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8화 조당에서 소란을 피우다 (1)
진옥은 밤새도록 어서재에서 상소를 읽는데 열중했고, 그의 뒤로 서서히 소리 없는 그림자가 다가와 섰다. 언신이었다.
진옥은 곧장 상소를 내려놓고 뒤돌아 언신을 바라보았다.
“바깥 호위와 은위들에게 들키지도 않고 어서재를 들어오다니 언신 공자 무공도 상당히 뛰어나군. 날 죽이려 마음먹었다면 크게 다쳤을 것이네.”
“황태자이셨을 때보다 경계가 느슨해지셨습니다.”
진옥이 웃으며 말했다.
“언신 공자 외엔 이 어서재로 몰래 들어올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네. 공자가 돌아온 것도 알고, 날 해치지도 않을 테니 몸을 사릴 필요도 없지.”
이내 언신은 문득 의미심장한 말을 뱉었다.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다고 자부하던 분이 주인님을 잃으셨으니 또다시 지지 않게 조심하셔야 합니다. 폐하께선 저만큼 주인님을 잘 알진 못하시겠지만, 폐하의 진심 어린 마음으로 이미 충분합니다. 그래서 주인님께서도 폐하를 선택하신 것이겠지요.”
진옥은 살짝 눈썹을 치켜세우다 미소를 지었다.
“이 밤에 그 말을 하러 날 찾아온 것인가?”
“주인님께서 강 소왕야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천기각의 세력만으로는 막기 힘들 테니 폐하께서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계신다면 힘을 합치는 게 어떻겠습니까?”
“반가운 소리군! 나도 돌아오지 않았으면 했네.”
진옥이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그럼 상의를 마치는 대로 오늘 밤 곧장 움직이겠습니다.”
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상의는 장장 두 시진에 걸쳐 끝났다.
이미 밤이 깊은 시각, 언신은 어서재를 나와 황궁을 완전히 떠났다.
그리고 진옥은 창가로 가 오래도록 짙은 밤안개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폐하, 밤이 깊었으니 어서 쉬시지요.”
소천자가 다가와 진옥을 걱정하자, 진옥이 문득 질문을 던졌다.
“소천자, 법불사 보운 대사께선 뭘 하고 계신다느냐?”
“폐하께 아룁니다. 선황폐하께서 승하하신 후 법불사에선 49재를 치러 선황폐하의 천도를 기원하기 위한 준비로 바쁘다고 합니다. 법불사는 불이 난 이래로 굳게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지만, 선황폐하께서 승하하시자 보운 대사님께서 직접 49재를 주관하시기 위해 나오셨다고 합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진옥을 보고, 소천자가 다시 의아해하며 물었다.
“어찌 돌연 보운 대사님을 찾으시는 것이옵니까? 만나실 생각이십니까?”
진옥이 웃으며 말했다.
“어릴 적 보운 대사께서 짐과 진강에게 형제애에 관한 점을 쳐주셨다. 그것이 문득 기억이 나서. 한때 짐은 보운 대사께서 실로 갖은 수를 써 명예를 얻기 위한다고 생각해 점괘조차 믿지 않았고 형세가 뒤바뀌지도 않길 바랐지. 하지만 이제와 보니 점괘가 맞아 떨어진다는 걸 느끼게 되는구나.”
“방화 아가씨를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진옥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막북에서 돌아오던 나를 죽이려던 방화였는데. 이젠 우리 아우님께서도 그 맛을 한번 느껴보겠구나.”
소천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돌아가자!”
진옥은 어서재를 나와 침전으로 돌아갔다.
한편 사방화는 언신이 황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불을 끈 후 침상에 올랐다.
* * *
이튿날, 조회에선 즉위식에 황후를 책립하는 일로 의견이 분분했다.
그런데 이 시끌벅적한 공간에 뜻밖의 인물이 등장했다. 태후가 나타난 것이었다. 신분이 아무리 높다한들 본래 황실 내명부 여인들은 정치에 관여할 수 없다는 말이 있었다. 그 때문에 태후도 예전에 진옥이 황궁을 불태울 뻔한 일로 딱 한 번 조정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전부였었다.
선황제가 승하하고 역대 두 번째로 조당에 나선 태후, 대신들은 모두 추측하기에 바빠졌다.
곧 진옥이 태후를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어마마마, 들어오십시오.”
잠시 후, 태후가 조당에 들어서자 대신들 모두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다들 극진한 예는 갖췄다.
“태후마마를 뵙습니다.”
태후는 손을 내저으며 대신들을 향해 말했다.
“경들께선 예를 거두게. 황상의 즉위와 황후 책립에 대한 일로 조정이 떠들썩했다 들었네. 선황폐하께서 황상께 선위를 해주셨으니 즉위에 대한 문제는 나무랄 데가 없겠지. 하지만 여인으로서 조정에 참견해선 안 된다는 건 알지만, 황후 책립은 우리 내명부와도 관련 있는 문제니 나도 예외일 순 없다고 생각하는 바네.”
대신들도 태후가 황후 책립 문제로 왔을 거라 추측하긴 했으나 이에 동조를 하는 것인지, 반대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태후는 이여벽을 좋아하고, 사방화를 싫어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이여벽과 진옥은 이미 파혼한 사이인데, 태후는 대체 무슨 의도로 온 것일까?
“선황폐하께선 위중하신 와중에도 황상의 혼사를 걱정했지. 그러다 임종 전, 황상과 방화가 함께 돌아온 것을 보시곤 그제야 마음을 놓고 무사히 떠나실 수 있었다고 생각하네.
때문에 나도 황후 책립에 있어선 논쟁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며 황후의 자리엔 사방화가 적격이라 생각한다네. 중상까지 입어가며 흑자초를 찾아 임안성 수십만 백성의 목숨을 구했으니 품성도 어질고 선량하지 않은가. 국모로서 이보다 훌륭한 귀감이 되는 인물은 없다고 생각하네.”
대신들은 서로를 보다, 이내 말없이 단정히 앉아 있는 황제를 바라봤다.
태후의 태도는 예상 밖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론 예상대로였다. 태후는 영친왕비만큼 아들을 아끼진 못해도 충분히 아들을 아끼는 어머니였다.
태후는 그렇게 처음으로 아들 진옥을 위해 조당에 들어온 뒤로, 다시 아들의 황후 책립을 위해 또 다시 조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는 태후의 위엄으로 대신들의 입을 틀어막은 것이나 다름없는 처사였다.
태후의 말이 끝나도 아무도 입을 열지 않자, 좌상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폐하, 태후마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방화 아가씨께선 재덕을 겸비하셨으니 국모로서 단연 제격이십니다.”
좌상의 말에 대신 절반이 동조를 표했고, 절반은 영친왕의 눈치를 살폈다.
영친왕은 무척 무기력한 얼굴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반대를 표해도 결과가 달라지지 않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태후의 등장은 선황제의 뜻을 대변하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영친왕이 어찌 선황제의 뜻에 반대를 표하겠는가.
또 선황제가 승하하기 전, 사방화가 진옥과 함께 돌아와 선황제의 침전을 지켰던 것도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때, 우상도 앞으로 나와 입을 열었다.
“폐하, 이렇게 된 만큼…….”
“폐하! 영친 왕비마마께서 대전에 드시길 청하옵니다.”
우상이 입을 뗀 순간, 밖에서 누군가 뛰어와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
모두가 놀라 일제히 침묵에 잠겼을 그때, 영친왕이 바로 이야기했다.
“어허! 어찌 조당에 부인들이 하나둘 드나든단 말인가? 들 수 없으니 나를 찾는 것이라면 조의가 끝나고 다시 이야기하자 전해드려라.”
“왕야! 왕비마마께서 검을 들고 계시온데, 폐하께서 윤허하지 않으시면 죽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들어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뭐라? 어찌 저러는 것인지……! 황상, 그냥 왕비를 돌려보내시오.”
영친왕의 말에도, 진옥은 꿇어앉은 이에게 차분히 물었다.
“백모님께서 더 하신 말씀은 없으셨느냐?”
“왕비마마께서 말씀하시길,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으니 선황폐하를 고발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윤허해주시지 않으시면 죽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들어오시겠다고, 그것도 안 되면 북을 쳐 세상에 이 억울함을 알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죽은 선황제를 고발하겠다는 영친왕비의 말에, 대전은 순간 경악에 빠졌다.
이것이야말로 여태껏 듣도 보도 못한 상황이었다.
“또 다른 말씀은 없으셨느냐?”
다시 진옥이 묻자, 그는 몸을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왕비를 모셔오너라.”
영친왕은 정말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부인의 성정을 제일 잘 아는 그가 어찌 불안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영친왕비가 성격대로 물불 가리지도 않고 일을 크게 벌인다면 어찌해야한단 말인가! 종국엔 온 나라 백성이 황실을 우습게 여길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잠시 후, 영친왕비가 정말 검을 쥐고 노여움 가득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조정 오래된 노신들도 오래전 뛰어난 명성을 자랑하던 두 여인을 또렷이 기억했다. 청하 최씨의 최자천과 박릉 최씨 최옥완, 그녀들은 군자들의 문예에도, 당대 대장군들의 무예에도 결코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수려한 미모 외에 여러 뛰어난 능력으로도 수많은 사내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아리따운 두 미인. 그 청하 최씨 최자천은 이렇게 수많은 세월이 흘러 영친왕부의 왕비가 되었어도, 결코 녹슬지 않은 뛰어난 풍모를 자랑했다.
이윽고 대전으로 들어온 영친왕비가 태후를 한번 보곤,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버렸다. 진옥은 바로 영친왕비를 향해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백모님, 대체 무엇 때문에 이리 화가 나신 겁니까?”
황좌에 앉은 진옥의 모습은 역대 남진 제왕의 위엄에 조금도 뒤처지지 않았다. 영친왕비도 그런 진옥을 보며 화를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운을 뗐다.
“황상, 이제 저는 선황폐하를 고발하려 합니다. 제 아들 진강과 며느리 방화는 정식으로 혼인해 서로를 깊이 연모했었습니다. 하지만 선황폐하의 갑작스런 휴서 성지로 하루아침에 갈라서버렸지요.
왕야께선 워낙 마음이 여리고 인자하시어 선황폐하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셨지만, 아들이 우선인 저는 선황께서 승하하셨다 해도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겠습니다.
황상, 부디 선황폐하께서 내리신 휴서 성지를 거두고 제 아들과 며느리의 행복을 되돌려주시길 바라는 바입니다.”
대신들은 일제히 놀란 숨을 들이쉬었다.
영친왕 역시 매우 놀란 듯 눈도 깜빡하지 못했다. 어찌 저리 조목조목 따져가며 선황제를 고소하겠단 수를 생각해낸 것인지, 이는 고금 이래 단 한 번도 역사가 없던 일이었다.
좌상도 마음이 다급해져 곧장 상석을 올려다보았다. 진옥의 눈가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있었다.
곧 좌상은 다시 영친왕비를 바라보며 황급히 말을 이었다.
“왕비마마, 선황폐하께서 휴서 성지를 내리신 건 이미 한 달도 넘게 지난 일입니다. 선황폐하께서 승하하신 지 아직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거늘, 어찌 휴서 성지가 내려졌을 때 고소하지 않고 지금의 폐하께 이러시는 것입니까? 자식은 함부로 어버이의 잘못을 말할 수 없다는 것도 잊으셨습니까? 아무리 조카라 한들, 이미 황위에 오르신 폐하를 얼마나 아래로 보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영친왕비가 좌상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동안 왕야께선 나 때문에 선황폐하의 병세가 위중해지실까 조정에 들지도 못하게 하셨소. 천천히 이야기를 꺼내 합당한 방법을 찾으려 했으나 나도 선황폐하께서 이렇게 빨리 가실 줄은 몰랐지. 그런데 지금의 황상께서 우리 며느리를 황후로 책립하려 하신다니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이렇게 왔소.”
좌상이 말했다.
“선황폐하께선 방화 아가씨가 스스로 경성을 떠난 후에 휴서 성지를 내리셨습니다. 애초에 방화 아가씨도 강 소왕야와 사이가 틀어지지 않은 거라면 어찌 스스로 떠났겠습니까? 왕비마마, 여긴 조당입니다. 폐하께선 내우외환의 시기에 나랏일로 인해 바쁘신 몸이니 집안일을 가지고 조당에 소란을 피워선 안 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