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6화 되돌릴 수 없다 (2)
잠시 후, 사방화가 담담한 얼굴로 손을 내려놓고 진옥에게 말했다.
“내복의 기력이 남아있질 않는 데다 심혈까지 고갈돼 더는 손 쓸 수 없는 상태입니다. 길어도 내일 오시(*午時: 아침 11시 ~ 오후 1시)를 넘기지 못하실 겁니다.”
진옥은 안색이 창백해진 채 다리가 풀려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진옥이 아무리 뒤에서 황제와 맞서려 했다 해도 어쨌든 두 사람은 피를 나눈 부자지간이었다. 뼈가 부러져도 핏줄은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인데, 아들이 어찌 아버지의 위독한 모습을 보고 마음이 평안할 수 있겠는가.
이내 사방화는 뒤로 물러서 한쪽 침상에 걸터앉았지만, 진옥은 안색이 굳어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태자전하, 바닥이 차갑습니다. 몸을 생각하셔야지요.”
오권이 조심스레 다가와 앉을 것을 청해도, 진옥은 결국 이마를 부여잡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방화, 아바마마께선 언제쯤 깨어나실 수 있겠소?”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숨을 거두시기 직전 잠시 깨어나는 게 마지막일 겁니다.”
사방화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날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내전을 밝히는 등불은 더 희미한 빛을 발했다. 영친왕과 좌우상, 영강후는 여태 바깥에서 자리를 떠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니, 찬란한 황금빛 침상 아래 모여 있는 두 부자가 보였다. 진옥은 눈을 감고 침상 머리에 엎드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황제는 거친 숨만 힘겹게 몰아쉬고 있었다.
사방화는 멀리서 이를 지켜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전생에선 이맘때만 해도 황제는 멀쩡히 위력을 떨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생에선 황제는 이승과의 이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이었다.
황제의 끝을 바라보는 지금, 사방화는 딱히 속이 후련하지도 않았다. 그저 만감이 교차하는 탓에 무슨 감정인지 말로 형용할 수도 없었다.
바깥에선 문무백관들이 내전의 동태를 살피며 초조하게 기다렸지만, 안에선 아무런 낌새도 보이질 않았다. 그렇게 야속한 시간은 흘러 밤이 되었다.
* * *
“태자전하, 밤이 깊어 바닥이 더욱 차갑습니다! 어서 일어나시지요. 태자전하께서 감기에라도 걸리시면 폐하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오권의 목소리에, 진옥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사방화를 바라보았다.
발갛게 부어오른 진옥의 두 눈을 보니 여태 소리 없이 운듯했다. 사방화도 그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밤이 깊었소. 어젯밤부터 여태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했으니 그 몸으로 어찌 감당할 수 있겠소? 내 서둘러 그대가 머물 곳을 마련해 드리겠소.”
사방화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깨어나시려면 한참은 걸리실 것이오. 아바마마께서 깨어나시는 대로 곧장 알려드리겠소.”
사방화가 계속해서 고개를 가로젓자, 진옥은 다시 오권을 바라보았다.
“그럼……. 오 태감, 일단 담백한 것으로 야식을 준비해오라.”
“예, 말씀 받들겠습니다!”
서둘러 밖으로 향하던 오권이 뭔가 떠오른 듯 다시 조심스레 질문했다.
“왕야와 대인들께서 모두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찌하심이…….”
“내일 오시(午時)까지는 시간이 남아있다고 했으니 그리 빠르진 않을 것이다……. 백부님과 대인들께 어서 부로 돌아가 쉬시고 내일 다시 입궁하시라고 전해드려라.”
“알겠습니다!”
오권이 내전을 빠져나와 영친왕과 대신들에게 진옥의 말을 전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떠났지만, 영친왕만은 오권을 꼭 붙잡고 물었다.
“태감, 안의 상황이 어떤지 말해다오.”
“폐하께선 어제 오후를 마지막으로 지금껏 깨어나지 않고 계십니다. 태자전하께선 폐하의 침상 앞에 꿇어앉아 계시고 방화 아가씨께선 옆 침상에 앉아 계십니다. 아가씨께서 맥을 짚어본 바에 의하면 길어도 내일 오시(午時)를 넘기지 못할 거라 하셨습니다.”
“내일 오시라니……, 내일 오시는 너무……. 나보다도 어린 아우가 어찌…….”
영친왕은 급속도로 어두워진 낯빛으로 눈시울까지 붉힌 채 말끝을 흐렸다.
“왕야, 어제 아침부터 지금껏 쉬지도 못하셨으니 어서 돌아가 쉬시지요. 내일이면 하셔야 할일이 더 많아질 테니 몸이 상하시면 안 되십니다.”
영친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거운 걸음을 뗐다. 오권은 금세 많이 늙어버린 것 같은 영친왕의 뒷모습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황궁 앞에선 좌우상, 영강후와 대신들이 영친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야, 오 태감이 왕야께는 무슨 말을 하셨습니까? 폐하는 어떠하십니까?”
좌상이 곧장 영친왕에게 다가와 물었다.
영친왕의 눈에선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듯했다.
“오 태감이 말하길, 방화가…….”
영친왕은 돌연 그대로 말이 없어졌다. 그러다 그도 더 이상 방화라는 친근한 호칭이 어색하다고 생각됐는지 다시금 말을 정정했다.
“방화 아가씨가 폐하의 맥을 짚어본 바로는 길어봐야 내일 오시(*午時: 아침 11시 ~ 오후 1시)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 했소.”
좌우상, 영강후와 대신들은 일제히 안색이 급변했다.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수일전만 해도 괜찮아 보이시던 폐하께서 어찌……. 이렇게 빨리 가실리가 없는데…….”
영강후는 말도 다 잇지 못했다.
“그러니 말입니다. 폐하께서 어찌……, 어찌 내일 오시(午時)를 넘기지 못하신단 말입니까?”
좌상도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영친왕은 이내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믿을 수가 없소. 하지만 오 태감이 거짓을 고하는 것 같진 않았소. 태자가 한시도 폐하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고 하오.”
그에 좌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우리 모두 며칠째 폐하를 뵙지 못했잖습니까. 우상, 그날 폐하께선 좀 어떠셨는가?”
“그다지 좋지 않아 내 자네를 막았던 걸세.”
우상이 답했다. 그러자 바로 영강후가 물었다.
“그럼 폐하께서 진정 더 이상 버티지 못하신단 말입니까?”
우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화 아가씨 의술이 뛰어나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잖습니까. 아가씨가 그렇게 말했다면 내일 오시(午時)를 넘기지 못한다는 말은 사실일 듯합니다.”
“폐하와 아가씨는 내내 서로를 탐탁지 않아 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는데 이제와……. 아가씨의 그 말을 믿어도 되는 것인가?”
이어진 좌상의 말에, 우상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방화 아가씨는 못 믿을지라도 태자전하는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좌상도 침묵에 잠겼다.
그때, 영친왕이 입을 열었다.
“우선 다들 부로 돌아가지. 태자가 내일 아침 입궁하라 했으니 내일 아침 일찍 모이도록 하고.”
좌우상과 영강후, 대신들도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 집으로 향했다.
* * *
영친왕부는 여전히 불이 환하게 밝혀 있었다.
영친왕비는 영친왕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 나왔다.
“방화가 태자와 함께 돌아와 궁으로 들었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영친왕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이에요? 방화를 만나셨습니까? 당신께 무슨 말이라도 하던가요?”
쏟아지는 영친왕비의 질문에, 영친왕은 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날 왕야라고 부르며 깍듯이 예를 갖추더군. 다른 말은 없었소.”
순간 영친왕비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럼……, 정녕 태자와 혼인하겠다는 게 사실인겁니까?”
이내 영친왕은 영친왕비의 손을 꼭 잡아왔다.
“부인,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오. 오 태감이 말하길 방화가 폐하의 맥을 짚어보곤 내일 오시(午時)를 넘기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했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영친왕비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잠시 두 눈만 깜빡였다.
“폐하께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오.”
영친왕비는 곧 안색이 급속도로 굳어져 몸까지 다 굳어버렸다.
영친왕은 그런 부인의 손을 토닥이며 방으로 데려가 의자에 앉혀주었다.
잠시 후, 영친왕비가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내일 오시(午時)를 넘기지 못할 거라는 말씀이세요?”
영친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하더군.”
“그게……. 어찌 이렇게 갑작스러울 수 있습니까?”
영친왕비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황궁에서 돌아오는 길 내내 생각을 해봤소. 나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구려. 아우는 일찍이 중병에 걸렸으나 약도, 의원도 없이 버텨왔던 것이오. 이 남진 강산을 누구보다 잘 이끌기 위해, 앞길을 막을 것이라 확신한 사씨를 없애버리겠단 그 마음이 한평생 집념이 되어버린 것이오.
하지만 갖은 방법을 동원해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염원이 연거푸 좌절이 되고, 병에 걸린 뒤로 태자에게 희망을 걸었으나 병제를 바꾸어 군권을 다시 사씨에게 넘겨주려는 태자의 모습을 보며 모든 게 물거품이 됐다고 생각했을 거요. 그리하여 결국은 저렇게 일어나지 못하게 된 것 같소.”
영친왕비는 긴 한숨을 내쉬며 눈시울을 붉혔다.
“왕야보다도 젊으신 분이 저렇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러게 말이오……. 왕비, 여전히 아우를 잊지 못하고 당신과 혼인할 수 없었던 걸 원망하고 있는 건 아니오?”
“무슨 말씀이세요! 당신과 혼인 성지가 떨어지던 날 전부 다 내려놓았습니다. 그저 이렇게 가버린다고 하니……. 마음이 아플 뿐이에요.”
영친왕비가 영친왕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아우가 한평생 당신을 얼마나 마음속에 품어왔는지 그대도 잘 알지 않소? 아우는 평생 고생만 하다 이렇게 가는구려.”
이어진 영친왕의 말에, 영친왕비도 결국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이 옥완을 그리워하던 것도 다 알고 있어요.”
영친왕은 잠시 목이 메여 영친왕비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래, 내 지난 몇 년간 잊지 못했던 건 사실이오. 하지만 이제는 전혀 그렇지 않소. 부인,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런 걸로 질투하는 것이오?”
영친왕비도 콧방귀를 뀌다 끝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이 질투하는 거면서 제 탓을 하시는 거예요?”
하지만 부부의 웃음도 얼마가진 못했다.
다시 수심 가득한 얼굴이 된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어졌고, 잠시 후에야 영친왕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떡하지요? 무슨 방법이라도 있으신 거예요?”
영친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태자가 오늘은 쉬고 내일 아침 궁으로 들라고 하더군. 폐하께선 어제 오시(午時)부터 지금껏 깨어나지 않고 계신다고 했소.”
“지금 폐하 곁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누구랍니까?”
영친왕비가 물었다.
“어제 오후에 황후, 태비마마, 비빈들 모두 침전에 들었지만, 폐하께선 황후와 태비마마마저도 뵙지 않겠다고 하셨소. 황후께선 반나절을 기다리다 끝내 궁으로 돌아가셨고, 이틀째 폐하를 뵙겠다고 자리를 지키던 진경은 결국 더위를 먹고 쓰러졌소. 그렇게 태비마마께 이끌려 궁으로 돌아갔고. 지금은 태자와 방화만이 폐하 곁을 지키고 있소.”
영친왕의 말을 듣고, 영친왕비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리도 그만 쉬어요. 어제부터 온종일 자리를 지키고 계셨던 탓에 안색이 말이 아닙니다. 푹 쉬셔야 내일 다시 일어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일 아침 저도 함께 궁에 들겠습니다.”
영친왕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강이는 언제쯤 돌아올는지 모르겠구려.”
“돌아오지 않는 게 차라리 나아요. 만약 그 모습을 보기라도 한다면……. 남진 하늘이 뒤집혀버릴지도 모릅니다.”
영친왕도 영친왕비의 말에 동의하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내실로 들어서자 잠시 후 영친왕부의 불도 모두 다 꺼졌다. 그리고 경성 각 부랑의 등불도 하나둘 꺼지기 시작했지만, 오직 하나 황궁만은 대낮처럼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