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1화 방탕한 짓
이제 황제의 침전 밖에선 모든 준비를 다 마치고, 길시에 선황제의 안장만을 남겨둔 상태였다. 황제의 옥련(*玉辇: 황제의 가마)과 태후의 봉가(*凤驾: 태후의 가마)도 모두 다 마련되었다.
문무백관, 황실, 종실, 또 후궁 비빈들과 대신들의 여식은 나란히 양쪽에 늘어서서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길시가 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내 진옥과 사방화가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사방화를 한번 힐끔 본 후 다시 일제히 머리를 조아리며 외쳤다.
“황제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이제 태후가 된 진옥의 어머니 황후, 그리고 영친왕 부부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동시에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예를 거두라.”
진옥이 지엄하게 이야기한 뒤 사방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함께 옥련에 오르자는 뜻이었다. 그러자 사방화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손을 잡고 황제의 옥련에 올라탔다.
그 모습에 영친왕비가 사방화를 막아서려 앞으로 나갔지만 영친왕이 서둘러 왕비의 손을 붙잡았다. 영친왕비는 그렇게 또 할 수 없이 자리에 가만히 서서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길시가 되었습니다!”
황제의 옥련을 선두로 선황제의 관이 따르고, 문무백관들이 그 뒤를 따르며 황궁을 나섰다.
장례 행렬은 성문을 나와, 길가에 나란히 무릎을 꿇은 백성들을 지나 황릉으로 향했다. 그리고 흩날리는 바람에 옥련의 휘장이 펄럭이며 진옥의 곁에 앉아 있는 사방화의 모습이 드러났다.
진옥이 사방화와 함께 돌아온 이래, 조정에선 암암리에 진옥과 이여벽과의 파혼이 사방화 때문일 거라는 추측이 나돌았다. 황제가 승하한 뒤 사방화는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녀가 현재 진옥의 침궁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은 이미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이제 새로운 황제가 된 진옥은 선황제의 장례를 치르며 사방화를 자신의 옥련에 함께 태웠다. 이는 천하에 그 속뜻을 공표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영친왕부 소왕 진강과 천하가 다 떠들썩하도록 혼인을 치른 사방화는 다시 온 세상에 그와의 이혼 소식을 전하고 새 황제 진옥과 옥련에 올라 있었다.
이는 남진 역사상 선례가 없는 일이었다. 천하에 오직 옥련에 오를 수 있는 건 제왕 한 사람뿐이었지만 유교 사상에 교화된 문무백관들이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조차 아주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진옥은 황태자 시절부터 백성들의 민심을 얻어온 데다, 임안성도 위기에서 구해낸 덕에 백성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칭송만 받았다.
“평안하십시오, 선황폐하. 새 황제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백성들의 함성소리는 성 밖으로 나올 때까지 끊이질 않았고, 장례 대열은 성을 빠져나와 서산 황릉을 향해 10여 리를 굽이굽이 돌아갔다.
* * *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황릉이었지만 반나절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곧이어 진옥과 사방화가 옥련에서 내리고 황릉을 지키던 호위가 문을 열자 때마침 길시가 되었다.
장례를 치르라는 진옥의 분부 뒤로, 진옥은 진경과 나머지 황자들과 함께 선황제의 관을 황릉 보상(*宝床: 보배롭고 진귀한 평상)에 올렸다. 그 후, 석문을 닫고 유리벽을 쌓아 바깥으로 향하는 문을 막았다.
곧이어 모두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우제례(虞祭礼)를 올렸다.
우제례를 마치자 벌써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그때, 좌상이 진옥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폐하, 모든 예례를 끝마쳤습니다. 곧장 귀경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황릉 밖 행궁에서 쉬신 후 내일 마저 진행하시겠습니까?”
“모두 수고 많으셨네, 여기서 하룻밤 머물고 내일 귀경하도록 하지.”
좌상이 고개를 끄덕인 후 물러났다.
남진 황릉이 안치된 곳은 산과 물을 끼고 있어 풍수지리와도 통화는 위치였으며 인가가 없어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조용한 곳이었다.
또한 어마어마하게 큰 행궁엔 모든 이들이 자리를 잡고 쉴 수 있었다.
사방화는 진옥의 침전 옆 편전에 묵기로 했다. 황제의 공간답게 따로 마당까지 있는 아주 드넓은 곳이었다.
모두가 자리를 잡자, 곧 하늘에 칠흙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황제가 승하한 뒤로 황자, 공주, 황손을 비롯한 대신들 그 누구도 제대로 쉬지 못했던 탓에 각자 자리를 잡자마자 매우 고요해졌다. 아마도 다들 장례를 치르며 지쳤던 몸을 누이고 곧장 휴식을 취하는 듯했다.
하지만 사방화는 일주일간 편히 쉬었던 터라 전혀 피로를 느끼지 못했다.
* * *
밤이 깊은 시각, 사방화가 시화와 시묵에게 분부를 내렸다.
“시화, 시묵. 가서 야행의 한 벌만 내오너라.”
“아가씨, 나가시려고요?”
“응, 근처를 좀 걷고 싶다.”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사방화는 바로 고개를 내저으려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내 시화와 시묵이 말했다.
“아가씨,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진옥이 내전으로 들어왔다가 차를 마시는 사방화를 발견했다.
“한밤에 차를 마시면 밤잠에 들기 힘들 텐데.”
진옥은 이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지쳤던 모습은 전혀 보이질 않았다. 사방화도 곧 안색이 훨씬 나아진 진옥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리 늦은 시간에 어찌 오셨습니까? 며칠 내내 힘드셨으니 쉬셔야지요.”
진옥이 사방화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황릉은 처음이라 주위를 돌아보고 싶어 할 것 같아 왔소. 내일 아침 일찍 돌아갈 테니 난 괜찮소.”
사방화가 눈썹을 들썩였다.
“제가 황릉을 돌아보고 싶어 한다는 걸 어찌 아셨습니까?”
진옥이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 성격에 어찌 황릉에 관심이 없을 수 있겠소? 역대 제왕들 능엔 관심이 없어도 그곳에 놓인 물건들엔 관심이 있을 거라 생각했소. 남진 황릉엔 암호가 있다고. 아주 거대한 장치가 있는 곳도 있지. 아직 몸이 다 낫지도 않아 내력과 매술도 쓸 수 없는데 당신 혼자 갔다가 위험에 빠지기라도 하면 어찌하오? 마음이 놓이질 않아 함께 가려 왔소.”
사방화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진옥도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은 갈아입을 필요 없소. 바로 가지!”
이제 남진의 황제가 된 진옥과 함께라면, 병사들이 안팎으로 삼엄하게 지키는 이 황릉을 굳이 옷을 입고 정체를 숨겨가며 돌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그에 사방화도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섰다.
* * *
두 사람은 방을 나와 곧장 황릉 내부로 향했다.
이어, 순찰을 하던 두 병사가 진옥에게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추자 진옥은 손을 내저었다. 병사들은 공손한 자세로 두 사람을 위해 길을 내주었다.
황릉에 다다라, 진옥이 사방화에게 물었다.
“할바마마의 능을 보고 싶은 것이오?”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옥은 말없이 능침지궁(陵寝地宫)으로 갔다.
입구로 가니,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이 소리 없이 나와 공손히 예를 갖췄다.
“지궁 제15대 장궁인이 새 황제폐하를 뵙습니다.”
진옥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훑어봤다. 검은 복장의 이들은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듯 피부가 매우 창백했고, 다들 평범한 용모였다. 그러나 이제 20대 중반에 가까운 그들은 이미 무공이 입신의 경지에 달한듯했다.
“지궁을 열거라.”
“감히 폐하께 여쭙니다. 지궁령을 가지고 계십니까?”
“지궁령?”
“지궁에 출입하기 위해 받는 지궁 은위의 지궁령입니다.”
“없다.”
“지궁의 규정에 따라 지궁령이 없으면 황제폐하께서 오셔도 문을 열어드릴 수 없습니다.”
이내 진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궁령은 누가 관리하는 것이냐?”
“줄곧 역대 황제폐하들께서 관리해오셨습니다.”
“선황폐하께서 임종 전 짐에게 남겨주신 건 사진뿐이었다. 앞으로 이 남진 강산은 짐이 이끌어 가게 될 텐데 지궁령이 없다는 이유로 짐을 들여보내 주지 못한다는 것인가?”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궁 은위는 오직 지궁령에만 응할 수 있습니다.”
진옥이 굳어진 안색을 물었다.
“그럼 말해보라. 선황폐하께선 승하하셨는데 지궁령은 어디 있느냐?”
“수일 전, 강 소왕야께서 지궁령을 가지고 지궁을 다녀가셨습니다.”
진옥은 순간 어리둥절해하며 사방화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일 전이 며칠 전이냐, 짐에게 제대로 말하라.”
“대략 20일 전이었습니다.”
20일 전이라면 진옥은 임안성 역병으로 위기 속에 처해있었고, 사방화도 경성을 떠나 임안성으로 향하던 무렵이었다.
“지궁에 와서 무얼 했느냐?”
그가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궁 암위는 지궁 영주만을 받들기에 폐하께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이내 진옥이 사방화에게 말했다.
“들어갈 수 없을 듯하오.”
“됐습니다. 그냥 호기심에 와 본 것이니 상관없습니다.”
사방화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답하자, 진옥도 다시 사방화와 함께 지궁을 떠나 행궁 침전으로 돌아갔다.
* * *
두 사람은 말없이 머리에 달빛을 이고 걸었다. 그렇게 반쯤 걸었을 무렵, 홀연 멀리서 어렴풋이 기쁨에 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진옥은 바로 걸음을 멈추고 사방화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소리 못 들었소?”
사방화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쪽을 가리켰다.
“저기서 난 것 같습니다.”
“가봅시다.”
소리가 들리는 곳은 한 으슥하고 황폐한 궁전이었다.
멀지 않은 곳이라 금세 도착했으나 안에선 믿을 수 없게도 남녀가 뒤섞여 희희낙락하는 웃음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분명 음탕한 짓을 벌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선황제가 세상을 뜨고 막 장례를 치렀는데, 누군가는 이 황릉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방탕하게 즐기고 있는 것인가?
진옥의 안색은 급속도로 어두워졌고, 사방화도 있는 힘껏 눈살을 찌푸렸다.
사방화가 아무리 선황제에게 그다지 좋은 감정이 없다고 한들, 이는 명백히 도리와 예에 어긋난 행동이 아니던가. 더더군다나 남진 최고의 귀족 가문에서 교육을 받고 자란 사방화는 특히 더 이 상황을 용납하기 힘들었다.
곧이어 진옥이 궁문에 다다르자 문을 지키던 호위는 안색이 창백해져 어쩔 줄을 몰랐다. 그중 하나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 이 사실을 알리려 했으나 이내 진옥의 손에 털썩, 하고 꿇어 앉혀졌다.
머지않아 나머지도 일제히 차례로 꿇어앉기 시작했고, 누군가 말을 하려던 이도 있었으나 진옥의 위압감 넘치는 눈빛에 압도돼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진옥이 안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떠나자 궁인들은 점차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기까지 했다.
내전 입구에선 차마 더는 들어줄 수 없는 소리가 났다. 진옥은 이제 더할 수 없이 굳어진 안색으로 아예 문을 걷어찼다.
진옥의 발길에 문은 엄청난 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고, 동시에 안에서 계속 새어나오던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문턱을 넘자마자 정말 눈뜨고 봐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에 진옥은 손을 들어 사방화를 가로막았다.
“들어오지 마시오.”
그 웃음소리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건 이 안에 3황자, 5황자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와 함께 뒤섞여 들리는 여인들의 웃음소리는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사방화도 아예 들어갈 생각이 없었지만 진옥의 만류에 바로 멈춰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