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1화 당신이 있어 다행입니다 (2)
“무슨 일인지 말씀해보십시오, 폐하.”
진옥도 다시 손수건을 집어넣고 자리에 앉아 말했다.
“좌상이 말하길, 북제가 병력을 증강한다면 왕귀의 20만 병마로 버틸 수 있는데 한계가 있을 테니, 부대의 통솔자를 정해 막북으로 지원을 보내야 한다고 했소. 곧 목청이 돌아올 테니 목청을 막북으로 보내자고 하더군.”
사방화가 인상을 찌푸렸다.
“좌상께서 그런 말씀을 했다는 겁니까?”
진옥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방화는 입술을 깨물며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서산 군영의 병마를 쓴다고요?”
“서산 군영을 제외하곤 근처에 동원할만한 군이 없소.”
사방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됩니다. 서산 군영의 병마를 써선 안 돼요.”
결연한 사방화의 눈빛을 보고, 진옥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왜 그러는 것이오?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라도 있는 것인가?”
“네. 북제 군의 움직임은 아주 시기적절했습니다. 막북 30만 병마와 임안성 주변의 20만 병마까지 합치면 50만 병마, 많지도 않지만 결코 적은 수도 아닙니다. 오라버니와 왕귀의 힘으로 어느 정도는 북제 군을 막아낼 만하지요. 하지만 경성 근처 요충지의 병마까지 썼다가, 누군가 그 틈을 타 경성에 난을 일으키면 그건 어찌 감당해내실 것입니까?”
진옥이 멍하니 사방화를 쳐다보았다.
“누군가 경성에 난리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럴 리 없다고는 말씀 못 드립니다.”
진옥의 안색이 굳어졌다.
“당신, 나, 언신 공자, 운계 공자가 힘을 합쳐 구곡산에서 죽인 자들도 꽤 되잖소. 그런데 아직도 더 남아 있다고?”
“어쨌든 만일을 대비해 준비는 해두셔야 합니다. 경성 서산 군영의 병마는 요충지에서 황성을 지켜내도록 훈련을 받아온 부대이니, 저 멀리 막북에 있는 전쟁터에 나가는 데는 적절치 못합니다.”
“일리 있군. 그럼 어디서 병마를 동원해야 한단 말이지?”
사방화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다른 방법을 쓸 생각은 않으시고 왜 굳이 부대를 동원하려 하십니까?”
“좋은 대책이라도 떠오른 것인가?”
“변경의 화는 북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북제의 도성에 내란이 일어난다면 제언경 황자가 어떻게 나올 것 같으십니까?”
“지금 북제의 도성을 뒤흔들자는 말이오……?”
사방화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옥은 천천히 눈동자를 굴리며 느리게 입을 뗐다.
“거리가 멀어 그리 쉽진 않을 듯하지만…… 영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예, 폐하. 막북으로 쫓겨나셨을 때 북제에도 가보셨지요? 게다가 남진 황실에서도 분명 북제에 심어둔 정탐꾼들이 적지 않게 있을 테니, 이럴 때일수록 적시에 이용해야합니다.”
진옥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방화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소식을 전하기만 하던 이들이라 큰 난리는 일으키진 못할 텐데.”
“소식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만약 북제 폐하께서 생각을 바꾸셔서, 운계 오라버니께 황위를 물려줄 수도 있단 얘기를 퍼뜨린다……. 이를 제언경 황자가 듣게 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다급해지지 않겠습니까? 그 와중에 변경에 군사를 움직일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요?”
진옥이 웃음을 터뜨렸다.
“부리나케 북제 경성으로 돌아가겠지.”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언경 황자가 북제 군영을 떠나게 만들어 남진이 충분히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고 요충지가 아닌 다른 곳에서 병력을 모으는 겁니다. 북제의 움직임이 너무 갑작스러웠던 터라, 내우외환의 시기에 아무리 뛰어난 장군과 사병들이 상대해도 모두가 손해를 볼 것입니다. 하지만 충분한 준비 시간을 거쳐 동등한 위치에 선다면 북제는 이제 상대도 안 될 겁니다.”
진옥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화, 그대도 참……. 그대가 곁에 있어 다행이오.”
사방화도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유겸왕야께서 영친왕야의 생신 연회로 경성에 오셨을 때도 선황폐하께선 유겸왕야를 중용하진 않으셨습니다. 지금껏 쉬고만 계신 유겸왕야를 잊으신 건 아니시지요? 어찌 쓰실 생각이십니까?”
진옥이 눈을 가늘게 떴다.
“유겸왕숙이 정녕 쓸 만한 분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소. 유겸왕부가 경성으로 와 해왔던 것들은 내 예상과는 너무 달랐으니 말이지. 난 영친왕부의 충심은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으나, 유겸왕숙에겐 믿음이 가질 않소.”
“그럼 영남의 병마를 이용해 유겸왕야를 시험해 보는 건 어떠십니까? 영남에서도 사병을 양성한다던데, 그 수가 많진 않아도 족히 백은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냥 겉모습으로만 판단할 순 없으니 직접 확인해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진옥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유겸왕숙더러 입궁하시라 하겠네.”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진옥이 소천자에게 유겸왕을 불러오라 명하자, 유겸왕은 바로 소식을 전해 듣고 깔끔히 목욕을 한 뒤 옷을 갖춰입고 황궁으로 향했다.
진옥은 유겸왕에게 그간 경성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를 물었고, 유겸왕은 질문에 하나하나 성실히 대답했다.
“왕숙의 손자는 아직 행방이 묘연합니까? 아바마마께서 위독하셨던 데다 경성에 여러 일로 정신이 없어 그간엔 신경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아바마마께서 승하하시고 나니 이제야 생각이 났군요. 아직 종적조차 찾지 못했다면 천하를 뒤져서라도 아이를 찾아드리겠습니다.”
유겸왕은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진옥은 늘 변함없이 온화해보였으나, 이제 황제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전보다 더 위풍당당해진 모습이었다. 그 알 수 없는 위압감에 유겸왕은 털썩 무릎을 꿇고 외쳤다.
“신이 죄를 지었습니다!”
진옥이 눈썹을 들썩이며 의아하단 눈초리로 물었다.
“무슨 죄를 지으셨단 것입니까?”
“신은 손자를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뭐라? 왕숙모님이 울며불며 손자를 잃어버렸다고 경성에 절반이 넘는 부랑을 찾아다니며 모두를 놀라게 하셔놓고, 이제와 아이를 잃어버린 적이 없다고? 왕숙, 대체 이게 무슨 뜻입니까?”
진옥의 안색은 급격히 어두워졌고, 유겸왕은 더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 누군가 신의 부인에게 찾아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집안을 몰살할 것이고 한평생 경성에 발 들일 생각조차 하지 말라며 협박을 해왔습니다. 폐하께서도 신과 부인이 얼마나 경성을 그리워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 협박에 그만…….”
“어쩔 수 없이 손자를 잃어버렸다고 거짓을 퍼트렸단 말입니까!”
진옥이 크게 화를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내 유겸왕은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아이를 잃어버리긴 했습니다. 제 손자와 같은 또래인 유모의 아이를…….”
“왕숙, 정녕 간이 배 밖으로 나오신 겁니까? 짐이 태자자리에 있을 때 경성에 머무를 수 있게 해달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런데 이 큰일을 저질러놓고 짐을 속였다? 짐이 묻지 않았으면 한평생 숨길 작정이었습니까!”
유겸왕은 덜덜 떨며 다급히 변명을 시작했다.
“폐하! 왕비가 궁에 들어 이리저리 알리고 다녔을 당시 신 또한 그 사실을 알지 못했사옵니다. 신과 아들놈이 함께 다급히 손자를 찾아다니는 모습을 보고는 며칠이 지나서야 사실을 고하더군요. 그때 폐하께선 치수를 하러 경성을 떠나셨을 때라 더욱 아뢸 수도 없었습니다.”
진옥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왕숙, 지금 짐에게 집안 단속을 잘하지 못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럼 짐이 왕숙모를 내쫓도록 명을 내려드리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유겸왕이 깜짝 놀라 말했다.
“폐하……!”
“진즉 알고 있었던 겁니까, 정말 몰랐던 겁니까? 아니면 암암리에 다른 계획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왕숙과 왕숙모님 두 분 다 형부와 대리사에 넘겨 심문을 받게 해야 진실을 말씀하시겠습니까?”
순간 유겸왕의 이마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급기야 유겸왕은 무릎까지 꿇고 진옥의 옷자락을 잡고 통곡을 했다.
“폐하! 폐하를 향한 신의 충심은 하늘과 땅이 알고 있는데 어찌 폐하께서만 몰라주시는 것입니까! 부인은 경성에 머물고 싶다는 마음으로 신에게조차 사실을 숨기며 어리석은 행동을 했을 뿐입니다. 제가 알았을 땐 경성은 이미 여러 사고들로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고, 폐하께선 그때 임안에 계셨습니다.
선황폐하의 병세도 위중하셨고, 폐하께서 돌아 오시자마자 선황폐하의 장례 준비와 막북 변경 전쟁으로 쉴 새 없이 바쁘셨지요.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 경성이 평온해졌기에 그냥 이 일을 덮어버리려 했던 것입니다…….”
진옥은 유겸왕이 정말 본인의 신분까지 잊고 이렇게 무릎을 꿇고 눈물, 콧물을 쏟아내는 것에 마음이 약해지려했다. 진옥이 아무리 황제가 됐다고 한들 유겸왕은 그의 숙부가 아니던가.
이처럼 모든 걸 내려놓고 애원한다는 건 유겸왕의 형제들이자 같은 황손인 선황제도, 영친왕도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겸왕은 계속해서 울며불며 애걸했다.
“폐하! 영남이 아무리 좋다 한들 경성보다야 좋을 리 있겠습니까? 신 어릴 적부터 경성에서 자라왔기에 연고도 없는 영남에서 늙어 죽고 싶지 않습니다. 부인을 잘 타일렀으니 신의 자백을 생각하셔서라도 용서해 주십시오!”
진옥이 곧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럼 대체 누가 왕숙모님을 협박했다는 겁니까?”
“몇 번이고 물었지만 검은 옷을 입었다는 말뿐이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라 하였사옵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협박당해 그런 짓을 했다고?”
진옥은 안색을 굳히며 유겸왕을 바라보았다.
“신의 손자를 데려가지는 않았으나 몸속에 독을 넣어 말을 듣지 않으면 손자의 목숨은 끝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독?”
“독충술입니다. 아직 아이가 어떤 상태인지 보지 못해 잘 모릅니다.”
“아이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언성에 있습니다.”
진옥이 미간을 찌푸렸다.
“폐하, 하늘과 땅에 맹세할 수 있습니다. 폐하께 감히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대체 배후에 숨은 자가 누구기에 경성 안팎으로 이런 일들을 벌이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제 손자를 가지고 대체 뭘 하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왕숙이 오신 후로 경성은 줄곧 평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정녕 짐에게 아무것도 숨기는 게 없다고 확언하실 수 있습니까?”
유겸왕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없습니다. 신이 숨기는 게 있다면 하늘의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본래 옛사람들은 맹세를 가장 중시했다. 그에 진옥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유겸왕에게 물었다.
“그럼 짐이 묻겠습니다. 영남에 양성 중인 병사가 몇이나 됩니까?”
“5만 명입니다.”
“겨우 5만이라고?”
유겸왕이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 실로 5만뿐입니다. 선황폐하께서 오래도록 영남을 감시하시며 사씨가 없었다면 일찍이 영남을 뒤흔들었을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하여 신도 어느 날 선황폐하께서 영남을 치실까 두려워 사병 준비만 해둔 것뿐입니다.”
“짐이 들은 건 5만이 아니었는데.”
“폐하, 신의 손엔 정말 5만 명의 사병뿐입니다. 다른 이의 사병을 신의 사병에 더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응? 누가 영남에 사병을 키우고 있단 말입니까?”
유겸왕은 이제 거의 숨이 넘어갈 듯 울고 있었다.
“누군지는 알지 못합니다만, 영남의 깊은 산 속에 병마들을 숨겨두었다기에 암암리에 사람을 보내 알아봤으나 모두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얼마나 됐습니까?”
진옥의 안색이 굳어졌다.
“거의 8, 9년 정도 되었습니다.”
유겸왕도 확신이 없는 듯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8, 9년?”
진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신도 2년 전에야 우연히 알게 된 사실입니다. 그 후 신이 보낸 이들이 모두 돌아오지 못해 한 번 더 보내려는데 누군가 신에게 밀서 한 통을 보냈습니다. 계속 쓸데없이 참견하면 제게 떨어지는 콩고물도 없을 거라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