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2화 용서를 빌다 (1)
내전에는 3황자, 5황자와 시위대로 보이는 몇몇 사내들과 여인들이 가득했다. 어지럽게 널린 잔과 접시들, 누군가는 아주 얇은 옷만 걸친 이도 있었다.
술 냄새와 여인들 연지 향기가 한가득 뒤섞인 가운데, 3황자와 5황자는 각기 양쪽으로 여인을 둘씩이나 껴안고 있었고 시위대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개중 어떤 이는 벌써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추악한 짓을 저지른 뒤였다.
그리고 진옥이 차갑게 굳은 얼굴로 문을 연 순간, 한창 달아오르던 그들의 흥취는 한순간 적막으로 변해버렸다.
이미 술에 거나하게 취한 3황자, 5황자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곧바로 반응했다. 진옥을 발견한 두 황자는 인사불성이 되어 그를 불러대기 시작했다.
“오! 넷째야, 왔구나! 어서 한 잔 하거라!”
3황자가 진옥을 향해 손짓하며 웃었다.
“아이고, 넷째 형님께서 무슨 바람이 불어 오셨을까?”
5황자도 따라 웃으며 말했다.
진옥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서슬 퍼런 눈빛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그러다 시위대 중, 술에 덜 취했던 이들은 정신이 번쩍 들어 서둘러 품에 안은 여인들을 밀어내곤 무릎을 꿇었다.
“폐하,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여인들도 동시에 꿇어앉았다.
“폐하, 살려 주십시오! 모두 시켜서 한 짓입니다……!”
방 안을 가득 메우던 음탕한 소리가 일제히 살려달라는 소리로 변모하자, 3황자와 5황자는 순간적으로 술이 반쯤 깼다.
여인의 입술과 입 맞추던 술잔은 땅으로 떨어졌고, 여인을 어루만지던 손길은 다급히 제자리를 되찾았다. 더불어 술기운으로 가득했던 발간 얼굴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진옥은 다시 내전을 나와 문을 닫게 하고, 살기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거기 누구 없느냐!”
“폐하!”
“파리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가둬 놓거라. 물과 음식도 주지 말고 죽으면 선황폐하의 능에 함께 묻도록 하라.”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진옥은 잠시도 이곳에 더 머물고 싶지 않은 듯, 그대로 사방화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궁전을 빠져나왔다.
이윽고 안에선 천지를 울리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 *
으슥한 편전에서 벌어진 소동은 금세 영친왕, 그리고 좌우상을 비롯한 대신들을 놀라게 했다. 쉬고 있던 사람들도 일제히 일어나 소리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가, 극심하게 분노한 진옥을 보고 모두가 깜짝 놀랐다.
“폐하를 뵙습니다!”
진옥은 전체를 한번 둘러보고는 말없이 손만 내저었다.
영친왕은 진옥과 역시 안색이 좋지 않은 사방화를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
“황상,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오?”
“백부님께서 직접 가셔서 살펴보십시오.”
진옥은 그대로 사방화의 손을 잡고 떠나버렸고, 영친왕은 단단히 분노한 진옥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눈으로 영친왕비를 바라보았다.
“저렇게 화나신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영친왕비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직접 가봅시다.”
영친왕과 영친왕비를 필두로 하여, 좌우상과 영강후, 대신들까지 으슥한 궁전으로 향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안에선 여기저기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입구엔 중병들이 궁전을 빼곡히 둘러싸고 있어, 영친왕은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냐?”
중병 하나가 영친왕에게 극진히 예를 갖추곤 최대한 짧게 설명했다.
이내 영친왕도 크게 격노했다.
“어찌 이럴 수가!”
“선황폐하께서 아직 편히 쉬시지도 못하셨는데 이 신성한 황릉에서 주색에 빠져 음탕한 짓들을 벌이다니 이게 대체……, 어찌 이리 황당무계할 수가!”
영친왕비도 심각하게 분노했다.
“폐하께서 크게 노하신 이유가 있었어!”
좌상, 우상에 이어, 영강후도 안을 들여다보고 병사에게 물었다.
“폐하께서 파리 한 마리도 들어갈 수 없도록 해두고, 죽으면 선황폐하 곁에 같이 묻으라하셨단 말이냐?”
“예, 폐하께서 그리 분부하셨습니다.”
“그럼 3황자마마와 5황자마마는…….”
영강후는 영친왕을 돌아보다가, 격노한 영친왕을 보고 절로 말끝을 흐렸다.
그때, 영친왕비가 엄숙히 입을 열었다.
“살아서 황실 체면을 깎아 먹는 것보단 모두 죽는 게 낫지.”
누구도 이에 말을 잇지 못했다.
한편, 안에서도 바깥의 소리가 들린 것인지 3황자, 5황자가 헐레벌떡 뛰어와 중병들을 제치고 영친왕, 영친왕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백부님, 백모님, 살려주십시오!”
어림군은 장총을 들고 두 황자를 궁문 안으로 밀어 넣었고, 영친왕은 불길이 이는 눈으로 두 황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안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여인들의 흐느끼는 소리,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하고 얼굴 가득 묻히고 있는 연지……. 두 황자는 더 이상 고귀한 황손이 아닌, 사람이라고도 볼 수 없었다.
영친왕은 그렇게 침묵하며 두 황자를 지켜보다가, 이내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뒤돌아섰다. 영친왕비 역시 추잡하다는 눈빛을 보내다, 그냥 영친왕을 뒤따라 가버렸다.
또한 좌상은 애초부터 진옥의 사람이라 3황자, 5황자를 그리 탐탁하게 여긴 것도 아니었다. 평소에도 선황제가 총애한 후궁들의 자식이라는 이유를 방패삼아 유일한 적통 황자인 진옥과 맞서려하던 두 황자들이 못마땅했었기에 좌상은 자연히 그들을 외면했고, 우상도 고개를 내저으며 떠나가 버렸다.
남은 영강후마저 자리를 뜨려 하자 3황자, 5황자가 절박하게 소리쳤다.
“영강후! 제발 살려주시오!”
영강후는 걸음을 멈추곤 두 사람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선황폐하께서 막 안장되시어 편히 쉬지도 못하셨는데 황자마마라는 분들이 아버님께서 묻히신 황릉에서 주색에 빠져 있었다니, 선황폐하께 무례한 것도 모자라 역대 황제폐하들의 용안에도 먹칠을 하지 않았습니까? 폐하께서도, 그 인자하신 왕야께서도 노하셨으니 저는 구해드릴 방법이 없습니다.”
“영강후, 앞으로 절대 이러지 않겠소. 폐하께 한 번만 부탁해주시오!”
3황자, 5황자는 연신 통곡하며 소리쳤다. 주변엔 잠시 바람 한 줄기가 스치듯 불었지만 두 황자는 이 엷은 바람에도 술이 다 깨는 듯했다.
이내 영강후가 고개를 내저으며 떠나려 하자 두 황자가 울며 소리쳤다.
“영강후, 제발 가지 마시오! 어머니께선 아직 영강후를 몇 번 구슬리지도 못하셨는데, 살려만…….”
순간 영강후의 안색이 급변했다. 한때 심비와 류비는 황제의 총애를 받아 황궁 내에서도 감히 황후와 맞먹는 지위를 가졌었기에, 두 총비에게 밉보일 수가 없어 고분고분 맞춰 지내왔었다.
아직 새 황제가 정식으로 즉위하기도 전, 두 황자는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추악한 일을 벌였다. 이리 급박한 상황에서 못할 말이 어디 있겠는가.
영강후는 괜히 두 황자를 도와주었다가 봉변을 당할까 싶어 깜짝 놀랐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두 태비마마께선 황자마마들이 저지른 일을 아시게 되면 더 가슴 아파 하실 것입니다.”
어머니의 이름이 나오자, 3황자는 바로 5황자에게 속삭였다.
“그래, 태비마마께선 우릴 구해주실 수 있을 거야. 어서 마마께 알리자.”
그러자 5황자가 서둘러 영강후를 향해 외쳤다.
“영강후, 살려주시오. 지난날 정을 생각하셔서라도 이렇게 보고만 있으실 순 없잖소!”
영강후는 창백해진 얼굴로 두 황자를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폐하께 청을 드려보긴 하겠지만, 용서해 주지 않으신다면 저도 방법이 없습니다. 황궁에 계신 두 태비마마께 서신을 보내 알려드리는 것이 전부일 겁니다.”
“영강후, 감사하오. 이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겠소.”
두 황자도 이제 겨우 희망의 끈을 잡은 듯했다.
“보답은 필요 없습니다. 저는 무사히 노후를 보내고 싶은 사람이니 더 이상 터무니없는 말로 절 위협하지만 않으시면 됩니다.”
영강후가 떠나고, 3황자와 5황자는 맥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영강후는 진옥의 침궁으로 향하는 길 내내, 어찌하면 3황자와 5황자를 구할 수 있을지 고민에 잠겼다.
* * *
영강후가 몇 걸음 뗐을 무렵, 모퉁이에서 누군가 불쑥 튀어나왔다.
“누구냐!”
“납니다.”
좌상을 보고서야 영강후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좌상이셨군요. 깜짝 놀랐습니다!”
“영강후, 황자들께서 영강후께 살려달라는 부탁을 하던가요?”
영강후는 머리가 다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했다.
“별다를 게 있었겠습니까? 내 단점을 가지고 협박을 하는데 그때 그러지 말아야 했을 것을…….”
“애당초 중심을 지키지 말아야했습니다! 결국 양쪽 그 누구에게도 좋은 소릴 들을 수 없는데 말이지요.”
좌상이 콧방귀를 뀌며 도중에 영강후의 말을 끊었다.
“좌상, 농은 그만하시지요. 우리 영강후부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아시잖습니까. 선대의 음습한 세습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니 조정에서 중심 없이 행동해선 바로 설 수도 없습니다. 어릴 적부터 공을 세우고 싶어 했지만, 결국 다 밀려나고 말았지요. 난 이런 내 고통을 누구에게도 숨긴 적이 없습니다.”
영강후가 맥이 다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좌상은 영강후를 비웃으려다 돌연 말투를 바꿨다.
“노부인께서 영강후가 군공을 세워 군권을 다잡지 않게 한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영강후부가 황실을 위협하는 제2의 충용후부가 될까 그러셨던 것이지요. 세습된 작위도 있는데 군공까지 갖춘다면 황제폐하께서 어찌 황권을 억누를 세력을 용인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영강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땐 몰랐습니다. 황실에서 세습 작위를 받은 이상, 우리는 그 훈장만 껴안고 살아야한단 것을요. 자손은 절대 출세해선 안 되고 만약 출세를 할시 바로 황권의 힘에 짓눌려야했지요. 일찍이 황자가 황위를 탐했을 적에 중심 없이 행동했다면 선황폐하께선 영강후부를 받아들이시지도 않았을 겁니다.”
“이제야 깨달으신 것 같구려. 그런 이유로 선황폐하께서도 지금껏 영강후부를 이끌어 주셨던 겁니다.”
좌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그때로 인해 모든 풍격이 변해 지금의 결과를 만들어버렸잖습니까. 이것으로 두 황자가 내 약점을 잡은 것이지요. 좌상, 부디 최상책 하나만 생각해 주세요.”
“네? 내게 최상책을 내달란 말씀입니까?”
좌상이 영강후를 째려보았다.
“때가 이런지라 새 황제폐하의 심기를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선황폐하와는 다르게 영강후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던 분이잖습니까.”
“영강후와 난 조정에서 관직을 맡은 지 오래지만, 영강후께선 여태 태자전하께도, 두 후궁마마 진영에도 기대셨던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새 황제폐하께 여태 난처한 일도 없으셨지. 또 범양 노씨 가문이 아무리 내 발목을 잡을지언정 난 범양 노씨 사람입니다. 조카 설홍이 영강후 아드님과 혼인하진 못했지만, 영강후와 나 사이엔 정이 남아있으니 좋은 방법 하나 내드리리다.”
“정말 감사합니다.”
영강후가 기뻐하며 연신 감사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좌상이 영강후 귓가로 다가와 속삭였다.
“그리 섣불리 감사하진 마세요. 영강후 따님과 사방화 아가씨가 사이가 좋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후 부인께서도 사방화의 의술로 살아난 것이잖습니까. 사방화가 폐하와 함께 돌아와 장례에서도 옥련에 함께 올라탔으니 폐하께 사방화의 존재가 얼마나 큰지는 내 더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시겠지요?”
영강후는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그럼 내가 직접…….”
좌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진정 두 황자를 구하고 싶다면 이 방법밖엔 없습니다. 사방화가 승낙 한다면 폐하의 승낙을 얻어낸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내가 어딜 봐서 황자들을 구하고 싶어 하겠습니까? 그냥 함부로 입을 놀릴까 걱정돼 그런 것뿐이지요. 만약 그때 일을 지금 와서 끄집어낸다면 내 앞길에 재를 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난 무탈하게 노후를 보내고 싶을 뿐이에요.”
“어쨌든 정말 노후를 보장하고 싶다면 사방화를 찾아가야만 합니다.”
“그래요, 좌상. 정말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곧장 다녀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