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9화 조당에서 소란을 피우다 (2)
영친왕비가 거세게 좌상을 노려보았다.
“좌상의 입담은 날이 갈수록 참 대단해지시는군. 나랏일이라? 황제 즉위가 나랏일인 것쯤은 한낱 아녀자인 나도 잘 아오! 좌상께서 지금 기를 쓰고 황후로 추천하시는 방화는 내 며느리요!
난 하루아침에 내 며느리를 이유도 모른 채 잃은 사람이오. 그건 애초에 선황폐하의 휴서 성지 때문이었으니 황상의 황후 책립과 내 집안일이 얽히게 된 셈이지요. 그러니 당연히 따지고 들어야 맞는 게 아니겠소?”
“왕비마마, 억지가 너무 과하십니다. 이미 지나간 일에 더 이해되고 말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방화 아가씨는 자유의 몸이 됐고 폐하와 함께 옥련을 타고 돌아와 지금껏 황궁에 머물고 잇습니다.
왕비마마께서도 그간 방화 아가씨를 몇 번 보셨을 테지만 영친왕부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뜻이 있어 보였습니까? 없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폐하의 나랏일과 집안일은 왕비마마의 집안일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이내 영친왕비가 불길이 치솟는 눈으로 좌상을 빤하게 응시했다.
“좌상! 말끝마다 상관이 없다고 하는데 좌상께선 어찌 이리 황후 책립에 유난을 떠시는 것이오? 난 내 아들에게 휴서 성지가 내려지기 전까진 휴서 성지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소! 그리고 우리 아들은 멀리 나가 지금껏 돌아오지도 못해서 이 일을 처리하지도 못하고 있었지요!
이게 정녕 우리 며느리 하나를 잃은 일이라 할 수 있소? 내 아들은 좌상의 그 채근 때문에 임안성 위기를 해결하려 경성을 떠난 것이오! 그래서 임안성은 지금 위기에서 빠져나왔는데 내 아들은 대체 어디에 있지요? 이런데도 나는 여태 좌상께 내 아들을 찾아내란 말 한마디 하지 않았소!”
결국 좌상도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그렇게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좌상은 잠시 후에야 다시금 또 입을 뗐다.
“왕비마마, 임안성을 위해 흑자초를 찾으러 가신 강 소왕야와 최의지 시랑이 어째서 아직 소식이 없는지는 노신도 정말 궁금합니다. 신이 듣기론 아예 임안성으로 가지 않았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습니다.
지금은 변경에 전쟁이 일어나 내우외환에 빠진 상황입니다. 폐하의 즉위와 황후마마 책립을 서둘러야 조정도 안정되고 자연히 변경의 사기도 북돋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민심도 안정시킬 수 있을 테고요. 신을 비롯한 대신들께선 남진의 미래만을 고심하고 있으니 조급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영친왕비는 살짝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이 강산과 황상을 위해 근심에 사로잡힌 분께서 어찌 변경에는 직접 가지 않으시오? 본래 좌상께선 조정에 일이 생기기만하면 내 아들을 찾아 애걸복걸하고 일만 해결되면 내 아들을 내팽개치기 일쑤셨지.
경성 내외에서 일어난 암살 사건, 군영 살인 사건까지 모두 내 아들이 도맡아 해결하게 한 것도 모자라 임안성 위기까지 처리해달라고 부탁해놓고 이제 일이 다 해결되니 또 하얗게 잊어버리신 게지요? 그리고 이젠 내 며느리까지 뺏어가려 하는 것이오!
시종일관 우리 영친왕부만 이리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데 정녕 이 영친왕부에 나설 이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오? 아녀자인 나도 변경 전쟁을 진정시키는 게 급선무라는 건 잘 알고 있소.
그런데 벌써 두 세대나 조정에 몸담은 좌상께선 어찌 황후 책립만을 그리도 고집하는 것이오? 백성들은 아직도 불안에 떨고 있는데 정녕 지금 그 문제가 이 나라에 제일로 중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오?
본래 민심이 향하는 곳이야말로 세력을 얻을 수 있다했소. 하지만 그 대단하던 좌상께서도 이젠 나이가 들어 현명함도 다 빛이 바랬나보오. 어리석은 잔꾀나 부릴 줄 아는 좌상 같은 분이 황상을 보좌하다간 이 남진 강산이 어찌 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겠소.”
좌상은 다시 또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사 후작은 변경에서 혈전을 벌이고 있고, 강 소왕야와 방화 아가씨는 일찌감치 아무런 사이도 아니게 됐으니 방화 아가씨를 황후마마로 책립해 사 후작을 격려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 후작이 변경을 성공적으로 막아준다면 사씨 가문은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영친왕비는 더 이상 좌상과 입씨름을 하고 싶지도 않아 고개를 돌렸다.
“사씨 가문은 태어나면서부터 부귀영화를 누리던 집안이요! 더 이상 무슨 부귀가 필요하단 말이오? 됐소, 어쨌든 황상이 누굴 황후로 책립하시든 방화는 절대 안돼요. 방화는 일찍이 영친왕부가 택한 며느리요. 선황폐하의 휴서 성지든 뭐든 영친왕부는 절대로 이를 받아들일 수 없소. 황상, 정녕 방화를 황후로 책립하시려거든 날 죽이고 책립하세요. 그게 아니면 꿈도 꾸지 마세요.”
“이 어찌…….”
좌상도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들은 영친왕비가 내뿜는 살얼음 같은 위엄에 금방이라도 폭발할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심지어는 몸까지 덜덜 떨려오는 지경이었다.
청하 최씨는 대대로 시서를 이어온 유서 깊은 세가 대족이었다. 그 엄청난 가문의 여인은 이제 황제와 이 남진의 명운을 짊어질 보정왕, 영친왕을 남편으로 두고 천하에 더할 수 없는 권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선황제가 세상을 떠나고 무려 황제의 큰어머니란 이름표까지 더해진 영친왕비, 무엇보다 그녀의 아들이 바로 세상에 적수가 없는 진강이 아니던가.
영친왕비는 그만큼 태어난 이래 줄곧 최고의 자리만 걸었던 인물이었다. 그녀가 가진 신분만으로도 세상을 압도할 만큼인데, 당당한 말투와 사내도 감히 어찌하지 못할 패기까지 지녔으니 누가 그녀를 상대할 수 있을까.
그런 영친왕비가 초지일관 가슴이 다 닳도록 며느리 사방화를 찾기 위해 실로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사방화는 이제 영친왕비에게도 단순한 고부 사이를 뛰어넘은 친자식처럼 귀중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문무백관의 으뜸이라 한들, 좌상이 무슨 힘이 있어 영친왕비를 꺾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좌상도 이기지 못할 그녀를 누가 감히 상대할 수 있겠는가.
영친왕비는 진옥에게 자신을 죽이라 으름장을 놨지만, 진옥은 절대 그녀를 죽일 수 없었다. 황제가 큰어머니를 죽인다는 건, 가뜩이나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는 남진에 더욱 큰 풍랑을 일으키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이를 천천히 깨닫기 시작한 대신들은 이내 영친왕비의 총명함에 탄복했다. 기회를 잡아 사람들의 눈과 귀를 헷갈리게 만든 그녀는 선황제를 고소하겠단 명분으로 진옥이 사방화를 황후로 책립하는 것을 막아버린 것이었다.
태후도 천천히 영친왕비를 바라보았다. 오늘 태후는 완벽한 옷을 갖춰 입고 있었지만, 맞은편의 저 영친왕비는 그저 수수한 차림만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영친왕비가 가진 위풍은 결코 화려한 의복 따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허리를 곧게 펴고 하늘과 땅도 두려워하지 않는 저 의연한 눈빛, 영친왕비는 타고나길 위대한 영웅의 기질을 갖고 태어난 인물이었다.
태후는 한평생 그 어느 때도 영친왕비를 절대 이길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태후는 류 태비, 심 태비가 선황제에게 붙어 연명하던 사람이라 비하를 했었지만, 사실 자신도 그녀들과 다를 바는 없었다.
선황제는 세상을 떠났지만, 태후는 그저 두 태비보다 운이 좋아 황제가 된 아들에게 또 의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황실이 아닌 친왕부의 안주인이 된 영친왕비, 하지만 정말 영친왕비가 일국의 국모인 황후보다 못한 인물이라 할 수 있을까. 태후도 그녀가 황태후인 자신보다도 엄청난 여인임을 인정했다.
이내 태후는 상석에 앉은 아들 진옥을 바라보았다. 진옥도 이젠 어찌할 방법이 없는듯했다. 사실 좌상의 말은 진옥의 뜻과도 같았고, 영친왕비가 대치하고 있던 사람 역시 좌상을 통해 뜻을 표명하는 진옥인 것이었다.
책립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그 누구도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이제 다시는 그 결과를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곧 태후가 깊은 숨을 들이쉬곤 영친왕비에게 다가가 말했다.
“형님, 형님과 좌상 말 모두 일리가 있소. 하지만 우리끼리는 단정할 수 없을 것 같으니 방화와 강이에게 결정하도록 하는 게 어떻겠소? 어쨌든 모두 두 아이와 관련이 있는 일이니까요.”
“강이는 아직 경성에 돌아오지도 못하고 있는데 어찌하란 말씀이십니까!”
영친왕비가 화를 냈다.
“그럼 방화를 먼저 불러 보지요.”
태후가 살짝 진옥을 살펴보자, 그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아마도 진옥은 사방화가 이 일에 끼는 걸 원치 않는 것 같았다. 태후도 아들의 마음을 눈치 채고 바로 말을 바꿨다.
“아니면 사람을 보내서 방화의 생각을 들어보지요.”
“핍박받아 말하지 못하는 고충이 있다면 어떡합니까? 전 입에서 나오는 말 따위는 믿지 않습니다. 마음만 믿을 뿐이지요. 방화가 우리 강이를 얼마나 연모했는데 어찌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간단 말입니까?”
“형님, 방화 입에서 나오는 말도 믿지 못하신다면 뭘 믿으실 수 있단 것이오? 이대로 황상의 인연을 막으실 것이오? 형님을 아무도 어찌할 수는 없다지만, 아이들 마음도 생각해 주셔야지요.”
잠시 고요히 숨을 몰아쉬던 영친왕비가 입술을 꼭 깨물고서 말했다.
“우리 강이가 돌아와 황상이 방화를 황후로 책립하는 데에 아무런 이의가 없고 심지어 동의까지 한다면 저도 더 이상 인연이 없다고 믿고 두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땐 제가 가장 먼저 축하 선물을 올리도록 하지요.”
태후는 드물게 나오는 온화한 기질이 있어 심히 사람을 몰아세우진 못했다. 영친왕비도 그래서 이곳까지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영친왕비는 태후가 대전에 들었단 소식을 전해 듣고 분명 황후 책립에 찬성하려고 갔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렇지만 인자한 성정의 영친왕은 당연히 태후를 상대하지 못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직접 이곳으로 왔다. 더 이상 마냥 참기에도 한계가 온 것이었다.
애초에 영친왕비가 진옥에게 바라는 것도 진강이 올 때까지만 기다려달라는 것뿐이었다.
대신들은 말없이 상석의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좌상 역시 고개를 들어 진옥의 안색을 살폈다. 영친왕비의 독한 모습은 그도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매번 저리도 온화한 여인이 아들을 지키기 위해 거침없어 지는 것이 실로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머니, 아니 아버지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바탕 격전이 있고난 뒤 대전은 기이할 정도의 고요함에 빠졌다. 모두는 진옥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진옥이 영친왕비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백모님 말씀도 분명 일리가 있습니다. 짐도 선황폐하께서 휴서 성지를 내리신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짐이 줄곧 방화를 연모해왔다는 것은 백모님께서도 알고 계신 사실이니 당당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혈혈단신이 된 만큼 짐이 즉위하게 되면 당연히 황후로 책립하고 싶었습니다.”
영친왕비는 진옥이 조정 문무백관들 앞에서 당당히 사방화를 마음에 품어왔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진옥의 당당한 태도에 더 이상 그를 책망하기도 힘들뿐더러 방화가 혼자된 것 또한 사실이었으니 형제의 아내를 빼앗았다는 원망을 할 수도 없었다.
“짐의 즉위식까지 기다려드리겠습니다. 즉위식 날까지 진강이 돌아와 이 일을 논하지 않으면 짐은 방화를 황후로 책립하겠습니다. 그럼 충분하지요?”
영친왕비는 천천히 영친왕을 바라보았다.
영친왕은 조당에서 이 난리를 쳤음에도 진옥이 그냥 기다려주겠단 약조만 한 것에 이름 모를 한숨이 나왔다. 거의 안도에 가까운 한숨이었다. 이는 진옥이 정말 가족이라는 정을 생각해 내려준 결정일 터였다.
영친왕비는 다시 속으로 날짜를 세어보았다. 시간이 많진 않아도 진강이 소식을 듣고 곧장 달려온다면 꽤 넉넉한 시간이었다. 영친왕비는 아들의 능력을 굳게 믿고 있었고, 설혹 진강이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이젠 어미로서도 최선을 다했으니 더 할 말은 없었다. 곧 영친왕비가 결연한 빛으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황상. 만약 즉위식 날까지 진강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후한 예를 갖추어 황후를 책립하신 데에 대한 축하를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