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3화 (773/978)

773화 꽃구경으로 마음을 달래다 

진환이 떠나고, 진옥이 사방화를 보며 물었다. 

“실로 독충술에 걸린 것인가?”

사방화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독충이었소?”

“혈충입니다.”

진옥은 돌연 어리둥절해졌다.

“목숨을 위협하는 매술의 일종인가?”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다시 가로저었다.

“매술의 일종이긴 하나 목숨을 위협하진 못합니다. 이런 종류의 독충술은 전문적으로 피를 먹여 벌레를 키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음년, 음월, 음일, 음시에 태어난 여자아이 몸에 벌레를 넣었다가, 1년 뒤에 꺼내 양년, 양월, 양일, 양시에 태어난 사내아이 몸에 넣어 49일 동안 키우는 것이지요.”

진옥은 곧장 미간을 세게 찌푸렸다.

“다 키워낸 다음은? 그 벌레엔 어떤 효과가 있는 거지?”

“심장의 기력을 채워줍니다.”

사방화의 말에 순간 진옥은 넋을 잃었다. 

잠시 후, 진옥이 다시 입을 뗐다.

“진환의 몸에 있는 벌레는 얼마나 된 것이오?”

“한 달 남짓 됐습니다.”

“49일이 되면 스스로 나오는 건가?”

사방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군가 직접 매술을 써 빼내야 합니다. 만일 제시간에 빼내지 않을 시엔 숙주의 몸속에 녹아들게 되고, 숙주는 상한 기력을 단번에 회복하게 됩니다. 생명엔 지장이 없지만 매일 정오와 한밤중에 고통을 겪게 되지요.”

진옥은 입술을 깨물었다.

“혈충으로 누가 손을 쓴 건지 추측할 수 있겠소?”

사방화가 담담히 대답했다.

“49일째가 되면 알게 될 것입니다. 이토록 정성스레 키운 벌레니 반드시 누군가 가지러 오지 않겠습니까?”

진옥은 고개를 끄덕이다, 등불 아래 비치는 사방화의 어두운 낯빛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늦었으니 어서 쉬시오.”

하지만 진옥이 방을 떠난 뒤에도 사방화는 계속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아가씨, 밤이 깊었으니 어서 쉬십시오.”

시화가 다가와 쉴 것을 청했지만, 사방화는 문득 다른 질문을 건넸다.

“목청 공자, 연석 소후작, 최의지 시랑. 세 분 다 내일 도착한다지?”

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내일이면 경성에 도착하실 것입니다.”

“언신에게 온 소식은 없었느냐?”

“경성을 떠나신 뒤로 소식을 전하신 게 없습니다.”

“운계 오라버니는?”

시화는 재차 고개를 저었다.

“운계 공자님도 심수간으로 떠나시곤 소식이 없으십니다. 며칠 전 강 소왕야, 이 공자님, 연 소후야와 최 시랑께서 경성으로 오시는 중이란 소식을 들었고, 운란 공자님께선 함께하지 않으셨다고만 들었습니다.”

사방화는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으로 향했다.

“그래, 너도 어서 가서 쉬어.”

시화는 마지막까지 사방화를 침상에 눕혀주고 불을 꺼준 뒤 방을 나섰다.

* * *

이튿날 아침, 사방화는 약방문을 내 시화에게 건네주었다.

“이대로 약을 달여서 일주일간 매일 정오와 자시(*子時: 밤 11시 ~ 새벽 1시)에 진환에게 먹여줘. 반드시 정해진 시진에 맞춰 마시게 해야 한다.”

시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염려 마십시오. 품죽은 기억력이 좋으니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화는 약방문을 들고 바로 물러났다.

진옥은 아침 조회를 마치자마자 침궁으로 돌아와 제일 먼저 진환을 한번 살펴본 뒤, 사방화의 방으로 왔다.

사방화는 진옥의 뒤로 상소 한 무더기를 들고 오는 소천자를 발견했다. 곧 그녀의 얼굴엔 저게 다 무엇이냐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에 진옥이 웃으며 운을 뗐다.

“그대가 하루 종일 전 내에만 있는 게 답답하진 않을까 싶기도 하고, 나도 이 많은 상소를 혼자 읽자니 진절머리가 날 것 같아 이리로 들고 왔소. 서로에게 말동무가 되어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오?”

사방화가 순간 헛웃음을 터뜨렸다.

“전 몸조리를 하는 중이고, 폐하는 이 나라 황제폐하가 아니십니까? 어찌 저와 비교를 하신단 말입니까? 겨우 며칠 만에 이리 답답해하시는데 앞으로 기나긴 세월은 어찌 지내려 하시는 것이옵니까?”

그러자 진옥이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당신이 말했듯,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앞으로 어찌 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것 아니겠소?”

사방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내 진옥은 탁자 앞에 앉아 소천자에게 손짓했다.

“모두 여기 올려 놓거라.”

소천자는 탁자 위에 상소를 올려두고 슬그머니 밖으로 향했다.

진옥은 상소를 펼쳐 목차를 훑으며 한 권을 읽어내려 가더니, 맞은편에 앉아 차를 마시던 사방화에게 말했다.

“그대도 좀 도와주시오.”

“폐하께서 하셔야 할 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한 사례도 있소.”

“어리석고 우둔하신 제왕이나 그런 일을 하시겠지요.”

진옥은 미간을 문지르며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 앞에선 게으름도 피울 수 없군.”

이내 사방화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제가 정사에 관심이 있을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정사에 대해 잘 알긴 하지만 관심이 있는 건 아닙니다.”

진옥이 실소했다.

“관심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틀렸군.”

사방화는 아무 말도 잇지 않았다.

조용한 방 안, 진옥이 천천히 운을 뗐다.

“천하 모든 사람이 황제는 가장 귀한 대접을 받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편히 살 거라 생각할 것이오. 하지만 조정은 무미건조하고, 금의는 오래 앉아 있으면 척추가 아파 그다지 편하지도 않소. 역대 선황폐하들과 아바마마께선 평생을 어찌 버텨 오신 것인지 모르겠더군.”

“아직 즉위도 하시기 전인데 벌써부터 그리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앞으로 남은 생활은 어찌 견디시려고요.”

사방화가 미간을 찌푸리자, 진옥이 붓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내가 꼭 한평생 살아가리란 법은 없지 않겠나? 아, 자질구레한 일에 시달리느라 진절머리가 나니 어화원이나 가지. 어화원에 벌써 연꽃이 피었다던데 뱃놀이나 하러 가지. 지금 가지 않으면 모두 다 져버릴 것이오.”

그러자 사방화가 탁자 위에 한껏 쌓인 상소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다 어떡하시려고요?”

“점심 먹고 다시 하면 되오.”

“오후엔 목청 공자, 연석 소후작, 최의지 시랑이 돌아옵니다. 제일 먼저 황궁을 찾아올 텐데 남는 시간이 있으시겠습니까?”

“그럼 저녁에 하면 되오. 방화, 어찌 이리 말이 많은 것이오? 어서 가지!”

사방화도 진옥이 어화원에 무척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아,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함께 나섰다.

그에 시화와 시녀들도 마음이 놓였다. 사방화는 경성으로 돌아온 이후 전에만 앉아 단 한 번도 밖으로 나간 적이 없어 늘 걱정이었다. 가만히만 있으면 더 독이 될 수 있으니, 어화원 어여쁜 연꽃들로 사방화의 마음이 위로되길 바랐다.

* * *

침전을 나와 어화원으로 향하는 길, 한여름 불볕더위는 무섭도록 뜨거웠다.

그에 진옥은 사방화를 한번 살피곤 시화에게 분부를 내렸다.

“시화, 아가씨께 어서 양산을 씌워드려라.”

“괜찮습니다! 견딜만합니다.”

“며칠 내내 안에만 있다가 나왔는데 더위라도 먹으면 어쩐단 말이오?”

진옥의 분부에 시화도 사방화가 걱정돼 서둘러 양산을 찾으러 뛰어갔다. 

사방화는 결국 진옥과 자리에 멈춰서 시화를 기다렸고, 잠시 후 시화가 사방화에게 양산을 씌워주자 진옥은 그제야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다, 진옥이 입을 열었다.

“어릴 적 이 어화원을 몇 번이나 거닐었는지 모르오. 걸음걸음마다 아바마마의 후궁에서 서로 아름다움을 빛내던 미인들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지.”

“그 어릴 적부터 폐하의 미인들을 봐오신 것입니까?”

사방화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응, 그런데 그땐 참 이해가 되질 않았어. 아바마마를 향한 어마마마의 마음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셨는데, 아바마마께선 어찌 그 수많은 여인들을 한 마음에 품으실 수 있는 것인지…….

자라면서야 차츰차츰 알게 됐지. 아바마마는 평생 단 한 명의 여인을 사랑하셨지만, 그게 우리 어마마마가 아닌 것뿐이었소.

그거 아시오? 백모님께서 할마마마를 뵈러 황궁을 찾으실 때면, 아바마마께선 늘 모든 일을 다 제쳐두고 황급히 할마마마가 계신 곳으로 가셨었소. 벌써 일찍이 할마마마께 문안인사를 다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바마마께선 평생 백모님을 너무도 연모하시어, 친아들인 나보다도 백모님의 아들을 더 총애하셨소. 그 아이는 어려서부터 할마마마, 백모님의 엄청난 귀애를 받았고, 그것을 보고 대신들과 후궁 비빈들조차 늘 그 아이에게만 웃음 짓고 굽신거리기 바빴지.

이 드넓은 황궁에 진정으로 하늘같은 총애를 받는 아이는 진강 하나뿐이었소. 정말 이 황궁에 있는 유일한 적통 황자는 난데, 매번 진강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었지.

그렇게 난 어느새 진강을 탐탁지 않게 여기기 시작했고, 진강도 그런 날 더 못마땅하게 여겼소. 그러다보니 방화 그대와 나도 서로를 싫어하는 지경까지 이르러 원수가 된 셈이었지.”

사방화는 잠시 멈칫하며 섰다가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지금껏 그분께 싫어하는 이유를 물어보신 적은 있으십니까?”

“그 거만한 모습을 보고 어찌 물을 마음이 들겠소? 어차피 세상에 그 아이가 좋아하는 사람도 몇 없소. 피차 서로 싫어하는 사이니 더 볼 것도 없지.”

사방화도 결국 웃음이 터졌다.

“그 분께서 좋아하는 사람은 정말 몇 없긴 합니다. 하지만 가장 싫어하는 분은 바로 폐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옥도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대체 이유를 알 수가 없더군. 기회가 되면 한번 물어나 봐야겠네.”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했다.

오늘 사방화와 진옥은 오솔길이 아닌 황후와 비빈들이 다니던 길로 걸었다. 하지만 어화원에 다다를 때까지도 궁녀는커녕 태감과 비빈들의 그림자조차 보이질 않았다. 평소와는 다른 느낌에 사방화가 고개를 들어 질문했다.

“폐하, 그런데 어찌 아무도 보이질 않는 겁니까? 날이 아무리 덥다고 해도 조금 이상한 것 같습니다.”

“아, 당신에게 말하는 걸 깜빡했군. 엊그제 아바마마의 비빈들을 다 다른 곳으로 보냈소.”

“네? 어찌 하셨단 말씀이십니까?”

“황자, 공주들에게 모두 부를 세우도록 해 태비들을 그곳에 머물게 했소. 슬하에 여식이 없고 황궁에 남고자 하는 비빈들은 서궁원으로 보냈고. 또 궁을 나가고 싶어 하면 모두 내보내고 갈 곳이 없으면 비구니 암자로 보냈소.”

“궁녀들과 태감은요?”

“모두 다 똑같이 했지.”

“그럼 지금 동궁원에 아무도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여기저기 고개를 돌리는 사방화를 보고, 진옥이 미소를 지었다.

“응, 당신이 조용한 곳을 좋아하니 모두 내보냈소.”

이내 사방화가 진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폐하, 예로부터 제왕은 3궁 6원에 72명의 비빈을 두셨습니다. 선황폐하의 사람들은 내보내도 좋으나, 즉위 후엔 다시 새로운 사람들을 들이십시오.”

진옥은 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필요 없소. 지금 아주 조용하고 좋은데, 뭐. 나도 시끌벅적한 건 싫소.”

사방화는 아무 말이 없었다.

“갑시다. 배는 저기 있다오.”

진옥이 가리킨 곳엔 호수 중앙에 큼지막하게 핀 연꽃들이 보였다.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호숫가로 내려가 배에 올라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