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0화 승하한 제왕 (2)
황제의 누이, 대장공주와 그녀의 딸 금연도 소식을 듣고 급히 황궁으로 향했으나 영강후 부인만은 일순간 망설임을 보였다.
조정 명부(*命婦: 봉작을 받은 부인) 신분으로 당장 황궁에 들어야한다는 건 알지만 힘들게 지킨 태중 아이에게 혹시나 태기가 들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녀의 딸 연람도 여운암에서 귀경하는 도중, 중상을 입었던 것이 아직 다 낫지 않은 터라 겨우 시녀들의 부축을 받아 영강후 부인의 본원으로 왔다. 모녀도 서로를 바라보며 입궁하긴 무리란 생각을 했다.
이내 연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머니, 우선 사람을 보내 아버지의 뜻을 여쭤보도록 해요.”
“그래.”
후 부인은 임신한 이래로 반년을 고생했던 까닭에 예전 그 강인했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고, 이젠 매사 영강후의 뜻에만 따르고 있었다.
마침 영강후에게 가던 하인은 다시 돌아와 두 모녀에게 말을 전했다.
“부인, 나리께서 일찌감치 폐하께 청을 드렸습니다. 폐하께서도 부인과 아가씨께선 몸이 좋지 않으시니 황궁에 드실 필요 없다고 하셨습니다.”
후 부인은 잠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폐하라고?”
“예, 선황폐하께서 태자전하께 황위를 선위하시곤 승하하셨습니다.”
후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적절한 보상을 치러주곤 한숨을 내쉬었다.
“태자전하께서 황위에 오르시다니, 눈 깜짝할 새 20년이 지나버렸구나. 선황폐하께서 황위에 오르신 후, 황궁에서 나와 네 아버지의 혼인 축하연을 벌였던 게 아직 눈에 이리 선한데 말이다.”
“강 소왕야께선 돌아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어진 연람의 말에, 후 부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람아, 설마 아직도 진강 소왕야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건 아니겠지?”
연람이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머니, 이미 다 내려놓은 지 오래입니다. 어제 방화가 태자전하와 함께 황궁으로 왔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제 선황폐하께선 태자전하께 선위를 하셨습니다. 그럼 이제 소왕야는 어찌 되는 걸까요? 어릴 적부터 평생을 태자전하와 다투기만 하셨는데, 그 사이에 방화까지 끼어버렸으니 서둘러 돌아오지 못한다면 정말 다 늦어버릴 것 같아서요.”
“뭐가 늦는단 거니? 사방화? 아니면 황권 말이냐?”
“둘 다요.”
후 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강 소왕야는 본래 황위에 뜻이 없었으니 괜찮다지만, 사방화는…….”
“저도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다치지만 않았어도 황궁에 들어가 방화를 만나 보는 건데…….”
연람이 무기력하게 자신의 상처를 내려다보자, 후 부인이 딸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으며 이야기했다.
“네 아버지께서 부탁까지 하셨으니 너는 얌전히 나와 여기 있자꾸나. 그런 일엔 끼어들지 말고, 응? 그나저나 네 오라비가 북제에서 돌아왔다던데 지금쯤 어디 있다더냐? 경성으로 오고 있는 거겠지?”
“어머니, 매번 말로는 오라버니가 보고 싶지 않다고 하시면서도 마음속으론 걱정하고 계셨던 거지요? 오라버니께서 돌아왔단 말을 들으시니 드디어 먼저 얘기를 꺼내시네요.”
후 부인이 딸을 살짝 째려보았다.
“어쨌든 내 아들 아니냐! 그리 고생해서 저만큼 키워놓았는데 어찌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겠어. 돌이켜보니 나도 이제야 알겠더구나. 여태 네 오라비를 위해 잘했다고만 생각했던 일들은 내 착각이었어. 내가 낳은 자식이라도 내 뜻대로 하려할수록 모래처럼 흩어져버리기 마련이었어.”
“아셨다니 다행입니다. 오라버니도 이런 어머니를 보시면 기뻐하실지 몰라요. 떠난 지 반년이나 됐는데 오라버니께서 어찌 변하셨을지 궁금하네요.”
연람도 오라버니 연석을 그리워했다.
“반년밖에 안 됐는데 변할 게 있겠느냐? 그래……, 반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못 본지 몇 년은 된 것 같구나.”
후 부인도 말과는 다르게 마음속으로는 연석을 많이 그리워했다.
“그건 어머니께서 회임을 하셨기 때문이에요.”
연람의 말에, 후 부인이 부른 배를 소중히 어루만졌다.
“이 아이마저 없었더라면 네 오라비가 떠나고 난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우리 남동생도 분명 우리 집안과 인연이 있는 거예요.”
연람도 어머니의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어찌 남동생이란 것을 안단 말이야?”
“어머니께서 반드시 아들일 거라고 입이 닳도록 말씀하셨잖아요.”
후 부인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네 오라비 때문에 하도 속이 상해 아들 하나를 더 원한다 한 것뿐이야.”
“이젠 오라버니가 더 이상 밉지 않으세요?”
“그래. 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우리가 그렇게 다잡지만 않았어도 아마 지금쯤 다른 인물이 되어 이 부에 머물러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본래 네 아버지께서도 포부가 있으셨지. 변경을 지키러 군대로 가 공훈을 세워, 선조의 가업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이겨내려 하셨는데 조모님께서 허락해주시질 않으시니 점점 그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연람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라버니도 포부가 있으셨어요. 문무를 겸비한 데다 여기저기에 능통했지만, 강 소왕야와 함께 자란 까닭에 소왕야께 다 가려졌을 뿐이지요.”
후 부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께서도 부를 떠나고 싶었던 적이 있었지만, 용기가 없으셨다고 하더구나. 헌데 네 오라비가 시원하게 떠나는 모습을 보곤 분명 될 놈이란 걸 알았지. 네 오라비가 아버지보다도 강한 듯하구나. 큰 인물이 갖춰야 할 시원시원하고 대범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게야.”
이내 연람이 웃음을 터뜨렸다.
“일전엔 오라버니가 강 소왕야와 함께 자라 성격을 다 버렸다고 구박하시더니 이젠 장점으로 쳐주시는 거예요?”
후 부인도 웃음을 터뜨리며 손가락으로 연람의 볼을 콕, 찔렀다.
“이게 어미를 놀리고 있어.”
모녀가 웃고 떠드는 사이, 또다시 묵직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모녀도 서서히 웃음기를 거뒀다. 선황이 승하하고 한 시대가 저물었으니, 이제 미래가 어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황궁은 조정 문무백관들과 계급 있는 부인들, 가족들이 들어서는 까닭에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더불어 늘 찬란하고 드높았던 황궁엔 황실 황자, 공주, 종실, 황손, 후궁 비빈들의 애절한 통곡 소리만이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다.
* * *
날이 밝았지만, 울음소리는 여전히 그칠 줄을 몰랐다. 벌써 몇 시진이나 통곡한 것임에도 다들 여전히 그대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편, 진옥의 궁에선 시화와 시묵이 조심스레 사방화에게 말을 붙였다.
“아가씨, 어서 침상으로 올라가 쉬십시오. 절대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사방화가 답하기도 전, 불쑥 소 태감 하나가 다가왔다.
“폐하의 명을 받고 방화 아가씨를 뵈러 왔사옵니다.”
시화, 시묵도 이젠 황궁에 눌러 살 것이란 사방화의 심사를 알아차리곤 어린 태감에게 한껏 예를 갖춰 말했다.
“태감은 무어라 불러드려야 합니까?”
“난 황태자전하 곁에서 소일거리를 봐오던 소천자(小泉子)라 하네. 낭자들도 편히 하게나. 폐하께서 아가씨께 날이 밝았으니 조반을 드시고 쉬시라 전해드리라 했네.”
“아가씨께 즉시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태감.”
시화와 시묵이 고개를 끄덕이며 보상을 해주었으나 소천자는 그저 소일거리일 뿐이라며 성의를 거절하곤 서둘러 밖으로 떠나갔다.
이내 시화, 시묵이 방으로 돌아와 창가에 앉아있던 사방화에게 말했다.
“아가씨, 들으셨습니까?”
사방화는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 *
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온 나라가 국상의 예를 치르며 하늘과 땅, 종묘와 사직에 제를 올렸다.
황실 가족들은 더운 날씨 탓에, 일주일 후 무덤에 안장할 때까지 관을 얼음으로 식혀가며 지켜냈다.
일주일 내내 슬픔에 잠긴 남진 경성은 안팎 어느 곳에서도 악기 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문무백관, 황자, 황손, 황궁 비빈들과 대신의 안식구들은 일주일 내도록 비통함에 빠져있었다.
반면 사방화는 일주일간 진옥의 침궁에서 지내며, 황궁 곳곳에서 진심으로 통곡하며 우는 곡소리, 또 가짜로 우는 울음소리도 들어왔다. 한순간 새 시대가 도래 했으니 황궁 내 꽃다운 나이의 여인들은 얼마나 앞날이 캄캄할까.
국상이 치러지는 내내, 아무도 진옥의 침궁을 찾아와 사방화를 귀찮게 구는 이가 없었다. 진옥 역시 쉴 새 없이 바빠 침궁으로 돌아오지도 못했다.
사방화도 시화와 시녀들을 제외하곤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언신 조차 어디로 가버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드넓은 황궁 내의 유일한 청정지역은 오직 이 황태자의 침궁 뿐이었다.
시화와 시묵은 매일 삼시 세끼 약을 달여 사방화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고, 사방화는 내내 창가에 앉아 한가로이 시간을 보냈다.
* * *
일주일 후, 황제의 관을 안장할 날이 되었다.
진옥은 아침 일찍부터 침궁으로 돌아왔는데, 늘 아름다운 비단옷을 입었던 그는 효의를 입고 몹시 초췌해진 몰골을 하고 있었다. 슬픔이 채 가시지 않은 눈망울과 뼈만 앙상히 남아 거의 옷보다 핼쑥해진 그는 얼핏 보기엔 일주일 전의 그 황태자 진옥이라곤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였다.
시화, 시묵도 서둘러 달려 나왔다가 진옥을 보고 순간 깜짝 놀랐다.
“폐하,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편히 하라. 방화는 뭘 하고 있느냐?”
진옥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가씨께선 일주일 내내 방에만 계셨습니다.”
진옥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구로 향했고, 시화와 시묵은 휘장을 걷어줬다.
문턱을 넘으니 창가에 앉은 사방화가 한눈에 들어왔다. 진옥은 그녀를 보고 바로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일주일 내내 아무 데도 나가지 않았다더군.”
사방화는 그날 황제의 침전을 마지막으로 진옥을 만난 적이 없어, 하마터면 그를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사방화는 다소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얼마나 힘드셨으면 이리 되신 것이옵니까?”
진옥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방화를 보고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도 아바마마께서 이리 갑자기 승하하실 줄은 몰라 준비가 돼있질 않았소. 손쓸 겨를도 없이 처리할 일도 많은데 변경의 전쟁까지 겹쳤더니……. 보기 흉한가?”
“아닙니다, 그냥 좀 놀랐을 뿐입니다. 아직 식사는 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사방화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응, 한 시진 후가 길시인지라 관을 안장시키려 하는데 나와 함께 가겠는지 물어보러 왔소.”
진옥의 답에, 사방화가 시화와 시묵을 보며 분부를 내렸다.
“조반을 내오고 폐하께도 내 탕약을 하나 내드려라.”
시화와 시묵은 서둘러 분부를 이행하러 갔고, 사방화는 차 한 잔을 따라 진옥에게 내밀었다. 그에 진옥도 따스한 눈길로 사방화를 바라보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사방화를 보니, 그간의 피로도 싹 가신듯했다.
진옥이 계속 말없이 사방화의 답을 기다리자, 그녀도 곧 대답을 했다.
“같이 가겠습니다.”
진옥은 바로 찻잔을 내려놓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시화와 시묵이 조반을 내오자 사방화와 진옥은 식사를 마치고 나란히 탕약을 마셨다. 그런 뒤, 사방화는 장례를 치를 점잖은 옷으로 갈아입었고 두 사람은 함께 침소를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