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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4화 (764/978)

764화 새 황제의 위엄 

잠시 후, 진옥이 느긋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영강후, 짐이 알기론 연석 소후작이 남진으로 돌아왔다던데. 들었는가?”

영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해 들었습니다만, 여태 경성에 돌아오지 않아 어디 있는 진 모르는 상황입니다.”

“남진으로 돌아왔으니 다시 떠나진 않겠지?”

“그게……. 소신과 부인도 다시 떠나는 걸 원치 않습니다만, 이제 다 컸으니 제 뜻을 펼친다면 막을 방법은 없사옵니다.”

영강후는 진옥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머뭇거리며 답했다.

“견문이라면 반년 간 넓힐 만큼 넓혔을 테니 다시 떠나진 않겠지.”

진옥이 웃으며 말했다.

“예, 폐하 말씀처럼 연석이 다시 떠나겠다면 제가 연석의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막겠습니다.”

영강후는 계속 진옥의 뜻을 헤아리지 못해 연신 맞장구만 칠뿐이었다.

“마침 조정에 등용할 인재가 필요한 시기인데, 연 소후작의 다리가 부러져 버린다면 짐은 문무를 겸비한 인재 하나를 잃어버리는 게 아니겠는가?”

영강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진옥을 바라보았다.

“폐하의 뜻은…….”

“연 소후작이 돌아오는 대로 중용할 테니, 영강후도 더는 내쫓지 말게.”

영강후가 크게 기뻐했다.

“폐하께서 그 아이를 쓰시겠다고 하시는데 신이 어찌 감히 내쫓겠습니까!”

“뛰어난 인물들이 있는 나라야말로 적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법이지. 영강후는 대의에 밝으시고 적절한 때에 간언까지 할 줄 아는 충신이시네. 게다가 짐과 함께 근심을 나누니 짐의 마음도 충분히 알 듯한데. 셋째 형님과 다섯째 아우의 일은 영강후가 재량껏 처리해 주시게.”

영강후가 깜짝 놀라 진옥을 바라보았다.

“폐하?”

“짐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시겠는가?”

영강후는 진옥과 눈을 마주치곤 곧장 고개를 숙였다. 나이도 있는 데다 벌써 두 황제를 모셔온 그는 금세 진옥의 뜻을 파악했다.

“소신, 폐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진옥이 말없이 손을 내젓자, 영강후가 즉시 물러났다.

곧이어 진옥이 문턱에 기대 사방화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내가 휘어잡았다고 봐도 되겠소?”

사방화는 어이없단 얼굴로 진옥을 쳐다보았다.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사용하시면 폐하 말씀에 목숨까지 내놓을듯합니다.”

진옥은 갑자기 시원스레 웃음을 터뜨렸고, 그에 사방화가 말을 덧붙였다.

“시간이 늦었으니, 기분이 풀리셨다면 어서 쉬십시오.”

진옥은 순간 3황자, 5황자가 떠올라 금세 불쾌한 표정이 되었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침전으로 돌아갔다.

진옥이 떠나고, 시화와 시묵이 다가와 물었다.

“아가씨, 쉬시겠습니까?”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은 이부자리를 깔아준 후 사방화가 눕는 것을 확인하곤 불을 꺼주었다. 그리고 진옥은 거처로 돌아가 사방화의 방에 불이 꺼진 것을 보고 자리에 누웠다.

* * *

한편, 영강후는 근처 조용히 구석진 곳을 찾아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등에 찬바람이 부니 등골까지 오싹해지는 듯했다.

그 순간, 어디선가 좌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영강후, 어찌됐습니까?”

영강후는 좌상이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거란 걸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화가 승낙했단 말입니까?”

“폐하께서 사방화의 방에 계신 탓에, 정면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요?”

영강후가 숨기지 않고 말을 털어놓자, 좌상은 일순간 말이 없어졌다.

“내게 3황자와 5황자를 처리하라 하셨는데, 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좌상은 웃음을 터뜨리며 영강후를 토닥였다.

“복도 많으십니다. 폐하께서 맡기신 일만 잘 처리한다면 영강후부는 이제 걱정 없이 편히 살 수 있을 겁니다.”

계속 이해가지 않는다는 영강후의 얼굴을 보고, 좌상이 다시 이야기했다.

“총명하신 것 같다가도 이리 둔하시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요. 폐하께선 두 황자를 죽이시진 않겠지만, 순순히 용서해주시지도 않을 겁니다. 만약 영강후께서 이를 잘 처리하시기만 하면, 이제 연석 소후작과 영강후부는 폐하의 중용을 받게 될 겁니다.”

이내 영강후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두 황자를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좌상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황실의 명성에 먹칠한 것을 크게 부풀려서도 안 되지만, 숨겨서도 안 될 겁니다. 진상을 모르는 이들은 선황폐하께서 승하하시자마자 폐하께서 형제들을 처단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우선 이틀간 조용히 있어 보세요. 두 태비마마께서 안절부절못할 때 거래를 하는 겁니다. 선황폐하의 총애를 받던 후궁이었으니 분명 손에 쥐고 있는 게 있을 텐데, 그것을 폐하를 향해 꺼내 든다면 골치 아픈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기회를 틈타 폐하를 도와 한 번에 처리하시는 게 가장 좋습니다. 폐하께서 아신다면 반드시 중용해주실 겁니다.”

좌상의 말에, 영강후가 그를 바라보며 감탄 아닌 감탄을 했다.

“좌상, 아주 치밀하십니다. 불이 난 틈을 타 모조리 뺏어오다니요.”

“진정한 신하라면 황제폐하의 근심을 덜어드려야지요.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후환은 끊어내야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제 영강후께서 어찌 처리하시든 두 태비마마께선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영강후만 미워하게 될 텐데, 고생하며 좋은 사람이 되는 것보단 폐하의 짐을 덜어드리는 게 더 낫지 않습니까?”

“좌상, 폐하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재주가 참 대단하십니다. 이 한참 부족한 사람은 얼굴도 못들 지경이군요.”

영강후가 좌상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내 말 들어서 손해 볼 것 없습니다.”

이어진 좌상의 말에, 영강후는 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그렇게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다 각자 거처로 돌아갔다.

* * *

한편, 화가 머리끝까지 난 채로 돌아온 영친왕, 영친왕비는 한참 후에야 겨우 분노를 가라앉혔다.

“황상이 정녕 그 두 놈을 죽이도록 놔둬야하는 게 맞겠소?” 

영친왕이 영친왕비에게 말했다.

“화를 가라앉히고 다시 생각해보세요. 죽일 것 같진 않습니다.”

영친왕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째서 말이오?”

“선황폐하께서 아직 편히 잠드시지도 못하셨는데 변경에서 전쟁까지 일어났으니 내우외환이 따로 없습니다. 아직 황제로 즉위하기도 전에 그 두 아이가 말 같지도 않은 일을 벌여놓긴 했지만, 형제니 죽이진 못하겠지요. 세간에 너그럽고 현덕하다는 명성을 갖고 있으니까요.”

“그럴듯하군. 선황께서 수렁을 던져놓고 가셨으니 황상도 만만치 않겠지.”

영친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서 주무세요. 내일 얘기하시고요.”

영친왕비의 말에, 영친왕도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튿날 이른 아침, 진옥은 막북 변경의 상황이 급박하단 서신을 받았다. 그 소식에 사방화의 안색도 급변했다.

“오라버니께서 보내신 것입니까?”

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입니까? 북제가 또 공격을 했답니까?”

진옥이 재차 고개를 끄덕이자, 사방화가 미간을 팩, 찌푸렸다.

“오라버니께선 막북 군영에 도착하셨답니까? 북제의 공격에 남진 군대는 어떻게 됐다고 합니까? 또 진 것입니까?”

진옥이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가로저었다.

“사 후작은 사흘 전 막북 군영에 도착했소. 후작이 있으니 이번엔 큰 타격은 입히진 못했을 거요.”

“그럼…….”

사방화가 진옥을 바라보았다.

“막북 군영에 도착하고 그 이튿날 암암리에 설성을 찾아갔지만, 성주를 만나지 못했다고 하더군.”

“성주는 어디 간 것입니까?”

진옥이 고개를 가로젓자, 사방화가 다시 또 물었다.

“오라버니께서 용병을 청하러 오실 걸 알고 어디로 숨은 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지. 성 밖으로 나갔다고만 할뿐,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오. 대신 삼당 장로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멋대로 결정할 수도 없는 일이니.”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뜻이군요. 막북 군영과 변경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태고요.”

“응, 막북 군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하다더군. 여태 책임자가 없었던 탓에 사병들이 긴장을 늦췄고, 그 틈에 북제가 쳐들어와 사상자가 벌써 만 명이 넘었다하오. 군영의 사기가 떨어져 탈영하는 사병들도 나오고 있고. 북제가 병력을 증강해 치밀하게 공격해오면 더 버틸 수 없을지도 모르오.”

“왕귀와 병사들은 일주일 뒤에나 도착할 수 있겠지요?”

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지만 일주일 만에 도착해도 쉬어야하니 곧장 전쟁에 나갈 순 없지.”

“오라버니 힘으로 일주일은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안에 반드시 방법을 찾아야만 합니다.”

진옥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곧바로 오권이 다가와 아뢰었다.

“폐하, 이제 경성으로 떠나셔야 할 시진입니다.”

“그래, 모두에게 알리도록 하라.”

그때, 오권이 돌연 정중히 말을 이었다.

“폐하, 소인 한평생 선황폐하를 모시며 함께 늙어왔습니다. 소인도 선황폐하의 곁으로 가는 것이 마땅하나 미래의 남진 강산을 채 보지도 못하고 떠나신 선황폐하를 위해 대신 목숨을 이어오고 있사옵니다. 하여 소인, 여생 동안 선황폐하의 황릉을 지켜드릴 수 있게 뜻을 내려주시길 청하옵나이다.”

진옥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권을 향해 말했다.

“짐도 한평생 아바마마의 곁을 지켜온 태감을 보며 자라왔다. 아바마마께선 승하하셨으나 태감이 따라갈 필요도, 이곳을 지킬 필요도 없지. 아바마마에 대한 마음만 남겨두면 되니, 궁으로 돌아가 여생을 편히 보내도록 하라.”

그러자 오권이 고개를 저으며 꿇어앉았다.

“다 늙은 몸으로 어찌 폐하를 모시겠습니까. 황궁으로 가도 마땅히 할 일이 없을 테니, 여기 남아 선황폐하를 지켜드리는 게 좋을 듯합니다. 선황폐하께 향을 올리며 폐하와 남진 강산의 복을 빌어드리다 여기서 죽어도 좋습니다. 부디 소인의 청을 받아주시옵소서, 폐하.”

“아니다. 어마마마께서도 태감을 황릉에 두는 것을 원치 않으실 테니 궁으로 돌아가 어마마마 곁을 지켜주거라.”

오권은 계속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태후마마께는 여의가 있지 않습니까. 또한 폐하께도 소천자가 있으니, 부디 소인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십시오.”

진옥도 이제 할 수 없다는 듯, 본인의 뜻을 접었다.

“그래, 셋째 형님과 다섯째 아우는 더 이상 황릉을 지킬 수 없으니 앞으로 태감이 맡아주어라. 답답하면 언제든 궁으로 돌아와도 좋다.”

“성은이 망극 하옵니다, 폐하!”

오권이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 인사를 올리자, 진옥은 직접 오권을 부축해 일으켜 세워주었다.

* * *

오권이 경성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알리자, 영강후가 진옥을 찾아왔다.

“폐하, 어젯밤 두 황자마마 일을 생각해봤사옵니다……. 우선 이틀간은 조용히 지켜보면서 만반의 대책을 세워 다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영강후께 넘겨드린 일이니 원하시는 대로 하면 되네.”

진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깊은 신임에 망극하옵나이다. 이틀간 황릉에 남아 일을 처리하고 돌아가겠습니다.”

“그래, 윤허하네.”

그런데 영강후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소신 또 한 가지…….”

“말씀하시게.”

영강후가 안쪽을 슬쩍 보며 말했다.

“방화 아가씨께서 경성으로 돌아가시면, 소신의 집에 들러 저희 부인의 진맥을 한번 해주실 수 있을까 하여…….”

“뭐?”

진옥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방화 아가씨께 폐를 끼칠 생각은 없으나, 도저히 뛰어난 의원을 찾을 수가 없어 염치 불고하고 말씀 올립니다. 부인을 아무에게나 진맥 받게 할 수 없으니 만약 폐하께서……. 저희 부인이 직접 황궁으로 가 방화 아가씨를 찾아가도록 해도 괜찮습니다…….”

영강후가 한참 진옥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지만, 진옥은 그를 흘낏 쳐다만 보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강후는 긴장으로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잠시 후, 진옥이 손을 내저었다.

“부인을 황궁에 모시든, 방화를 영강후부로 보내든, 진맥을 하도록 해주겠네. 이전 같지 않으니 부인의 명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나.”

영강후는 철렁, 내려앉았던 심장을 진정시키며 연신 감사 인사를 올렸다.

“성은이 망극합니다,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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