셨습니까?
황숙께선 평생 사씨를 제거하는 데만 온 신경을 다 쏟으셨습니다! 그로 인해 은산 은위들을 통제하지도 못했고, 그들이 계속 힘을 키워나가는 걸 내버려두기만 하셨지요.
사실 그 은위들은 남진 황실을 위한 검으로 삼아 언젠가 사씨를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키우고 있었지만, 결국 은산 은위들은 통제에서 벗어나 남진 강산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황숙께서도 승하하실 때까지 이를 얼마나 후회하신 줄 아십니까?
현재 남진은 만신창이가 됐습니다. 이대로 북제가 쳐들어온다면 한 달 만에 남진 하산을 점령할 수 있으리라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서산 군영의 30만 대군을 제외하고 이 나라에 북제에 맞설 병력이 있기는 합니까?”
하늘에 찬물을 끼얹은 듯, 대신들은 경악한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곧 진강은 진옥을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진옥, 넌 일찍이 황숙께 사씨란 환란을 제거하기 위한 계략을 배웠겠지. 네가 했던 모든 행동이 바로 사씨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단 걸 잘 안다.
하지만 작년, 막북과 북제를 다녀오고 나서야 비로소 모든 게 잘못됐단 걸 깨달았겠지? 그러나 이제와 모든 걸 메꾸려한들 그게 가능하겠느냐?
남진은 지난 10년간 사씨를 제거하기 위한 것에만 심혈을 기울여왔지. 그 10년간 아니, 그보다 더한 세월동안 제언경과 옥씨 가문은 남진을 정복하기 위해 모든 걸 치밀하게 준비해왔다.
네가 정녕 순간순간의 위기만 대처해가며 북제를 맞설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이런 상황에도 네가 진정 이 여인을 황후로 세우겠단 말이더냐!”
진옥이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이내 진강은 사방화의 어깨를 끌어안고 차가운 눈빛으로 진옥을 응시했다.
진옥도 진강의 눈을 마주하며 어두웠던 기운이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으나 잠시 멈칫한 후에 천천히 입술을 뗐다.
“방화가 승낙만 해준다면 황후로 세울 것이다. 그래, 네 말 모두 일리가 있다. 그런데 너는 방화에게 어찌 잘해주겠단 말이더냐? 네가 무슨 권리가 있어 방화를 억지로 곁에 묶어두려 하느냐. 대체 뭘 믿고 그러는 것인데?”
“네게 일일이 설명할 필요 없다.”
진강의 답에 진옥은 곧장 비웃음을 흘렸다.
“그럼 나도 이 강산을 어찌 지켜갈지에 대해 설명할 필요 없겠구나.”
“그래, 언제부터 네 녀석 설명이 필요했다고? 진씨 황조들께만 잘하면 그것으로 됐다. 네 자식과 쓸데없는 얘기할 시간 없으니 앞으로 황제 노릇이나 잘해라. 난 방화만 데려가면 된다.”
진강은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사방화의 손을 그러잡았다.
“방화가 동의하지 않지 않느냐!”
“됐다, 어차피 방화는 오래도록 무명산에서 지내느라 머리가 다 굳어버린 것이다. 내가 깨어날 수 있게 도와줘야지.”
결국 진강의 힘을 이길 수 없던 사방화는 매술을 쓰려 눈빛을 굳혔다.
“누가 당신과 같이 가려 한답니까…….”
사방화가 매술을 쓰려하자 진강은 이번엔 민첩하게 사방화의 혈을 눌러 그대로 그녀를 조심히 안아들었다.
진강의 품안에서 사방화는 모든 힘을 잃고 축, 늘어져 의식을 잃었다.
이내 진강은 사방화가 편할 수 있게 자세를 고쳐 안고 진옥을 쳐다보았다.
“방화가 동의하지 않아도, 방화는 이미 내 사람이다. 우린 이미 평생을 약속했으니 살아서도, 죽어서도 함께할 것이다. 방화가 내 손을 놓아도 나는 절대 방화의 손을 놓을 수 없다.”
진옥은 진강의 결연한 눈빛을 보며 격렬히 분노했다.
“방화가 원치 않는다고 하질 않느냐!”
진강이 서늘한 눈빛을 반짝였다.
“왜, 네 녀석과 협상이라도 한 것이냐?”
진옥은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진강은 그런 진옥을 보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네 자식과 그 어떤 협의를 맺었더라도 내겐 아무 소용없다. 난 전생에서부터 방화를 사랑했다! 운명을 거스른대도 난 절대 방화와 헤어질 수 없다. 방화가 진씨 성을 따른다고 해도 그건 내 성씨를 따르는 것이다.”
진옥은 더할 수 없이 굳어진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진강, 어찌 이리 제멋대로인 것이냐. 방화도 스스로의 뜻이 있는데 왜 네 멋대로 방화 인생에 관여하고 함부로 붙잡아 두는 것이냐? 무명산에서 돌아온 그 직후부터 방화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더니, 그간 방화가 참아왔을 거라곤 생각진 못한 것이냐? 방화 생각은 안중에도 없이 강요만 하다니.”
진강이 시선을 내리고 잠시 한숨을 쉰 후, 서늘한 눈빛을 들었다.
“남진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건 것이 방화의 뜻이라고? 그럼 난 앞으로도 얼마든지 내 멋대로 하며 방화의 뜻을 온몸으로 막을 것이다. 방화가 이 강산을 위해 나와의 연심을 한낱 재로 만들어버린 것이라면 나는 또 일일이 조각조각 난 연정을 이어붙일 것이다.
방화는 이렇게 큰 뜻을 품을 줄 아는 존경스런 여인이지만, 난 절대로 방화 생각에 동의할 수 없다. 이 남진 강산의 운명과 흥망은 모두 네 자식의 일이다, 그게 나와 방화랑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냐!
방화가 내내 어쩔 수 없이 나를 버티고 참아온 것이라 해도 괜찮다. 내가 그만큼 방화를 사랑하니 다 견딜 수 있다. 내가 평생을 바라고 기다린 사람이다. 한줌 잿더미가 되면 또 재가 되어 방화를 지킬 것이다. 무엇으로도 나를 꺾으려 하지마라. 난 죽어서도 절대 방화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진옥의 눈에도 냉엄한 빛이 번쩍였다.
“뭐? 너희들이 남진과 아무 상관도 없다고? 방화의 가문부터가 남진에 뿌리내린 집안이다! 충용후부와 사씨가 남진 강산과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진강 네 자식은! 넌 이제 네 핏줄도 부정하는 것이냐? 할바마마와 할마마마께서 널 얼마나 사랑했는데! 이제 그마저 다 잊어버린 것이냐?
할마마마, 할바마마께선 태어날 때부터 널 정성스레 키워주시며 가장 중요한 것들은 다 네 녀석 손에 쥐어주셨다. 아바마마께서도 네게 지궁령을 남기셨기에 지금 네 손에 남진 절반이 쥐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넌 황손의 뿌리까지 부정하며 이 강산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방화는 어차피 너와 함께 있길 원치도 않는다. 그런데 이리 강제로 방화를 억압할 이유가 있느냐? 네 자식에게 정녕 그럴 권리가 있어?”
진강이 살짝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미 아주 잘 알고 있구나. 그러니 더는 날 건드리지 말고 방화를 보내라. 그렇지 않으면 내 황조부님, 황조모님께 불효를 저질러서라도 북제가 쳐들어오기 전 내 손으로 이 강산을 다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을 것이다.
그리고 방화가 나와 함께 있길 원치 않는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냐? 방화는 본래 마음과 반대로 말하는 것에 도가 튼 사람이다.
방화는 이미 내 사람으로 태어났다. 방화가 죽는다 해도 난 세상을 뒤집어서라도 반드시 살려낼 거다. 방화가 날 원치 않는단 헛꿈은 그만 버려라.”
진옥은 이내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그래, 너도 남진 강산을 신경 쓰지 않는데 나라고 신경 쓸 것 같으냐? 네가 상관없다면 나와는 반드시 상관이 있다는 말이더냐? 우린 어차피 똑같은 진씨 형제인데 기껏해야 남진 강산에 함께 묻히는 게 다겠지. 여봐라! 당장 짐에게 진강을 넘겨라!”
진옥의 호령에 어림군은 일제히 진강을 에워쌌다.
그러나 진강은 차가운 조소만 흘릴 뿐이었다.
“그래, 아주 패기가 넘치는구나! 결코 산 채로 붙들려 고문당할 생각은 없으니 자신 있다면 활을 쏴 보거라!”
“활을 쏴라!”
어림군은 동시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진강을 향해 활을 겨눴다.
“황상! 절대 아니 되오!”
그 순간, 영친왕이 서둘러 달려와 진옥의 팔을 붙잡았지만 진옥은 그저 차갑게 팔을 빼버렸다.
“폐하, 고정하십시오. 절대 활을 쏴서는 아니 됩니다!”
우상도 서둘러 나와 진옥을 말렸다.
“폐하! 소왕야가 방화 아가씨를 안고 있지 않습니까! 활을 거둬주십시오!”
영강후도 나섰다.
그래도 진옥이 꼼짝도 하지 않자, 우상은 좌상을 떠밀며 소리쳤다.
“좌상! 폐하의 충신이라 떠들고 다닐 땐 언제고 이럴 땐 입을 꾹 다물고 계신가! 폐하와 강 소왕야는 동심주에 걸려 있소! 강 소왕야가 돌아가시면 폐하도 승하하신단 말이오! 정녕 남진이 무너지는 꼴을 보고 싶은 게요?”
좌상은 그제야 덜덜 떨며 진옥의 다리를 붙잡았다.
“폐하, 활을 거두어 주십시오. 남진 강산의 천만 백성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폐하께서 황위를 이어받기만 고대하셨던 태후마마를 생각하시고, 선황폐하께서 임종 전에 남기신 말씀을 생각해 주시옵소서. 또한…….”
“꺼져라!”
진옥은 자신의 다리를 붙잡은 좌상을 떨치려 아예 발길질을 했다.
평소 온화한 성정의 진옥은 단 한 번도 이렇게까지 화를 낸 적이 없었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대신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지만, 진옥은 들은 척도 않고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어서 활을 쏴라!”
어림군들은 결국 이를 악물고 활시위를 끝까지 당겼다.
그때였다. 순간 멀리서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소리와 함께, 숨이 턱 끝까지 치달아 날카롭게 외치는 음성이 들려왔다.
“폐하,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절대 활을 쏘시면 아니 되십니다! 선황폐하께서 남기신 유언이 있사옵니다!”
유언이란 말에 대신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선황제의 곁에서 시중을 들던 태감 오권이었다.
오권은 온몸이 땀투성이가 된 채로 달려와 숨도 고르지 못하고 진옥에게 즉각 인사를 올렸다.
“소인, 황제폐하를 뵙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진옥이 천천히 고개를 내려 오권을 바라보았다.
“선황폐하의 유언?”
오권이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 아룁니다. 선황폐하께서 임종 전에 남기신 유언이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짐이 한시도 떠나지 않고 아바마마의 임종을 지켰거늘 어찌 유언이 있단 말이냐?”
진옥이 황당한 눈빛으로 이야기했다.
“폐하, 소인이 어찌 폐하께 거짓을 고하겠나이까. 폐하께서 돌아오시던 날, 방화 아가씨와 함께 오신단 말에 선황폐하께서 특별히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그리곤 부득이한 상황이 오기 전까진 절대 꺼내지 말라고 하셨으나 소인 이제는 이 방법이 아니면 안 될듯하여 선황폐하의 유언을 가지고 왔습니다.”
“무슨 유언이지?”
진옥의 말에, 오권은 땅에 무릎을 꿇고 옷소매 안에서 황색 성지를 꺼냈다.
“소인이 낭독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짐에게 내놓아라!”
진옥이 손을 내밀자 오권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그에게 성지를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