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7화 (757/978)

757화 여인의 식견 

황후는 진옥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밖으로 향하던 중, 사방화가 함께 왔다는 얘기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게 사실이냐?”

여의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아뢰었다.

“전하께서 방화 아가씨를 모시고 함께 폐하를 뵈러 와 침전에 계신답니다.”

황후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꽤 충격이었는지 잠시 넋을 잃었다.

“폐하께선 깨어나신 것이냐?”

여의는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제 오시(*午時: 아침 11시 ~ 오후 1시) 이후로 아직 깨어나지 않으셨답니다.”

“누가 폐하의 침전에 있느냐?”

“태자전하와 방화 아가씨를 제외하곤 아무도 들어갈 수 없어 침전 바깥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영친왕야와 좌상 대인께선 꼬박 하루를 계셨고요. 마마, 태자전하께서 돌아오셨는데 가보시겠습니까? 태자전하께서도 마마는 들여보내주시지 않겠습니까?”

황후는 황제의 침전을 한번 바라보고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가지 않겠다.”

여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황후를 바라봤고, 황후는 심히 어두워진 안색으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수년간 이 봉란궁에서 폐하의 침전을 바라봐왔다.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은 이곳에서 난 감히 드나들 수도 없었지. 천하에 우리 같은 부부가 또 어디 있겠느냐? 그저 화목하게만 지낼 백성들은 가장 존귀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이 황궁에서 부부가 이리도 각자의 삶을 산다는 건 아무도 모르겠지. 

삼강오상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폐하의 마음속엔 처음부터 지금껏 내가 없었는데 내가 간들 뭐가 달라지겠느냐?”

여의는 안타까운 눈으로 황후를 바라보며 그녀를 부축했다.

“소인, 침상으로 모시겠습니다.”

황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여의의 부축을 받아 침상으로 향했다. 그러나 황후는 밤이 깊을 때까지도 잠을 이루지 못했고 봉란궁은 계속해서 불이 꺼지지 않았다.

* * *

오권은 곧 야식을 가져와 진옥과 사방화에게 말했다.

“먼저 드시고 계시지요. 수라간에서 약을 달이고 있으니 제 시간에 드실 수 있도록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사방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권은 서둘러 내전을 나와 시화, 시묵을 찾아 사방화의 처방전을 부탁했다. 하지만 시화, 시묵은 황궁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사방화의 탕약을 맡기긴 꺼림칙하여 오권에게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태감, 저희가 수라간으로 갈 수 있게만 해주십시오. 아가씨 약은 저희가 직접 달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게나.”

오권은 고개를 끄덕이곤 두 사람을 수라간으로 안내해줄 사람을 불렀다.

한편, 사방화는 입맛이 없어 간단히 몇 입 먹곤 이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태자전하, 좀 드시지요.”

진옥도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들어가질 않소.”

* * *

한 시진 후, 시화와 시묵이 탕약을 들여와 사방화에게 건넸다. 

시간은 이미 삼경(*三更: 밤 11시 ~ 새벽 1시)이 다 된 무렵이었다. 오늘따라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도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들려왔다.

사경(*四更: 새벽 1 ~ 3시) 십분, 황제의 눈가가 어렴풋이 움직이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드디어 황제가 눈을 떴다.

줄곧 황제의 침상을 지켜보던 사방화는 황제가 깨어난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리고 황제도 천천히 고개를 돌리다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는 사방화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사방화는 아무 말 없이 황제를 바라봤고, 황제도 눈앞에 무수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가는 듯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있는 이 순간, 공기마저도 싸늘해져 가는 듯했다.

반면, 진옥은 침상에 엎드려 황제의 손을 움켜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어 아버지가 깨어난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다 잠시 후, 황제의 기침 소리에 진옥이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

“아바마마! 일어나셨습니까?”

황제는 금방이라도 폐가 튀어나올 것처럼 심한 기침을 토해냈다.

진옥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오랜 시간 꿇어 앉아 있던 탓에 다리에 쥐가 나 이내 다시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오 태감, 어서 물을 내오라!”

이어진 진옥의 명에, 오권은 서둘러 물을 내와 황제를 부축해 일으켰다.

팍-

황제의 거센 손길에 오권이 들고 있던 잔이 깨져버렸다. 

“폐하…….”

“아바마마?”

오권과 진옥은 동시에 깜짝 놀라 황제를 바라보았다.

내내 창백했던 황제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기침은 두 눈까지 다 충혈 될 만큼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심각한 황제의 모습에 진옥은 서둘러 사방화에게 도움을 청했다.

사방화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맥을 짚기는커녕 그녀는 가만히 서서 황제를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했다.

그에 황제도 기침을 뚝, 그치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래, 그래. 참 대단하신 사방화 납셨구나! 직접 내가 눈 감는 모습을 보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냐?”

아무런 말이 없는 사방화를 보고, 황제가 더 거세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새 말도 다 잊은 게야?”

사방화는 그제야 담담히 입을 열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진실을 말한다고 했거늘 폐하께선 지금 이 순간까지도 제게 화를 내는 데에 여념이 없으시군요. 부디 자중하시지요.”

황제는 이내 금방이라도 사방화를 잡아먹을 기세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사방화는 너무도 고요한 눈빛으로 차분히 운을 뗐다.

“300년 전, 북제와 남진은 전쟁을 치르고 옥씨 가문과 왕씨 가문 모두 피해를 봤습니다. 그리고 두 나라는 휴전에 들어갔었지요. 하지만 이는 양국 제왕 두 분 다 달가워하지 않던 결말이었습니다. 어서 부국강병을 이뤄 상대를 무찌르고 강산을 통일하려 눈에 불을 켜고 계셨지요.

옛날 말에 말라 죽은 낙타라도 말보다는 크다는 말이 있듯, 아무리 북제의 옛 국정과 수도 터가 오래됐다한들, 북제의 국력은 남진보다도 강했습니다. 남진은 북제가 부국강병을 이뤄 남진을 초월해 더 이상 상대조차 되지 못하도록 클까 두려움에 떨었고요. 

그리하여 시조 황제폐하께선 수없이 사씨에게 도움을 간청하시어 우리 사씨에게 귀족 세습을 이루도록 해주시고, 강산 절반까지 내주시며 남진을 평화롭게 지켜내셨습니다. 이에 사씨에서도 시조 황제폐하의 깊은 은혜에 감명 받아 남진을 지키기 위해 충성을 다하였지요.”

황제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남진은 사씨로 인해 사농공상이 번성했고 불과 백년 만에 북제를 점령해 천하를 얻을 수 있을 만큼 힘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백년 후, 남진의 황제폐하께선 시조 황제폐하와는 다르게 천하를 향한 포부도 다 잊고, 사씨들 공로도 다 잊고서 날로 커져가는 사씨가 황권을 위협할까 두려워만 하셨습니다.

남진은 백 년 전부터 사씨를 기탄하기 시작해 권력을 빼앗는 데에 그치지 않고 갖은 수를 동원해 내부 분란을 일으켰습니다. 남진은 현재 북제보다도 국력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내란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다른 곳에 힘을 쏟느라 더 이상 천하를 제패하는 데에 심기를 쏟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이내 점점 황제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200년이 지난 지금, 폐하의 시대에선 사씨에 대한 압박은 더 심해졌습니다. 타인에겐 그 무엇도 빼앗기지 않으려 하시면서 사씨 없이 지금의 남진 강산이 있을 수 있을 거라 여기신 겁니까? 사씨가 없었다면 애초에 남진은 일찌감치 북제의 밥이 되어 갈기갈기 찢겨졌을 겁니다.

300년 이래 남진이 북제를 제패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많았는지 아십니까? 하지만 이젠 모두 다 물거품이 되고, 남진은 북제에게 공격이나 받는 신세가 돼버렸군요.

남진의 황제폐하께선 충신 제거에만 혈안이 돼 갈수록 보잘 것 없어지시는데, 북제의 황제폐하께선 날이 갈수록 영명해지시고 천하를 향한 야심과 포부도 넘쳐나십니다. 아무리 옥가의 세력이 크다 한들 승승장구하는 북제의 폐하께선 그걸 적절히 이용할 줄 아시는데 남진은 대체 뭘 했습니까?

은산이 무너지고, 남진의 편이었던 은산 은위들은 모두 남진 강산을 노리는 검으로 변했습니다. 그 서슬 퍼런 칼날은 암암리에 살인을 저지르고, 내우외환의 시기가 도래하니 다시 사씨가 필요로 한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황제폐하, 정녕 폐하께서 원하시던 세상은 사씨를 제거해 남진 제국을 백 년 전으로 후퇴시키는 것이었습니까? 사씨가 사라지면 남진은 몇 십 년도 지나지 않아 거침없이 쳐들어온 북제로 인해 멸망의 길을 걸을 텐데요?

폐하께서 바라시는 것이 멸망한 다른 나라들처럼 남진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길 원하시는 것이었습니까? 그리하시고도 구천으로 가셔서 남진 시조 황제폐하를 뵐 면목이 있으시겠습니까?”

황제의 눈빛은 이제 빙판처럼 산산이 다 조각조각 부서져버렸다. 노여움도, 분노도 없는 그냥 그대로 쓸쓸히 다 비어버린 느낌이었다.

황제는 그렇게 힘없이 용상 위로 풀썩, 쓰러졌다.

“아바마마!”

진옥이 잔뜩 잠긴 목소리로 황제를 불렀다.

황제는 눈을 감고 죽은 듯 고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에 오권은 말없이 사방화를 째려보고는 묵묵히 뒤로 물러났지만, 사방화는 아직 말을 다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제왕이란 표상에 가려져 중요한 것을 잊은 분들이 얼마나 될까요. 황궁 옥좌에 앉아 스스로 제왕이라는 것만 인지하고, 남진 천만 백성들을 위해 복을 도모해야 할 천자임은 다 잊어버린 것이지요.

제왕은 진씨와 사씨는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이치 또한 알지 못했습니다. 어느 한쪽이 사라지기라도 하면 남진은 반드시 무너진다는 건 역사상 그 누구도 풀 수 없는 매듭 같은 것이었습니다.”

황제가 드디어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 풀래야 풀 수도 없는 그런 것이다. 그 많은 남진 제왕들이 사씨 여인 하나보다도 식견이 부족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구나.”

사방화는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황제는 다시 고개를 돌려 진옥을 바라봤다. 이미 새빨갛게 붉어진 진옥의 눈망울엔 군데군데 핏발까지 서 있었다.

“아바마마!”

“옥아, 짐도 너처럼 한 여인을 마음에 담았었다. 재덕을 겸비해 국모로서 제격인 여인이었지. 하지만 짐은 복이 부족했던 듯하구나. 식견이 얕은 네 어미에 이어 나조차도 후퇴하기만 했으니……. 짐은 네게 좋은 아비도, 이 강산의 좋은 황제도 아니었다. 이번 생은…… 이제 여기서 끝인 듯하구나.”

진옥은 눈물을 머금은 채 황제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아바마마…….”

아들 진옥을 보는 황제의 눈엔 아쉬움이 역력했다. 눈물을 흘리는 아들을 보니 곧 황제의 눈가에도 촉촉이 눈물이 맺혀갔다.

진옥은 덜덜 떨리는 황제의 손을 꼭 부여잡고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짐에겐 다행히 이리 좋은 아들이 있지.”

다 쉬어버린 목소리에서도 아들을 향한 자랑스러움이 묻어나왔다. 진옥은 그런 아버지의 쇠약한 목소리를 들으며 아예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아바마마, 소자가 반드시 좋은 약을 구해 치료해드리겠습니다…….”

황제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짐의 몸은 짐이 잘 아는 법이지. 가망이 없다.”

황제는 다시 아들의 붉어진 눈시울을 바라보다가, 한편에 서 있는 사방화를 한번 쳐다보곤 진옥에게 말했다.

“옥아, 나가 있거라.”

“아바마마?”

진옥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어서재 지붕 두 번째 칸에 숨겨둔 영정을 내오거라.”

“아바마마! 그럴 수 없습니다. 오 태감을 보내십시오.”

진옥이 침상 맡에 더 가까이 꿇어앉았다.

“말 듣거라! 사내는 쉽게 눈물을 흘려선 아니 되느니라. 황태자인 너는 더더욱 아니 되지. 오권에겐 따로 시킬 일이 있으니 어서 가거라.”

진옥은 입술을 깨물며 꼼짝하지 않았다. 그러자 황제는 사방화를 한번 보고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 말거라. 짐은 더 이상 저 아이를 어찌할 힘조차 없다.”

진옥은 고개를 돌려 사방화를 바라봤다가, 사방화가 살짝 고개를 끄덕여보이자 할 수 없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옥이 떠나고, 황제는 다시 오권에게 분부를 내렸다.

“영친왕부에 가서 형님과 형수님을 모셔오너라. 좌우상부, 영강후부, 한림 대학사부, 감찰 어사부에도 사람을 보내 즉시 황궁으로 들라 전하고, 또 황궁에는……. 황후와 태비마마만 모셔오면 될 듯하다.”

오권이 어두운 안색으로 물었다.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8황자마마와 나머지 황자마마들은 어찌할까요?”

“태비마마께서 오시면 경이도 당연히 소식을 듣고 올 게다. 나머지는……. 따로 부를 필요 없다.”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오권이 급히 떠나고, 이제 내전엔 사방화와 황제 단 두 사람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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