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5화 뱃놀이를 하며 담소를 나누다 (2)
사방화는 나른한 자세로 반쯤 누워 선실 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아예 이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는 모습이었다.
진옥이 다시 최의지를 보며 말했다.
“심수간에 있는 동안 뭘 했지?”
“진강 형님께선 매일 운란 공자님과 장기를 두셨고, 나머지 시간엔 상처를 회복하느라 누워계시던 게 전부입니다. 심수간은 바깥으로 소식을 전할 수가 없는 곳이었지요.”
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배는 어느새 호수 한중간에 다다랐다. 그러자 한참 물장난을 치던 원앙들이 배를 보고 깜짝 놀라 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마침 바깥을 보던 연석이 그 원앙들을 보며 고요히 입을 열었다.
“다들 짝을 이뤄 다니는 원앙을 보고 금슬 좋다는 말을 하던데, 저 작은 동물들도 뿔뿔이 흩어지는 걸 보니 금슬을 상징할 만한 동물은 못 되는 듯해.”
연석의 말에, 이목청이 실소했다.
“북제를 다녀오더니 아는 게 아주 많아지셨군. 일전엔 이런 분야라면 질색을 하더니 엄청 섬세해졌어.”
연석은 짧게 한숨을 내쉰 뒤 진옥에게 말했다.
“이 연꽃이 대체 뭐가 볼만하다는 건지, 참. 폐하, 한번 본 걸로 됐으니 그만 돌아가시지요. 미래 조정을 위해 힘쓰게 할 신하를 이리 굶겨서는 아니 되지 않겠습니까.”
진옥이 웃으며 사방화를 향해 물었다.
“더 보고 싶으면 다른 배에 태워 이들을 먼저 돌려보내겠소.”
“괜찮습니다. 돌아가겠습니다. 연꽃이 참 예쁘게 피긴 했습니다, 어차피 며칠 후면 다 져버리겠지만요.”
“두 달 뒤면 계수나무 꽃을 볼 수 있을 거요. 계절 꽃은 계절에 맞춰 감상해야하니 져버리면 내년에 다시 또 보면 되지.”
“맞는 말씀이십니다.”
사방화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옥이 곧 뱃머리를 돌려 돌아가도록 명했다.
진옥은 호숫가에 다다라 어화원 전망대에 점심 식사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다들 식사하며 군 보급품 마련과 장병 이야기, 또 즉위 후에 백성들을 위해 내놓아야 할 정책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식사 후, 이목청, 연석, 최의지는 황궁을 나섰고, 진옥은 사방화를 배웅해준 뒤 밀린 상소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 * *
연석은 황궁 문을 나오자마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을 발견했다.
영강후 부인과 연람이 서있었다. 이들은 무려 반 년 간을 만나지 못한 가족이었다. 연석은 어머니의 부른 배를 보고 잠시 멍하게 있다가 서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머니.”
후 부인은 마치 아주 오랜 세월 끝에 아들을 다시 만난 것처럼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집에서 기다리지 않고 나오셨어요? 더위라도 먹으면 어쩌시려고요. 람아, 어찌 말리지도 않고 여기까지 같이 온 것이냐.”
연석이 바로 후 부인을 부축해주며 연람을 나무랐다. 그러자 연람이 연석을 째려보며 말했다.
“오라버니, 드디어 돌아왔네요. 오라버니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어찌 집에서만 기다리고만 계시겠어요? 말리려 해도 소용이 없어 끝내 올 수밖에 없었어요.”
“우선 부로 돌아가자.”
후 부인은 마치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 같은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젠 우상부 공자 이목청과 병부시랑 청하 최씨 둘째 공자 최의지와 함께 있어도 한 치의 손색도 없이 훌륭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늠름한 모습으로 돌아온 아들을 보니, 후 부인도 여태 자신이 해왔던 행동들이 부끄럽게 느껴져 다시 한 번 진심으로 뉘우치게 됐다.
“누이를 뭐라고 하진 말거라.”
후 부인이 기쁘고 뭉클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연석도 고의로 연람을 나무란 것은 아니었기에, 우선 뒤돌아 이목청과 최의지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자 이목청, 최의지도 웃으며 후 부인에게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올린 뒤 연석, 연람, 후 부인 세 가족이 마차에 올라타는 것까지 지켜봐주었다.
세 사람이 떠나자 이목청이 최의지에게 물었다.
“부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영친왕부로 가시겠습니까?”
“우선 영친왕부로 가겠습니다. 고모님께서 사촌 형님 소식만을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나도 영친왕부에 들렀다 갈 참이었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두 사람은 함께 영친왕부로 향했다.
* * *
영친왕부에서도 영친왕, 영친왕비가 이목청, 연석, 최의지가 경성에 돌아와 황궁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나왔다는 소식에 마침 사람을 불러 그들을 부르려던 참이었다. 그때 마침 이목청과 최의지가 도착했다.
영친왕비는 두 사람을 보자마자 거의 숨도 쉬지 않고 질문을 쏟아냈다.
“목청, 의지. 강이는 어찌 같이 오지 않은 것이냐?”
이목청과 최의지는 일단 영친왕비에게 예를 갖추고, 최의지는 진강이 심수간에서 나와 그들과 헤어진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영친왕비는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혼자서 대체 어딜 간 것이냐? 정말 어딜 간다고 말해주지 않았어?”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을 보고, 영친왕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이 잠시도 어미 마음을 편하게 두질 않는구나! 그럼 심수간에 있는 동안 선황폐하께서 승하하셨단 얘기는 듣지 못했던 것이야?”
“바깥에서 일어나는 소식을 전해주는 이가 있어 모두 전해 들었습니다. 사촌 형님께선 선황폐하께서 승하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남진 강산이 이 모양이 됐으니 서둘러도 늦었다고 하시다가 끝내 다른 곳으로 향하셨습니다.”
영친왕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계속 잠자코 말을 듣던 영친왕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 근데 어찌 심수간에 계속 있었던 것이냐?”
최의지도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형님께선 심수간에 머무르시더니 갈 생각을 않으셨습니다. 운계, 목청 공자님이 떠나시니 그제야 심수간을 나오셨고요.”
“임안성이 위기에 빠진 데다 북제에 군사의 움직임이 보이는 데도 계속 심수간에 머물고 있었다니 참으로 알 수가 없군. 그냥 강이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겠구나. 그래, 언제쯤 일을 마치고 돌아온단 말은 없었고?”
최의지가 고개를 가로젓자 영친왕이 다시 또 물었다.
“그럼 황상의 즉위와 황후 책립에 대한 일은 알고 있느냐?”
“예, 심수간을 나오면서 들었습니다. 온 세상이 새 황제폐하와 방화 아가씨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합니다.”
최의지의 답에, 영친왕비가 벌컥 화를 냈다.
“사람들은 어찌나 이야기하길 좋아하는지, 아직 확정되지도 않은 일을 퍼트리기 바쁘구나!”
“새 황제 즉위도 황후 책립도 다 큰일이니 소문이 활발한 것도 정상이지.”
영친왕의 말이 끝나고, 영친왕비가 문득 최의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일을 듣고 강이 표정이 어땠는지 기억나느냐?”
최의지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목청을 살짝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이목청이 대신 대답했다.
“웃었던 것 같습니다.”
“뭐라?”
영친왕비가 깜짝 놀랐다.
이목청이 다시 최의지를 바라보자, 최의지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말 웃었던 것 같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구나!”
평생 키워온 아들이지만, 영친왕과 영친왕비 모두 이해가 가질 않았다.
부부는 여태 반나절 간이나 사태를 파악하려 애썼지만 들려오는 소식은 오직 진강이 평안히 심수간에서 머물렀다는 사실뿐이었다.
진강이 왜 곧장 경성으로 돌아오지 않고 따로 무슨 일을 하려는 건지도 전혀 알 수가 없는데, 진옥과 사방화의 일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진강과 쭉 함께 있었던 최의지와 이목청을 만났지만 끝내 이렇다 할 소식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나마 부부를 안심시켰던 것은 진강이 진옥의 즉위와 사방화를 황후로 책립하려한단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있으니 이제 남은 일은 모두 진강에게 달린 것이다. 이는 애초에 그 누구도 나서서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잠시 후, 영친왕비가 이목청에게 물었다.
“목청, 궁에서 방화를 봤지? 평소에 가깝게 잘 지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목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봤습니다.”
“네가 보기엔 방화가 어딘가 달라졌다고 느낀 점은 없었니?”
영친왕비의 물음에, 이목청은 다시 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 대하는 태도가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전엔 폐하를 극도로 싫어해 항상 냉담한 태도로 대했었는데 지금은 말투도 따뜻해졌습니다. 우스갯소리도 섞어가며 대화를 나누는데 예전이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이내 영친왕비의 얼굴에 짙은 근심이 드리웠다.
“강이와 성격이 맞지 않는단 걸 알고 황상에게 마음을 준 것인가? 하긴 방화와 황상은 다 따뜻한 구석이라도 있지, 우리 강이는……. 아휴.”
“선황폐하께서 승하하신 데다 현 폐하께서도 사씨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고 하신 말씀을 듣곤 화해를 하신 듯합니다. 어쨌거나 방화 아가씨 약점은 사씨였으니 말입니다.”
“그러길 바라야지.”
영친왕비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목청, 최의지는 그 후로 한 시진이 넘어가도록 영친왕부에서 머물다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이 떠나고, 영친왕비는 진지한 눈빛으로 영친왕을 바라보았다.
“우리 강이는 절대 한 곳에서 가만히 머물 인물이 못 돼요. 심수간을 떠나지 않았던 데는 분명 이유가 있는 겁니다.”
영친왕도 고개를 끄덕였다.
* * *
연석이 후부로 돌아온 이날, 영강후도 마침 진옥에게서 도맡은 일을 마무리하고 황궁으로 돌아왔다.
영강후는 성에 들어오자마자 얼른 연석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진옥에게 먼저 보고를 해야 하기에 꾹 참았다.
처분 결과 3황자와 5황자는 서민으로 강등됐고, 류 태비와 심 태비는 황릉에 남아 역대 황제와 선황제를 받드는 명을 받게 되었다.
진옥은 결과에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영강후에게 말했다.
“그래, 영강후. 수고 많으셨네. 연석이 돌아왔으니 어서 돌아가시게.”
“황송합니다, 폐하!”
영강후도 만족하는 진옥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궁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영강후부에선 부자의 상봉이 이어졌다. 영강후는 부인만큼 기뻐하며 흐느껴 울진 않았지만, 역시 아들의 달라진 모습을 보며 뿌듯해했다.
* * *
이튿날 아침, 진옥은 조회에서 대신들과 의논 끝에 막북 변경에 병력을 지원하는 일은 잠시 연기해두기로 했다. 더불어 돌아온 이목청과 연석을 중용하겠단 뜻을 밝혔고 대신들도 물론 이에 대해 아무 이견이 없었다.
조회가 끝나고 소천자는 성지를 가지고 우상부와 영강후부를 다녀갔다.
이목청은 한림원에, 연석은 이부에 소속됐다. 진옥은 아직 이 둘에게 구체적인 관직을 내려준 것은 아니었지만 앞으로 군 보급품을 마련하는 일에 있어선 두 사람에게 모든 선택권을 주도록 분명히 해두었다.
성지가 내려지자 조정 관원들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이목청, 연석이 각자 자리에 오른 건 진옥이 곧 두 사람을 중용할 것이란 예고와 같았다. 구체적 관직은 없어도 황제를 대신해 일을 처리할 테니 한림원과 이부 대인들은 각자 두 사람의 뜻을 따라 협조해주어야 했다.
이렇게 조정엔 이목청, 연석이란 힘 있는 대인 두 사람이 늘어나게 됐다.
한편, 조정 절반이 넘는 대신들은 이 결과가 뜻밖이란 생각을 했다.
어려서부터 이목청은 진옥이 아닌 진강과 더 가깝게 지내던 벗이었고, 연석 역시 진강의 오랜 벗으로서 줄곧 진옥을 고깝게 여기던 인물이었다.
진옥이 이 두 사람을 중용한 것도 의외였지만, 두 사람도 기꺼이 직무를 맡는다는 것이 더 의외로 느껴졌다.
거기다 진강은 내내 이들과 함께 있다 결국 아무런 소식도 없이 행방불명이 된 상태 아니던가.
그리고 그 진강의 아내였던 영친왕부 소왕비 사방화는 현재 황궁에 머물며 즉위식과 함께 황후 책립을 하겠다는 계획도 큰 차질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조정에 잔뼈가 굵은 대신들은 이제 자신들도 다 나이가 들어 젊은 세대들이 이끄는 새로운 나라를 이해하기 힘든 것이라며 멀리 넘겨짚기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